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곳곳에 잠복한 갈등 요소들이 부각될 경우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자금 송금 문제로 '1단계 조치'의 이행이 더뎌졌던 올 봄의 교착이 되풀이될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흔히 '불능화 단계'로 불리는 10.3합의는 핵시설 폐쇄를 약속했던 2.13합의에 이은 2단계 조치다. 10.3합의는 북한이 연내에 핵시설 3곳을 불능화하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할 경우,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고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종료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 쟁점 1. 우라늄 농축 - "北, 관련 시설·문서 접근 허용"
이중에서 북한이 이행해야 할 불능화는 안전·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연내에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불능화는 연내 이행이 가능하다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미국도 불능화 진전에 만족을 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 몫의 이행 사항 중 문제가 되는 것은 핵 프로그램 신고다. 신고는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 관련 내용과 북한이 보유한 플루토늄의 양을 보고하는 게 핵심이다.
그 중 UEP 신고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으나 <워싱턴포스트>(WP)가 10일 미국 및 한국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기사를 보면 북한이 물밑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음이 감지된다.
10.3합의문에는 UEP 신고 방법과 절차에 관한 별도의 내용이 명시되지 않아 북미간 별도 채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는데, 북한은 그에 따라 이미 실질적인 신고 혹은 해명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WP 보도의 핵심은 △북한이 미국 실무 전문가들에게 우라늄 문제에 관련된 시설이나 문서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를 통해 고농축우라늄(HEU)을 생산할 의도가 없었음을 미국에 입증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HEU 문제는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 발발의 핵심 원인이다. 미국은 북한이 HEU로 핵무기를 만들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해 왔고 북한은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런 북한이 우라늄 문제에 관한 시설과 문서를 미국에 보여줬다는 것에 대해 한 관리는 WP에 "과거 북한은 단지 '아니다'라고만 말했지만 이제는 우리들에게 확신을 주려 시도하고 있다"며 북한이 뚜렷한 태도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 문제에 관해 해명을 시도한다는 보도가 이번만은 아니다. 일본 <교도통신>은 10.3합의 발표 며칠 후 북한이 고강도 알루미늄 등 우라늄 농축 장비 도입 사실에 대해서는 시인했다고 보도했었다. 고강도 알루미늄은 우라늄 농축을 위한 핵심 장비인 원심분리기를 만드는 원료로, 미국은 북한이 고강도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것을 핵심 근거로 HEU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처럼 북한이 의혹의 근거를 일부 시인하면서도 HEU 생산 의도는 없었음을 입증한다면 이 문제에 관한 신고 역시 연내에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의 이같은 해명을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북한이 기존의 '아니다' 일변도에서 반 발짝 물러난 만큼 미국 역시 체면을 구기지 않는 선에서 물러나 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미국이 과연 그럴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WP는 만약 북한이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의사가 없었음을 증명한다면 미 정부의 정보조직은 물론 조지 부시 행정부의 신뢰도에 타격을 줄 전망이라고 선을 긋고 나섰다. 미국이 그 정도 해명으로 북한과 '체면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면 북핵 의혹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겠냐는 것이다.
■ 쟁점 2. 플루토늄 양 신고 - '사후정산' 받아들일까?
신고의 또 다른 축인 플루토늄 양도 만만찮은 쟁점이다.
북한이 약 50k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보는 미국의 추정치와 실제 북한이 신고하는 양이 '허용 오차' 이상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92~3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것도 바로 플루토늄 양 때문이었다.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은 △지난해 10월 핵실험 때 일부가 사용됐고 △일부는 핵무기(혹은 핵폭발장치) 안에 들어가 있으며 △나머지는 자연상태의 무기급 플루토늄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10.3합의에는 '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로 명시되어 있다. 문구로만 보자면 북한은 그간 추출한 플루토늄의 총량과 추출 시기 및 과정을 모조리 신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북미간의 별도 합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말에 따르면 북한은 그 중에서 핵실험 때 사용한 플루토늄 양, 나아가 핵무기 안에 들어간 양을 공개를 거부했다고 한다. 핵무기 제조 기술 수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경우 미국의 추정치와 북한의 신고량 차이는 더 벌어질 수 있다. 1994년 동결 이전에 추출한 소위 '과거핵'도 미국의 추정치와 북한의 신고량이 7kg 이상 차이가 난다.
하지만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발언 등으로 볼 때 플루토늄 신고 문제를 낙관하는 시각도 있다. 천 본부장은 6자회담이 열리던 지난 9월 30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플루토늄을 언제 얼마나 생산했고, 어디에 썼으며, 재고잔량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 보유량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등을 다 밝히고 그것을 확인하는 검증 활동도 허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것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현 정부에서 외교안보를 담당했던 한 전문가도 낙관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불능화 다음 핵폐기 단계에 가면 어차피 플루토늄 총량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라며 "미국은 핵폐기 단계에서 정확한 양을 '사후정산'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내 신고하는 플루토늄 총량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플루토늄 양 보다 우라늄 농축에 관한 북한의 해명을 듣는 것으로 연내 신고를 매듭짓겠다는, 소위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플루토늄 양에서 추정치-신고량 간 오차가 터무니없이 클 경우 미국 내 강경파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2단계의 암초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이 문제 역시 북미 양측이 한 발짝씩 양보해 '체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 쟁점 3. 테러지원국 해제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적용 해제는 미국이 취해야 할 행동이다. 10.3합의에는 불능화와 신고를 연내에 시행하기로 명시됐지만 테러지원국 해제는 그와 "병력적으로" 한다고만 되어 있다. 따라서 과연 미국이 '언제' 이를 이행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삭제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철저히 '행동 대 행동'에 따라 움직이는 북한이 테러지원국 해제가 연내에 되지 않으면 불능화·신고 역시 연내에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악순환의 반복을 의미하고, 미국이 북한자금 송금에 적극적인 조취를 취하지 않아 2개월간 교착을 면치 못했던 올 봄 BDA 사태의 재현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북미간 별도 합의서가 있다느니, 문서는 없어도 연내 삭제는 이미 합의된 사항이라느니 등의 보도가 잇달았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8일 워싱턴에서 나온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은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이 당국자는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10.3합의에 따라 분명히 6자가 연내에 1단계 불능화 조처를 완료하기로 했으며, 북한의 불능화·신고 조처에 따라 다른 나라도 상응 조처를 하기로 돼 있다"며 "여기엔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 역시 '연내 삭제'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연내 삭제 확인'이라고 해석한 언론들이 있었다.
테러지원국 연내 삭제의 변수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은 테러지원국 삭제와 '행동 대 행동'으로 맞물려 있는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와 신고다. 불능화는 테러지원국 삭제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한몸뚱이'다.
둘째 변수는 미국 정부가 한 나라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려면 지정 해제 발효 희망일 보다 45일 앞서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절차상의 문제다 그에 따라 연내 삭제를 위해서는 오는 11월 16일까지 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그 때까지는 불능화·신고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미 행정부가 의회 보고 없이 일방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고, 연내 삭제가 어렵더라도 의회 보고를 연내에 한다면 북한도 양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오는 등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셋째 변수는 일본의 저지 시도다. 일본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테러지원국에서 북한을 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는 오는 16일 미일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강력히 제기할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11일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 등 다른 카드를 제시하며 일본이 물러설 명분을 준다면 돌파구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정부 당국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둘 다 기존의 정책을 잘 바꾸지는 않지만 한 번 바꾸면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서 낙관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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