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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제3의 주인을 모십니다

[발행인의 편지] 새로운 언론실험에 나서며

'프레시안에서 FTA광고 그만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프레시안에서 FTA광고 그만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얼마 전부터 <프레시안>에는 위와 같은 내용의 의견광고가 실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초 이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한미FTA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던 <프레시안>에, 한미FTA를 옹호하는 정부의 홍보광고가 실린 데 대한 <프레시안> 독자들의 대응이었습니다. 몇몇 열혈 독자 분들이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모아 유료 의견광고를 내주신 것입니다. 저희로서는 한편 고맙고 한편 부끄러웠습니다.

'뭐야, 겉 다르고 속 다른 거 아냐. 기사로는 그토록 열심히 한미FTA를 비판하면서 한미FTA를 옹호하는 광고를 싣다니" 하는 따가운 질책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오죽 사정이 어려웠으면 그런 광고를 냈겠냐. 우리가 도와주자'라는 격려의 뜻도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독자들의 질책과 격려가 담긴 이 광고는 제가 이 글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지난 몇 달간, 아니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줄곧 고민만 해오다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을 이제는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프레시안>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독자 여러분들을 <프레시안>의 제3의 주인으로 모시자는 것입니다.

기사와 광고는 별개인가

우선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데 대해 약간의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가을, 갑자기 정부광고가 끊겼습니다. 여러 경로로 확인해 본 결과, 연초부터 전개된 <프레시안>의 강력한 반FTA 논조에 대한 대응조치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취할 방법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봄, 한미FTA 협상의 타결을 앞두고 정부측으로부터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일반 광고비에 10배 가까운 액수를 제시하면서 한미FTA 찬성광고를 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광고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선 그 파격적인 액수에서 '매수 당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아가 그동안 <프레시안> 기사를 통해 한미FTA의 진실을 접해 왔던 독자들의 따가운 질책이,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9월, <프레시안>은 정부의 한미FTA 홍보광고를 다시 실었습니다. 나름의 논리와 사정은 있었습니다. 우선 이번 광고비는 지난 봄처럼 '거액'이 아니라 '통상적인' 액수였습니다. '매수 당한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회사 사정도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사와 광고는 별개'라는 언론계의 상식을 내세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희는 <프레시안>의 보도 논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광고의 게재 여부를 놓고 오락가락 한 셈이 됐고, 이에 대해 <프레시안>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프레시안에서 FTA광고 그만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라는 의견광고를 내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전개된 이상, 저희로서는 '기사와 광고는 별개'라는 언론계의 오랜 상식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아가 <프레시안>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기사와 광고는 별개인가? 지난 6년여간 <프레시안>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프레시안>에 한미FTA를 찬성하는 정부 광고가 실렸다가 중단되고, 다시 거액의 광고제의가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프레시안>이 처음부터 한미FTA를 찬성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언론사의 보도 논조가 광고게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 아닐까요?

2005년 말 황우석 박사 사건 때는 <프레시안>의 관련 보도 때문에 광고가 중단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한 광고주로부터 '프레시안의 비판적 보도 논조에 대한 누리꾼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부득이 광고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광고 중단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언론 본연의 임무인 진실 추구가 광고를 매개로 한 압력에 의해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독자들도 '기사와 광고는 별개'라는 언론계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서 FTA광고 그만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라는 독자들의 의견광고에서 드러나듯, 독자들은 언론의 보도논조와 상반되는 광고의 게재를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프레시안>의 젊은 기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의 FTA찬성광고가 게재되던 지난 해 여름, 한 막내 기자가 "어떻게 한미FTA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찬성광고를 실을 수 있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광고주와 독자와 기자들까지 '기사와 광고는 별개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도 우리 언론계가 '기사와 광고는 별개'라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언론사의 생존을 거의 전적으로 광고비에 의탁해야 하는 우리 언론시장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언론시장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광고주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나라입니다. 신문사의 생존이 독자들이 내는 구독료와 대기업 등 광고주가 내는 광고료에 의해 지탱된다고 했을 때, 광고료 수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의미입니다.

2000년 이후 엄청나게 늘어난 무료신문과 인터넷신문은(이 둘은 기본적으로 구독료를 받지 않습니다) 말할 것도 없고, 구독료를 받는다는 일반 종이신문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광고료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발표된 신문발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구독료 수입이 전체 수입의 0.8%에 불과한 신문도 있더군요.

이러한 상황은 유럽이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분명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구독료 수입 대 광고료 수입이 대략 6 대 4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내는 구독료수입이 대기업 등이 내는 광고료 수입보다 많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많으냐에 따라 충성의 대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절대적으로 광고비에 언론사의 생존을 의존해야 하는 우리 언론시장을 보면서 저는 경향신문 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일화를 떠올리곤 합니다.

유신독재가 그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79년 여름, 경향신문의 젊은 기자들이 자사의 친정부적 왜곡보도에 항의해 사장실에서 농성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장께서 사장실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를 가리키며 기자들을 '꾸짖었다'고 하는군요. 그 액자에는 '음수사원(飮水思源)', 네 글자가 씌어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 즉 '너희들 월급을 누가 주는지 명심하라'는 얘기였습니다.

현재의 경향신문은 100% 사원지주회사로 어떤 언론사보다도 독립적인 소유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청와대가 회사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일종의 관영매체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 기자들에게 한 얘기는 '너희들 월급은 청와대에서 주는 것이니 감히 주인을 거스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던 셈입니다.

대기업 등 광고주가 언론을 먹여 살리는 요즘, '음수사원'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대기업의 이익과 국민 일반의 이익이 충돌할 때 언론이 국민의 편에 설 수 있을까요? 요즘 언론에서 삼성재벌이 비판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광고가 언론의 절대적 생존기반이 되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뉴스가 오락화된다는 것입니다. 광고주가 광고를 내는 이유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생존을 위해 독자보다는 광고주를 의식해야 하는 언론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가 많아야 광고유치에 유리할 테니까요. 갈수록 연예오락기사들이 늘어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언론에 '신정아' 기사는 차고 넘치는데 '삼성비자금' 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독자가 뉴스를 사는 것이 아니라 광고주가 뉴스를 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언론이 광고주의 이익과 대중들의 기호에만 영합하다 보면 언론 본연의 임무인 진실 추구를 회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황우석 교수 연구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앞장섰던 MBC <PD수첩>이 대중들의 비난과 광고 감소를 겪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프레시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당시 한 독자의 댓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잔인한 현실보다는 몽롱한 환상을 원한다." 대중들의 몽롱한 환상을 깬 데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거짓과 환상에 바탕을 둔 것일망정 대중들의 희망을 깨뜨린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진실은, 시대의 진실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추악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당장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절망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더 많습니다.

뉴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이 오락화 돼 가는 요즘 세태에서 비타협적인 진실의 추구는 당장은 대중들의 사랑이 아니라 비난을 초래하기 십상입니다. 진실은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언론에게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자와 필자와 편집자의 행복한 결합

지난 1993년, 일본의 비판적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슈칸 깅요비(週刊 金曜日)>란 시사 주간지를 창간했습니다. 정부와 대기업 등의 부정부패에 대한 감시와 탐사보도를 주요 임무로 하는 이 주간지는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데, 이 주간지의 가장 큰 특징은 일체의 광고를 받지 않고 오로지 독자들이 내는 500엔의 구독료만으로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광고를 받을 경우 광고를 빌미로 한 광고주의 압력과 회유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슈칸 깅요비>의 언론인들은 창간 취지문을 통해 "어떠한 기구, 어떠한 기성조직으로부터도 독립해, 독자와 필자와 편집자 간의 협력의 길을 열어, 공동참가.공동편집에 의해 시민주권을 실현"함을 목표로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 1935년, 당시 유럽대륙을 풍미하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창간된 '금요일'이란 잡지에서 제호를 따왔다고 말합니다. 로망 롤랑, 앙드레 지드, 줄리앙 방다, 퀴리 부부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 '금요일'이란 잡지의 편집방침이 바로 '자유로운 작가.평론가와, 자유로운 시민들로 이루어진 독자대중들간의 직접교류'였다고 합니다.

이제 <프레시안>도 독자와 필자와 편집자의 공동협력에 의한 독립언론의 길을 추구할 때가 됐다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이번 <프레시안> 독자들의 유료 의견광고가 그 계기가 됐습니다.

이제까지 <프레시안>에는 두 그룹의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현재 <프레시안>이 탄생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기여해주신 주주들과 <프레시안>에 몸담고 일하고 있는 20명 남짓의 기자 및 운영요원들입니다. 하지만 15명 안팎의 <프레시안> 기자들이 한국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시대적 상황들의 진실을 파헤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고, 저희가 의도했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네트워크형 공동체라는 인터넷 매체의 특성에 착안해, 우리 시대 최고의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참여하는 시대의 공론장을 꿈꿔 왔습니다. 시대를 고민하는 이들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프레시안>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만나 시대의 진실을 파헤치고 우리의 나아갈 길에 대해 생산적인 토론을 벌이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실제로 수 백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그동안 <프레시안>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대부분은 아무런 보수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제2의 주인입니다. 지난 6년여간 <프레시안>의 보도가 이 사회에 보탬이 됐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분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몸담고 있는 저희들은 <프레시안>이라는 괜찮은 공론장을 만들어내고 관리해가는 편집자, 도우미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희는 <프레시안>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여러 독자 분들을 <프레시안>의 제3의 주인으로, <프레시안> 지킴이로 모시고자 합니다. 아니, 신문의 궁극적 존재 이유가 독자라는 점에서 여러분들이야말로 제1의 주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프레시안> 제3의 주인, <프레시앙>을 모십니다

사실 <프레시안>은 창간 초기부터 이러한 모델을 꿈꿔 왔습니다. 그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것은 '뉴스 콘텐츠는 공짜'는 국내 언론시장의 상식을 거스르기가 두려웠고, 관심 있는 독자들의 평가와 협력을 요구할 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지난 6년여간의 보도.논평활동을 바탕으로 감히 독자 여러분의 평가와 협력을 요청합니다. 과연 지난 6년간 <프레시안>의 언론 활동이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 협력과 비판을 받을 만큼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황우석 교수 파동과 한미FTA 논란을 비롯해 비정규직 등 노동문제,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제문제 등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최종적인 평가는 독자들의 몫일 것입니다.

<프레시안> 독자회원들의 참여로 <프레시안>에서 곧바로 모든 광고가 없어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생존을 위해 <프레시안>의 소신과 어긋나는 광고를 싣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독자 여러분이 <프레시안> 기자들의 월급 정도는 만들어 주신다면 정부나 대기업 등 사회적 강자의 압력이나 대중들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진실 추구를 통해 독자들에 충성하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 또한 독자위원회 구성, <프레시안> 필자 및 기자와의 만남 등을 통해 독자들의 참여를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질책과 격려 속에 <프레시안>은 시대의 편견과 변덕에 흔들림 없이 꿋꿋이 진실을 추구해 나가며 참신한 공론장의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독자회원 캠페인은 <프레시안>이 지난 6년여간 펼쳐온 언론활동에 대한 독자들의 준엄한 평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봄, 정부의 한미FTA 광고를 받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면서 저는 기자들에게 "너희들을 굶길 수는 있어도 울릴 수는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자존심과 원칙을 버릴 수는 없었다는 의미였습니다만, 생존 역시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품위 있는 생존이어야 하겠지요.

<프레시안> 제3의 주인, <프레시앙>이 되어 이 시대 작지만 소신 있는 언론매체를 함께 키워나가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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