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문제로 온 나라가 뒤흔들리는데도 이례적으로 긴 침묵을 지켜온 노대통령이 지난 27일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대를 잔뜩 안고 기자회견을 지켜봤지만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노대통령은 삼성관련 현안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개진하지 않은 채 고작 삼성특검법 수용방침만을 밝혔다. 그것도 "문제가 많지만 어쩔 수 없어서 수용하기로 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지만 국회에서 재의결될 가능성이 높아 하는 수 없이 수용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증거는커녕 구체적 의혹도 없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당선축하금'을 수사대상에 포함시킨 건 "정치적 목적에 의한 대통령 흔들기"이며 "국회의원의 횡포이자 지위남용"라는 노 대통령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사안별 특검법은 '여소야대 국회'에서나 가능한, 다수 야당의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공직부패수사처 신설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평소 소신도 공수처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지 않는 조건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재벌중심 구체제의 파국이 예고돼 많은 국민들이 흥미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지금, 긴 침묵을 깨고 나온 대통령이 고작 위와 같은 "특검법의 문제점을 소상히 알려드리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 것은 국민의 기대를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작금의 흥미롭고 불안한 삼성비리국면에서 국민들이 대통령한테 듣고 싶은 것은 특검법의 문제점이 아니다. 대통령이 이번 삼성비리사태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으며, 삼성특검법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 파장을 어떻게 예측하고 있으며, 그것을 사회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는지, 한마디로 복잡다단한 삼성비리사태의 의미와 함의에 대한 대통령의 고민과 탁견을 들어보길 고대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생생한 증언이 진실임을 믿는다. 삼성이 잘못한 것도 다 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까지 어떻게 파헤칠 것이며 어떻게 처리해야 국가경제에 좋은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지금까지 삼성이 이러는 것을 몰랐느냐, 사정이 똑같은 다른 재벌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도 묻고 싶다.
노 대통령은 특검법의 문제점을 들려줄 게 아니라 이런 의문들과 책임 있게 씨름한 결과 얻어진 자신의 입장을 국민에게 소상하게 알려주고 국민의 걱정을 덜어줘야 했다.
아니, 이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궁금증과 의혹부터 풀어줘야 했다.
국민들은 이를테면 노 대통령이 무슨 이유로 지난 10월 29일이래 무려 30일간이나 삼성관련 침묵을 지켜왔는지, 지난 5년간 검찰총장이 이건희 회장의 소환조사를 계속 미루는 걸 무슨 이유로 방치했는지, 10년째 계속된 이건희 폭탄돌리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재용에 대한 에버랜드 헐값발행사안의 주범으로 당시 사장 등 전문경영인을 꼽은 검찰수사 결과와 법원 판결에 동의하는지, 서울에만 40명이 넘는다는 잘나가는 떡값검사들을 검찰조직이 자체 조사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대통령의 의견을 듣고 싶다.
또한 노대통령이 임채진 검찰총장 등 떡값 3인방을 임명할 때 삼성장학생 여부를 검증했는지,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인사검증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지, 무엇 때문에 임채진 검찰총장 등 떡값 3인방을 끌어안고 가는지, 향후 삼성 등 재벌 '불법상속' 사안들을 어떻게 처리할 방침인지, 대통령의 책임 있는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생생한 증언으로 재벌중심 구체제의 썩은 속살이 드러난 이래 재벌중심 구체제는 시한부 운명을 맞았다. 부패한 구체제를 청산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의 새로운 발전과 도약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청와대와 검찰, 재경부와 국세청 등 권력기관 구석구석에 삼성발 시한폭탄이 굴러다니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어디까지 이를 파헤칠 것이며 어디까지 파헤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떡값'수뢰 명단 3인방이 각각 검찰총장, 중수부장, 청렴위원장 자리를 떡 하니 차고 앉아있는 상황은 숨이 막힌다. 떡값명단 검찰총장과 중수부장에게 보고하거나 지휘를 받는 것이 부적절해서 누구의 지휘도 받지 않는 무책임하고 기형적인 삼성특별수사본부를 생각해도 숨 막히는 건 똑같다.
기네스북 감인 이런 기현상은 노대통령이 떡값 3인방을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고집스레 끌어안고 있는 탓에 초래된 것이다. 한나라당과 통합신당이 검찰에 잘 보이기 위해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언론과 논객들이 눈감아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통사람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작금의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유난히 오만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나라에 사는 분처럼 태평해 보였다.
사제단 김인국 신부님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듣고 난 후 "내 영혼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악과 만나서 눈이 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말로 표현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느낌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지난 임기 내내 이런 '삼성공화국' 현상이 계속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을 어떻게 풀 생각인가?세종이 되고 싶었으나 태종의 역할을 요구받아 온 노 대통령의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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