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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보고 배우는 서양사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시각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럽 내지 북미지역을 포함하는 서양 세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은 탁월한 문명을 발전시킨 우월한 지역으로, 비서양 세계는 야만적이고 정체된 지역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이라는 것은 19세기, 정확히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월을 고대까지 소급시키려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사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이렇게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상황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철구 교수의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 읽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문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약 10년간 서양사와 세계사를 우리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된 강 교수의 책으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1, 용의 숲, 2004>가 있다.

이 시리즈는 매주 2회(화, 목요일) 게재된다. <편집자>

필자 약력

1979-1988: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89-현재 : 이화여대 인문대 사학전공 교수
민족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계간 <민족현실> 발행인 역임
현 민족미래연구소 이사장

1.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1)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역사'의 쓸모 있음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끊임없이 역사와 접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TV나 영화에서의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나아가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까지도 모두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책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었지만 예수의 성배 전설을 현실로 끌고 온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매우 친숙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큰 열정을 가지고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단군이나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내는 적지 않은 수의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읽기'나 '공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을 이야기하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E. H.카의 널리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되뇌며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수천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온 후 수많은 역사책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정치가나 군인들, 학자와 지식인들, 또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역사의 이런 유용성은 특히 역사학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다른 학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과 객관성

이렇게 역사가 유용한 지식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정확한 사실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에 바탕을 둔 소설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실성 문제가 나온다. 역사는 어떻게 진실성을 갖게 될까?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역사를 단순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책에는 사실과 역사가의 상상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 바뀌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서양학문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는데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그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독일사람 레오폴트 랑케이다.
▲ 랑케 (Ranke, Leopold von), (1795~1886), 근대 역사학을 처음 시작한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

그는 역사를 쓸 때 역사가의 상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 연구란 '그것이 원래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인 사료를 잘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날 문서나 책, 비석, 고고학적 유물 등 사료들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 되고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 가운데에는 쓸모없는 것도 많고 또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들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랑케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가들이 랑케를 본받으며 19세기 말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역사학이 근대적인 객관적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과학과 같이 역사학도 보편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른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 쓰기와 객관성의 한계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 쓰기는 정말 가능할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인간이 한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부만이 요행히 살아남을 뿐이다. 이는 개인들이 일기를 써 놓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아 있는 사료 가운데에는 일부러 남긴 것들이 있다. 어떤 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두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부장품들과 같이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나 우연히 남은 것도 있다. 또 옛날 책이나 문서들도 좋은 사료가 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이 사료들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을 다시 엮어 낸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 쓰인 것이나 오늘날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다. 사관이란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사관은 처음 사료를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전체 과정에 간여한다.
사료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다 이용할 수 없으니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야 한다. 이때 무엇을 골라낼까를 결정하는 데 사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에는 같은 사료를 놓고도 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관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기호나 욕망, 편견, 또 그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지방색이나 민족의식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영향도 받는다. 현재라는 시점이 주는 영향도 크다. 누구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이런 한계들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려고 해도 자신의 편견이나 세계관, 이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이것은 랑케의 경우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독일 역사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그가 기초를 놓은 독일 역사학은 매우 이데올로기성이 강한 역사학으로 19세기 이후 독일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프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독일인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역사를 쓰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이 역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일 역사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의 역사학은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중심주의이다.
▲ 트라이치케 (Treitschke. Heinrich von )의 초상. 트라이치케는 랑케의 계승자로서 19세기 독일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것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그 밑에 집어넣든가 함께 결합하며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보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 사람들이 쓴 많은 서양사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노골적이든 아니든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비서양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문제이다. 서양만을 중시하며 비서양 세계의 발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또 서양세계에게 예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비서양 역사가들이 서양 역사가들이 쓴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 역사학을 선진 학문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경우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서양인들보다 더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유럽과 미국의 산물이다. 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문화가 정체되어 온 후진적인 지역으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서양국가들이 비서양 지역을 식민 지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불평등한 세계질서는 힘의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결과라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사나 세계사의 실제 사실과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또 그것은 상당 부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야 되겠는가? 먼저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2) 유럽중심주의와 그 역사학

'유럽'은 근대의 산물

요사이 유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 때 배낭여행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관광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가보지는 않았다 해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니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하면 그 이미지가 대체로 머리에 떠오른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 끝의 섬나라인 영국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우랄 산맥까지의 러시아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대륙이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리적 단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럽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혈통이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하나의 단위로 생각된다. 유럽 사람들이 백인이며, 또 생활양식, 언어, 문화, 종교 등 문화적 면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생각될만하다.
▲ 현대의 유럽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이런 모습의 '유럽'은 고대에는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최근 몇 세기 사이, 즉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7세기부터이나 그리스 시대에 유럽은 그리스 반도 전체이거나 그 일부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유럽과는 상관이 없다.
▲ 고대 로마의 판도

로마시대에도 오늘날 유럽의 경계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영토가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의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지역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기독교가 믿어지는 지역을 의미했다. 이런 생각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고 그 후 두 세력권이 경쟁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권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1세기 이후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빼앗으려 한 십자군 전쟁 때에 강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권에 속하지만 그리스 정교를 믿는 발칸 반도나 러시아 같은 지역은 카톨릭 지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은 15세기까지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세계라는 생각이 깨지고 대신 세속적인 가치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럼 점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세계를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유럽을 그 최고인 '문명' 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은 지역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야만'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이 합리성, 근대성, 자유,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로 생각된 반면 비유럽은 비합리성, 야만성, 부자유, 정체(停滯)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유럽'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문명이 모든 비유럽 문명에 비해 독특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가치관, 나아가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근대에 만들어졌으니 유럽중심주의도 당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문명이 우월하다는 18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 그 결과인 비유럽세계의 지배로 현실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문명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인류사 전체가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유럽의 다른 모든 문명들은 근대 유럽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자 부분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유럽 문명들의 비중도 크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중심주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유럽예외주의이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예외주의는 말 그대로 유럽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유럽 외에 어디에서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 세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세계사의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예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며 유럽이 성취한 것을 '유럽의 기적'이니 뭐니 하며 치켜세운다. 중세도시, 산업화,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주의 등등 유럽이 이룩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성과라는 것이다.
▲ 사이드 (Said, Edward W,)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이라는 책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달리 오리엔탈리즘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을 말한다. 16세기부터 시작되나 특히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에, 선교사 · 관리 · 학자 · 상인 · 여행자 등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나 글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세계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박해받은 선교사,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는 식민지 관리나 어용학자들이 아시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문명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나 독자성, 창조성은 대체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아시아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럽과 비교하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전통적인 성격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진보와 문명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는 덜 성숙하고 미개하여 스스로는 발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세계사가 당연히 인류의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유럽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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