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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남북관계 20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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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화 이후 남북관계 20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의 확립

<프레시안>-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동기획 강연 전문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은 남북관계를 불신과 대결의 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로 전환 발전시켜온 과정이오, 또한 한반도냉전구조의 해체와 평화체제를 모색해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년의 남북관계에서 우리는 2개의 역사적인 남북 합의문서를 보게 된다. 하나는 평화공존을 모색한「남북기본합의서(1991.12.)」요. 다른 하나는 화해협력의 새 시대를 연「6.15남북공동선언(2000)」이다. 지난 20년간의 남북관계 전개과정을 「남북기본합의서」로 상징되는 평화공존 모색단계와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시작된 화해 협력단계로 나누어,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정세 변화, 남·북한의 대응과 미국의 영향 등의 요소를 고려하면서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당면과제인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 구축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학술적 차원에서 라기보다는 정부에서 대북정책 결정과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행위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1. 평화공존의 새로운 남북관계 모색
  
  (1) 새로운 통일정책의 제정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1991년말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정부는 탈냉전의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하고, 6월항쟁 이후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여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는 외교 및 대북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에 관한 대통령 특별선언」(7.7특별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7·7특별선언」과 대북 포용정책
  
  「7·7특별선언」은 남북 상호 인적교류를 위한 문호개방, 남북간 민족내부 거래로서의 교역실시, 북한과 미국·일본 등 우방국가와의 관계개선 협조, 그리고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개선 추구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것이다.
  
  「7.7특별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적대적인 대결과 체제경쟁의 상대였던 북한을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거래로 간주하기 시작하는 등 남북 교류와 왕래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상 미미한 규모이지만 남북교역이 시작되고, 공산권 자료가 개방되기 시작하는 등 대북 인식에 변화를 초래하기 시작한다.
  
  또한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이를 통해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도 모색하는 한편 북한과 미 · 일 등과의 관계 개선을 도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함으로써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실제상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미-북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못함으로써 한반도는 냉전의 외딴 섬으로 남게 된다.
  
  한편 이 선언은 '88서울올림픽에 사회주의국가들의 참가를 유도하여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도 긴요했고, 실제상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남 인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특별선언은 당시 '북방정책'으로 불리어 진 '포용정책'의 기초가 되었으며, 또한 그
  이후 정부들의 포용정책, 이를테면 국민의 정부의 '화해협력정책'('햇볕정책')과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으로 계승 발전하게 된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제정
  
  「7.7특별선언」에 이어 이듬해 9월에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발표된다. 이 통일방안은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의 주장 그리고 국민들의 염원과 의사를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국회 공청회를 거쳐 마련된 것이다.
  
  '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으로 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주를 통일의 3대원칙으로 제시하고, 통일은 갑자기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단계적으로 '先 민족사회 통합, 後 국가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에 '남북연합'을 제도화하여, 남북의 두 정부가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의 남북정상회담과 쌍방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의, 분야별 공동위원회, 그리고 남북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 등 협력기구를 구성 운용하여 남북관계 발전과 통일의 과정을 평화적으로 관리해 나갈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는 분단 - 전쟁 - 휴전을 겪으며, 국제냉전체제 하에서 미-소 양대 진영의 전초기지로서 적대적 대결을 지속해 왔다. 북은 적화통일을 위해 4대 군사노선을 추진해 왔고, 남은 승공통일을 위해 국력 배양을 통한 체제경쟁을 추구해 왔다. 더구나 근 2백만의 군사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채 남북은 치열한 군비경쟁을 전개하여 민족공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다.
  
  '전쟁에 의한 통일'이나 '힘에 의한 흡수통일'을 배격하고,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남북이 힘을 합쳐 함께 관리해 나가자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이 통일방안은 역대 정부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 통일방안은 2000년「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통일방안으로 받아드리게 된다.
  
  (2) 통일방안 논쟁과 「남북기본합의서」
  
  1991년 12월 남과 북은 탈냉전의 새 시대를 맞아 '새로운 남북관계'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한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총리들을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2년간의 협상을 통해 마련한 것이다.
  
  통일방안 논쟁
  
  적대적 대결을 지속해온 남과 북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까지에는 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측 기본입장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통일방안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남측은 회담목표를 '先 민족사회 통합, 後 국가통일'을 특징으로 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구현하기 위하여 교류협력을 통해 상호신뢰를 조성하며, 공존공영의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두었다.
  
  한편 북측은 '先 연방국가 통일, 後 남북 교류 협력'을 특징으로 하는 1국가 2체제 2정부에 의한「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을 구현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다. 북측은 남측의 통일방안이 1체제로 흡수통일하려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통일열기를 조성, "서로 먹거나 먹히지 않고 통일하는 길"이라며 즉각 연방제통일을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포괄적 평화방안」('88.11)과 「조국통일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5가지 과제」('90. 5)에 따라 불가침 등 정치 · 군사문제 해결에 역점을 두었다.
  
  남북한의 통일방안은 유엔 공동가입문제 협상을 통해 격돌하게 된다. 유엔 가입문제는 한반도에 2개 국가의 존재를 서로 인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북측은 "하나의 조선" 논리와 2체제 연방제 통일방안에 기초하여 "나라의 분열이 영구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일된 다음에 하나의 국가로 유엔에 가입해야 하며, 만일 당장 가입하려 한다면 북과 남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의석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남측은 분단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남과 북이 동 · 서독의 경우처럼 일단 2개 국가로 각기 유엔에 가입하여 '통일 지향적 특수관계'를 유지하며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을 통한 합의는 불가능했고, 남북고위급회담은 약 10개월간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략적 정세 변화와 남북 합의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튼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정세의 변화였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하게 되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하고, 중국에서는 개방 개혁이 가속화되는 등 국제정세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이에 북한은 정치·사회·심리적으로 감내하기 버거운 체제위기 의식과 흡수통일 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구상무역을 중단하고 경화결재를 요구하면서 북한은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 등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된다. 더구나 소련과 중국이 한국의 유엔가입에 반대하지 않기로 하자, 북한은 불가피하게 한국과 함께 유엔에 가입(1991.9.)하게 된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그 동안 북한이 주장해 온 즉각적인 "연방제 통일"과 "하나의 조선" 논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대외적으로 한반도에 2개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북측은 평화공존을 통해 점진적 단계적인 통일과정을 관리해 나가자는 남측 통일방안에 접근해 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 걸프전쟁(1991.2.)을 계기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국제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북한은 이미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했으나 남한에서의 미군 핵무기 철수 등을 주장하며 핵사찰을 거부해 왔다.
  
  때마침 미국이 「전 세계 배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폐기선언」(1991.9.)을 발표하고, 남한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도 모두 철수하게 된다. 미 핵무기의 철수로 한반도 비핵화의 길이 열리게 되고,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는 명분이 마련되면서 남북협상도 급진전하게 된다.
  
  우리측은 북핵문제는「남북기본합의서」채택과 연계시키지 않고 병행 해결한다는 '병행전략'을 채택한다. 핵문제 해결에는 장기간이 소요되며, 계속적인 검증과 함께 관계개선을 통한 신뢰조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특성에 주목한 현명한 결정이었다. 또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팀스피리트훈련을 중지하기로 하는 한편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하기로 한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성격과 의의
  
  「남북기본합의서」는 통일은 점진적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데 남과 북이 인식을 같이하고, 우선 불신과 대결의 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시켜 평화공존해 나가자는데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남과 북이 주도하여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 만들기를 시도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통일을 과정으로 인식한 남과 북이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기로 합의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당면한 실천과제로서 ① 상호 체제 인정과 화해, ② 교류·협력, ③ 불가침, ④ 불가침을 담보할 군비통제, ⑤ 정전상태의 남북 간 공고한 평화상태로의 전환 등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아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호기로 포착하여 제3국의 개입 없이 남북 당국이 자주적으로 협의하여 채택·발효시킨 최초의 공식 합의서로서 민족자존을 드높였다는데도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데 이어 이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담은 3개의 분야별 「부속합의서」도 마련했다. 이로써 평화공존에 기초한 새로운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틀이 마련되었고, 구체적 실천대책을 강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합의사항의 실천을 다루게 될 공동위원회의 가동을 앞두고 합의 이행은 중단되고 만다. 「남북기본합의서의」의 이행은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될 때까지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3) 핵 연계전략과 잃어버린 5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즉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국제적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미-북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 핵개발 의혹이 증폭되고, 팀스피리트 한미연합기동훈련을 재개하면서 남북관계는 냉각된다. 국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북한이 대남 적화전략과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남북관계 개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보수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높아가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갈등이 조성되어 갔다. 이러한 주장은 '92 대통력선거전과 맞물려 대규모간첩단사건 발표 등으로 안보위기가 조성되고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주장으로 이어지며 증폭되어 갔다.
  
  1993년 2월에 집권한 문민정부는 남북관계를 핵문제에 종속시킴으로써 실제상 이렇다 할 대북정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북정책 유형을 적대시정책, 포용정책, 방관정책으로 구분한다면, 아마도 실제상 '방관정책'을 취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만일 핵문제 해결을 위한 미-북 협상과 함께 「남북기본합의서」를 실천해 나갔다면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귀중한 시간을 '잃어버린 5년'(1993--1997)이 되고 만다.
  
  북-미 고위급회담 개최 요구에 미국이 불응하자 북한은 핵 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93. 3)이라는 벼랑끝전술로 새로 출범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압박한다. 한편 문민정부는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남북관계 개선이 불가하다는 '핵 연계전략'을 채택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핵 가진 자와는 악수를 할 수 없다"는 강경입장에 맞서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 치중하고 "남북대화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남북관계는 냉각된다.
  마침내 핵문제 협상을 위한 북-미 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일괄타결안'을 수용하여 북핵문제와 미-북관계 정상화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93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며 이를 반대하여 미국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1994년 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이 군사적 조치를 추진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위기에 직면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남북간 대화의 통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이러한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전쟁직전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 돌파구가 마련된다.
  
  결국 미-북 협상 끝에 북핵 폐기와 미-북관계 정상화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로 하는 「미·북 제네바기본합의(1994-10)」가 채택됨으로써 핵문제 해결의 길이 마련된다. 이 합의는 2002년말 부시 행정부가 파기할 때까지 8년간 유지된다. 그러나 6자회담합의(2007.2.13.)로 제네바합의 형식의 포괄적 해결방안이 되살아나게 된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또한 김영삼 대통령도 동의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은 유산된다. 김 주석 사망을 계기로 '북한 붕괴임박론'이 확산되고,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북한에서는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만성적인 식량난이 더욱 악화되고 많은 아사자와 탈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난은 심화되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4-5년간 계속된다. 북한 경제규모는 '90년대 초에 비해 1/2 수준으로 격감한다. 이런 상황은 북한 붕괴임박론을 확산시키게 했고, 문민정부는 대화보다는 북한의 임박한 붕괴를 기다리며 방관을 지속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남북관계를 핵문제에 종속시킴으로써, 북-미관계가 개선되는 상황에서도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남북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첫 번째 시도는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마련한 우리의 대북포용정책과 통일방안 그리고 기념비적인 「남북기본합의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바람직한 남북관계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강령적 지침으로 기여하고 있다.
  
  2. 불신과 대결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1) 점진적 변화론과 화해협력정책

  
  1998년 2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집권하면서 남북관계는 전기를 맞게 된다. 국민의 정부는 지난 10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북한에 대한 시각을 '붕괴임박론'이 아니라, 북한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점진적 변화론'으로 수정한다. 그리고 적대적 대결정책이나 악의적인 방관정책이 아니라,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한다. 북핵문제는 핵 폐기와 미-북관계 정상화를 연계하여 해결하기로 한 「미-북 제네바합의」를 지원하여 한-미 공조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며, '핵연계전략'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과 핵문제 해결을 병행 추진하는 '병행전략'을 추진한다.
  
  국민의 정부는 '화해협력정책'(일명 '햇볕정책')의 목표를 화해 협력을 통해 북한이 스스로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올 수 있는 변화의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평화공존하며, '법적 통일'에 앞서 남과 북이 서로 오가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는데 두었다. 이러한 '화해협력정책'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토대를 두고, 「7·7특별선언」 이래 추진된 '포용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를 발전시킨 것이며,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참여정부에 의해 '평화번영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 지난 10년간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변화의 추동력이 되어 왔다.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한 국민의 정부의 대북 접근방식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경제협력에 중점을 둔 기능주의적 접근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 군사적 문제 해결 이전이라도 '정경분리원칙'을 통해 민간기업의 대북경협을 장려하고, 남북관계에서 민간기업의 역할공간을 넓히려 한 것이다.
  
  또한 보다 많은 접촉과 교류를 추진하는 한편,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여 '아래로 부터의 변화'가 가능해지는 여건을 조성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이산가족의 상봉, 각계각층의 개인과 시민단체의 대북 접촉과 교류 활성화, 민간 및 정부차원의 인도적 지원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 해소에 기여하는 동시에 의식의 변화도 기대한 것이다. 한편 통일문제는 정부의 독점물이 아니며,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와 역할공간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튼튼한 안보태세로 평화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도와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2중적 접근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북한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최고당국자와 그 측근 등을 설득하여 '위로부터의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정상회담과 특사 교환 등을 추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최고지도자들 간에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고 상호신뢰를 조성하며 하향식으로 문제해결을 촉진하려 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국제냉전 종식 후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미-북관계 개선 없이는 한반도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 미국과의 정책 공조를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을 시도한 사실이다. 국민의 정부가 집권한지 반년도 못되어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제기된데 이어 북한이 대포동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한 '이라크식 공중공격'을 주장, 또다시 '안보위기'가 조성되고,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호기로 포착한 국민의 정부는 「포괄적 접근을 통한 대북포용정책」을 미국측에 제시하고 정책 공조를 추진한다. 즉 '대증요법'이 아니라 안보 현안문제 해결노력과 함께 근본적인 문제인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보문제와 함께 정치 · 외교 · 경제 · 통상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접근하여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을 받아야 하며, 미국과 일본의 대북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안보 현안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제의를 토대로 「페리보고서」가 마련되고, 한 · 미· 일 3국 공조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시작하게 된다.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은 현지 방문조사 결과 핵시설이 아님이 판명되고,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는 한편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부분 해제한다. 또한 일본과 북한의 수교협상도 재개된다. 북한의 호응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고, 북미 정상회담도 추진된다. 미 · 일의 대북 관계개선 노력과 남북관계 진전이 선순환적 상호 교호작용을 하면서, 두 번째의 '한반도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된 것이다.
  
  (2)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화해협력의 6.15시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분단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 ·발표했다. 이 남북정상회담은 남북이 화해 협력하기로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시킨 지 8년 만에 성사된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일관성 있는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간 접촉과 교류의 증가는 북한 지도층은 물론 주민들의 대남인식에 서서히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의 경협사업추진과 경제회복을 지원하겠다는 김 대통령의 「베를린선언」(2000.3.)은 북한 지도층에게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다.
  
  반세기 불신과 대결의 남북관계를 화해 협력의 관계로 전환한 남북정상회담과「6.15남북공동선언」의 의의와 성과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안보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두 정상은 전쟁은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뿐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서로 침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평화공존의 기반을 다져 나가기로 했다. 한편 미-북 적대관계 해소가 긴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미-북관계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실제상 6.15 이후 남북간 전쟁의 위험은 감소하고,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의 가능성은 증대된다. 또한 미국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그리고 일본도 국교정상화협상을 추진하게 된다.
  
  둘째, 통일방안에 대한 접점을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서로 적대적인 통일관을 가지고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양측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 내용은 통일을 목표인 동시에 과정으로 인식하고, 평화공존하면서 교류·협력을 통해 점진적·단계적으로 이룩해 나가며,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관리해 나가자는데 합의한 것이다. 6.15 이후 남과 북에서 통일은 더 이상 '논쟁'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추진하게 되었으며, 실제상 온 겨레가 나서서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나가게 된 것이다.
  
  셋째로, 다방면의 교류 협력 실천을 통해 상호신뢰를 다져 나가게 된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지난 반세기동안 지속돼온 상호불신이다. 상호신뢰를 조성해 나가는 것이 평화와 통일을 촉진하는 길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교류 협력의 실천을 통해 다져 나가기로 한 것이다. 우선 실천 가능한 사업으로서 민족의 대동맥인 철도와 도로의 연결, 산업공단 건설, 관광사업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과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 등에 합의한다.
  
  6.15 합의 이후 바다길, 하늘 길에 이어 철도, 육로 등 끊어졌던 남북의 교통망이 연결되고, 사회 문화 경제 등 다방면의 교류로 지난 7년간 35만명이 남북을 왕래했다. 이는 2000년 6.15 이전 시기에 남북을 왕래한 총인원(3천명)에 비해 1백배가 훨씬 넘는다. 이산가족 상봉(1만6천명)과 금강산 방문객(150만명)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왕래와 접촉은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민족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남측의 자본·기술과 北측 노동력이 결합하여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개성공단이 시범 가동되어 25개 기업에서 1만7천명의 북측 노동자들이 남측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남북간의 교역량도 계속 증가하여 남한은 북한의 두 번째 교역 대상국이 되었다. 한편 비무장지대에서 철도·도로 연결공사에 이어 인적·물적 왕래와 교류를 관리하기 위하여 남북의 군대가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도 취해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점진적 개방 확대와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되면 더욱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개선 노력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남과 북의 국내 사정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미국 부시행정부 집권 이후 6년간의 대북 적대시정책과 이에 맞선 북한의 핵도발이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고 남북관계의 파행을 초래했다.
  
  (3) 미-북 적대관계와 남북관계의 파행
  
  미국의 대북정책은 남북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01년초, 북한 정권을 혐오하는 부시 미 대통령이 집권하여 대북적대시정책을 추진하면서 한반도에는 다시 긴장이 조성되고, 남북관계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은 부시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급선회하는 2007년초까지 계속된다. 특히 2003년초 「제네바합의」가 파기된 때로부터 6자회담 2.13합의가 채택된 2007년초까지의 4년은 남북관계에서 큰 시련기로 기억될 것이다.
  
  1990년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북한은 생존을 위하여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지상과제로 삼아 왔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직후인 1992년초 북한은 고위급 인사를 미국에 보내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고위급회담을 제의하며,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의 남한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도 통보한다. 그러나 미국의 긍정적 호응을 얻지 못한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전쟁억제력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핵 개발'을 협상카드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클린턴의 포용정책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클린턴 행정부는 쌍무협상을 통해 「미-북 제네바합의(1994.10.)」를 채택했다. 북한은 핵개발계획을 폐기하기로 하고, 미국은 경제제재를 해제하며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가기로 한다. 또한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으로 인한 전력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경수로'를 제공하며 중유도 공급하기로 합의한다. 협상을 통해 미사일 개발 및 발사 유예에도 합의한다.
  
  '포용정책'과「제네바합의」이행으로 미-북관계는 개선되어 갔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척되면서 남북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한다. 관계정상화 추진에 합의하는 「미-북공동성명(2000.10)」도 채택되었다. 북한의 조명록 특사와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교환방문이 이루어지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미-북정상회담이 추진된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되었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나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 방북을 포기하게 된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시의 적대시정책과 북한의 핵 도발
  
  새로 집권한 부시 대통령은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정책'을 전면 부정하고. 북한정권은 믿을 수 없는 '사악한 정권'이라며, 압박과 굴복을 강요하는 '적대시정책'을 추진한다. 또한 미국은 9.11.사태를 계기로 이른바 '부시 독트린'(2002.1.)을 발표하여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고, '군사적 선제공격'을 통해 제거해야 할 '정권교체'의 대상으로 선언한다.
  
  2002년 2월 서울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으로 부시 대통령은 한 달 전의 선언을 뒤집고,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게 된다. 이에 김 대통령은 특사를 평양에 보내 김정일 위원장과의 협의를 통해 지난 1년간 동결되었던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하기로 하고「6.15남북공동선언」에 따라 합의된 '5대중점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강경파들은 남북관계 진전에 제동을 거는 한편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계획 의혹을 제기하고 원유 공급 중단으로 「제네바합의」를 파기한다. 이에 반발하여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로 맞선다. 핵 보유를 선언(2005.2)한데 이어 도발적인 핵실험(2006.10.9.)으로 미국을 압박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적대시정책과 이에 맞서 벼량끝 전술을 행사하는 북한의 핵 도발 사이에서 남북관계를 파탄시키지 않고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핵확산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역행하는 것으로 반드시 이를 저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로서 미-북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핵문제 해결과 미-북관계 정상화에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것인데도 국내 여론은 1993년 때처럼 '선 핵문제 해결, 후 남북관계 개선'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북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남과 북이 「6.15남북공동선언」을 바탕으로 5대 중점사업을 계속 추진한 것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정책 6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핵 개발을 저지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정권을 교체시키거나 굴복시키지도 못한채 사태를 악화시키고, 남북관계 진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던 두 번째의 시도도 좌절되고 한반도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 기간을 통해 유일초대강국 미국이 힘에 의한 일방주의외교로 대북적대시정책을 추진할 때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미-북 적대관계가 계속되는 한 남북관계의 파행을 피하기 어렵다는 뼈저린 경험을 하게 된다.
  
  미국은 이라크사태 악화와 이란의 핵개발이라는 도전에 직면하는 등 중동사태를 강경책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과 대외정책 실패에 대한 미국민들의 심판은 2006년 11월 중간선거를 통해 나타난다. 여소야대 의회의 출현으로 부시는 '힘에 의한 일방주의외교'에서 '전통적 실용주의 외교'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2007년초부터 대북 적대시정책을 접고 포용정책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한다. 6자회담 2.13합의를 통해 핵폐기와 관계정상화를 동시 병행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되고 남북관계는 다시 활성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3. 앞으로의 과제 ;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의 구축
  
  민주화 이후 20년의 남북관계는 '불신과 대결의 적대관계'를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동안 우리는 두 번에 거쳐 한반도 평화 만들기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러나 미-북 적대관계와 북한 핵개발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걸림돌로 작용했고, 두 번의 시도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지만 좌절을 거듭했다.
  
  최근에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과 미-북관계 정상화를 병행 추진하기로 함으로써 동북아의 냉전구조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북핵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6자회담을 통해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 협력'문제를 협의하기로 하는 한편 '한반도 평화체제'문제도 협상해 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드디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시 진척시킬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절호의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통일방안에 의하면 통일의 과정을 교류협력단계, 남북연합단계, 완전통일단계 등 3단계로 상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교류협력단계에서 남북연합단계로 진입하여 남북이 합력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해 나가야 할 때이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군사정전상태를 끝내고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난 두 번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국제공조를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면서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경제공동체 건설과 군비통제 실현을 통한 남북관계의 확대발전, 미-북 적대관계 해소와 관계정상화, 북핵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더 나가서는 동북아 안보 협력 증진 등을 병행 추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상호의존적 상관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해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평화체제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소극적 평화체제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적극적 평화체제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의 당사자인 남과 북이 주도하고, 관련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구축해 나가야 한다.
  '통일 지향적 평화체제' 확립을 위해 남과 북이 당면한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경제협력을 활성화하여 '경제공동체'를 형성·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군비통제'를 추진해 나가는 것이다. 군사문제 해결 없이 경제협력의 확대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군비통제의 실현은 남북경제공동체 형성·발전과 서로 교호작용을 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북-미관계 정상화로 안전을 보장받고,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개혁을 적극 추진하려는 북한은 남북경제공동체 건설과 군비통제 과정을 통해 시장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변화를 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경제공동체(EEC)를 형성하여 국가연합(EU)을 이룩하고 유럽통일을 지향하듯이, 남과 북이 경제공동체를 형성하여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는 것'이 곧 '통일 지향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바른 길이 될 것이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경협사업들을 더욱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자원의 공동개발, 농업, 전력, 교통, 통신 등 열악한 북한의 사회기반시설 현대화를 위해 협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미국의 경제제재가 해제되면 국제금융지원이 가능해지고 대북 투자가 용이해 지게 될 것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대동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것이 남북의 공동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확립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군사정전 상태에서 군비를 확충하고 안보역량을 강화하면서 '소극적 평화'를 지키는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안보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군비통제를 실현해야 한다. 예측 가능성을 증대하기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실행하는 한편 '축소 지향적인 군사력 균형'을 실현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군사적 불신과 대치, 군비경쟁과 군사력의 과다보유를 종식시켜야 한다.
  
  미국이 새로운 세계군사전략에 따라, 이미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하여 주한미군의 역할을 조정하고 있는 이 기회를 포착 활용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전방 미군부대의 감축 및 후방기지로의 이동 배치, 전시 작전통제권의 반환, 한미 군사지휘체제 조정 등의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한편 이러한 미국의 군사개혁조치를 군비통제와 연계시켜 평화체제 구축에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평화체제는 군비통제를 통해서 구축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핵 폐기와 미-북관계 정상화
  
  한편 한반도평화체제 확립을 위해서는 미-북 적대관계가 해소되어야 한다. 북핵문제 해결과 함께 미·북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다.「미-북제네바합의」와 6자회담 합의(2006.9./2007.2.)는 모두 북핵문제 해결 과정과 미-북 관계 정상화 과정이 긴밀히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마침내 부시 행정부는 '사악한 정권과는 대화할 수 없다'던 지난 6년간의 잘못된 주장을 접고,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단계적으로 핵문제 해결과 함께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우선 핵 시설을 폐쇄하고, 이어서 불능화 조치를 취하며 완전 해체하는 수순을 밟는 한편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기로 했다. 핵시설 해체에 이어 핵 물질을 완전 폐기하고 검증을 받는 조치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편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명단에서 삭제하여 국제 금융기구 접근의 길을 열어주는 한편 에너지와 경제지원을 제공하기로 하고, 경수로 제공문제도 협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외교관계도 정상화해 나가기로 했다.
  
  6자회담 합의는 철저한 주고받기 식 접근과 '행동 대 행동원칙'에 따라 이행하면서, 검증을 통해 상호신뢰를 조성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고, 완전해결에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과정이라 해도 최고 지도자들의 정치적 의지와 결단으로 난관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대외정책 실패를 거듭한 부시 대통령은 잔여임기 중 해결책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북해문제 해결의 분수령을 넘음으로써 외교적 성공의 업적을 남기고자하는 욕망과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조속히 적대관계를 해소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추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외교력을 발휘하며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미-북 적대관계와 북핵문제가 남북관계의 큰 틀을 규제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2000년의 경험은 남북관계 또한 미-북관계 개선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 안보 협력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다. 동북아의 평화 없이 한반도의 평화는 보장될 수 없다.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서는 긍정적인 안보환경의 조성이 필수적이다. 위협이 되고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과장하고, 왜곡된 판단을 통해 이를 부추길 때 그것이 분쟁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불신하며 군사력을 증강하게 되고, 불행한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로의 진전은 방지되어야 한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경험을 본받아, 북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을 모체로 동북아 안보 협력기구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기구를 통해 정치·군사적 신뢰를 구축하며, 잠재적 갈등 요인과 군사적 긴장요인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안보만이 아니라 경제·통상·환경·테러·국제범죄 등을 망라하는 포괄적 안보체제로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구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는 포괄적 지역협럭 공동체로 구현해 나가는 것이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될 것이다. 1970년대초 서독이 소련과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유럽안보협력기구 발족을 촉발했듯이, 우리도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동북아 안보 협력기구 발족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인 조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평화에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의지만으로는 평화를 보장할 수 없으며,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 조치'들이 필수적인 것이다. 베트남의 예에서 보듯이,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유럽 국가들이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적인 포괄적 신뢰구축조치와 군비감축을 통해 냉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룩한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만간 한반도평화체제를 협상하기 위해 미국, 중국과 남과 북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는 반세기나 지속된「군사정전협정」을 '적절한 협정'(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협의하게 될 것이다. 4자회담에서는 먼저 '전쟁 종식'에 합의하고, 평화체제 구축방안을 제시하는 '선언적 조치'부터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에 따라 관련 당사국들이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인 조치들', 이를테면 적대관계 해소, 비핵화, 군비통제 등을 어느 정도 진척시키면, 「군사정전협정」을 대체할 '법적 조치'인 '평화협정' 체결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강대국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한반도분단을 고착시키고 군비경쟁을 지속하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안보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적극적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통일과정에서 먼저 동·서독이 협력하여 2+4형식으로 통일을 달성했듯이, 남과 북이 합력하여 민족의 이익을 보장하도록 4자회담을 주도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은 남과 북이 주체가 되고,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이 보증하고, 유엔안보이사회가 추인하는 2+2+UN방식으로 추진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남과 북은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앞으로 약 10년은 화해 협력단계를 넘어 평화와 번영을 위한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구축, 발전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가 될 것이다. 확실한 철학과 비전을 가진 지도력과 초당적 노력, 그리고 국민들의 이해와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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