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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앙' 1000명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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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앙' 1000명을 맞으며

[발행인의 편지 ②] '프레시안언론공동체'를 향하여

'프레시앙'이 1000명을 돌파하던 지난 11월 30일 저녁, 10여년만의 동창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안산에 갔었습니다. 역 앞은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의 로고송과 선거운동원들의 고함에 가까운 '잘 부탁합니다' 인사 소리로 엄청 시끄러웠습니다. 택시를 타자마자 "되게 시끄럽네" 하고 불평을 했더니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 아저씨는 "그래도 어떡합니까, 나라의 대사인데"라며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기사 아저씨는 이어 "아무리 봐도 겸손한 놈은 하나도 없어. 어쨌든 좌익세력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몰아내야 돼"라고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약간의 적개심도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이 아저씨, 수구꼴통이네'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어쨌거나 이명박이나 이회창 후보가 되는 게 아닙니까"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는데, 이 아저씨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문국현 씨가 아까워. 좀 더 일찍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현 집권세력을 좌익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나라당 지지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문국현 후보가 가장 나은 대통령감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대권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정치세력, 그 대선판을 국민에게 전해주는 언론, 그리고 정치현상을 해설해주는 이른바 정치전문가들까지 모두가 그저 기존의 대결구도에만 매몰된 채, 민심의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기사 아저씨의 생각을 '기존 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고, '문국현 씨도 일단 정치판에 발 들여놓으면 뭐 별 수 있나, 원 오브 뎀이 되는 거지'라고 뻔한 '예측'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보는 일반 국민의 눈과, 현실정치를 안다는 이른바 프로들의 시각에 이토록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 봅니다. 교과서적으로 언론은 '민주주의의 제 4부'라고 합니다. '공정한 심판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정확한 정보 전달과 건전한 토론장 역할을 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정치든, 경제, 사회든 갈등하고 대립하는 세력들이 있으면 무작정 어느 한 편을 들기보다는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전체를 위해 보다 나은 결론, 보다 원만한 타협을 이루는 데 일조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언론의 역할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권력을 향한 정치세력들의 각축에서 대부분의 언론들은 거의 무작정이라고 보일 정도로 어느 한 세력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정치세력간의 경쟁을 어떻게 국민의 복리증진에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은 정치세력의 하위파트너로 전락했습니다. 무슨 '당'이 아니라 무슨 '일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는 분명 정치세력과는 차별화된, 언론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할 텐데 그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세력과 언론간의 '비판적 거리'가 실종된 것입니다.

또 재벌과 같은 사회경제적 강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갈등에서는 강자 편을 들기가 일쑤입니다. 거의 절대적으로 언론사의 생존을 광고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이라는 말로 변명이 될 수 있을까요?

'프레시앙' 캠페인을 벌이면서 뜻하지 않은 소득을 하나 얻었습니다. '우리는 왜 언론을 하려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자문과 반성을 새삼 하게 된 것입니다. 6년여 전, <프레시안>을 시작하면서 저희들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반독재·민주화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언론의 역할도 어찌 보면 단순했습니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보다는 용기가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모두가 동의하는 최우선과제란 없습니다. 사회 여러 세력의 이해가 갈등하고 대립하는 다원화사회가 된 것입니다. 군사독재시절의 민주화운동 세력처럼 진리와 정의를 독점한 세력도 이젠 더 이상 없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해 갈등과 대립을 조절할 수 있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근거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젠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는 용기보다는 '우리 어느 길로 나아갈까'라고 함께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2001년 9월 24일 <프레시안>의 첫 날, 저희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서라면 대다수 사람들이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나듯 진실은 때론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대중들의 염원을 무참히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프레시앙'을 보며,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보내주신 '프레시앙이 되며'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 초심(初心)을 새삼 되새기게 됐습니다. 여러분들의 비판과 격려, 질책과 위로 속에서 <프레시안>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자문했습니다. 그날 그날의 보도에 얽매여 보다 큰 역사의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 '진실 추구' 등의 원론적인 낱말만을 주문처럼 외면서 현실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응전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습니다. '재미없고 딱딱하다'든가 '젠 체 한다'는 등의 비판은 바로 그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프레시앙' 여러분들의 참여는 이미 <프레시안>에 커다란 힘이 되고 있습니다. 재정적 도움은 그 힘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앞에 말씀 드린 것처럼 <프레시안>의 존재 이유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각오와 깨달음을 주신 것이야말로 정말로 큰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앙' 1000명,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의 불씨가 대지를 불사르듯' 각성된 개인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많은 숫자도 아닙니다. 저에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만 명, 나아가 10만 명의 '프레시앙'이 모여 <프레시안> 구성원 및 필자들과 함께 (가칭) '프레시안언론공동체'를 이루고, 이 공동체가 우리 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중요한 근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프레시안>의 보도가 '진실과 함께 감동'을, '깊이 있는 현실인식과 더불어 효과적인 실천 전략'을 제시하는 쪽으로 더욱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참여하신 1000여명의 '프레시앙'이 그 받침돌이 되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손문상 화백이 '프레시앙'을 위해 보내 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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