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웅 전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30년 남북대화의 산 증인. 1971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과 평양, 때로는 베이징, 금강산 등에서 열린 각종 남북 적십자회담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이 전 사무총장이 현재 몸담고 있는 한서대 국제인도주의연구소에서 16일 오후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놨다. 적십자회담의 경험, 이산가족 문제, 북한 사람들의 속성, 적십자 정신….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북한과 상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녹아 있었지만, 최근 북한을 강타한 수해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전문가적인 식견이 도드라졌다. 북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통계 수치를 줄줄 읊었다. 설명은 구체적이었지만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1996년의 수해에 버금간다고 하니 최소 30만 톤이 덜 생산될 것이다. 산을 밀어 논밭을 만들다 보니 산에 나무가 없어 큰비가 오면 산사태가 난다. 아직도 나무 땔감을 쓰는 것도 산사태의 다른 원인이다. 산림녹화도 필요하지만 연료체제를 바꾸게 해야 한다."
"어려운 회담"
2004년 7월 적십자사 퇴직 후 한서대 청소년복지학과 교수가 된 그에게는 다른 직책이 많다. 국제인도주의연구소장, 남북이산가족교류협의회 상임대표,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역시 모두 북한과 관련된 것들이다.
30년의 경험을 묻어둬선 안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청이 있었을 것이고, 스스로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할 인물로 많은 이들이 이 전 총장을 꼽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그 역시도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굉장히 어려운 회담이 될 것이다." 정상회담을 전망해 달라는 말에 이 전 총장은 이 말을 수차례 되뇌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북에서는 핵 문제는 남쪽하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그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그게 안 풀리면 다른 것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이라며 "북측과 합의한 의제를 보면 핵 문제도 얘기할 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막상 그 문제는 남쪽과 얘기할 게 아니라고 나오면 굉장히 어려워 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북 정상이 반드시 논의해야 할 두 번째 문제로 꼽은 평화체제도 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 역시 북한이 '미국이 보장해야 한다'고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전 총장은 "전쟁이 나면 북한의 장사정포만 한 시간에 1만 발 이상 서울에 떨어지고 우리 쪽에서 이북에 공격을 해도 한 순간에 목표물 몇 천 개를 처리할 수 있다"라며 "이건 어느 쪽이 밀고 밀리고를 2차적인 문제로 만드는 것으로 민족의 공멸을 뜻한다. 따라서 북측도 우리를 믿고 평화 공존의 틀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에 보낸 건의서
이런 얘기들을 했지만, 이 전 총장의 관심은 역시 평생 동안의 숙제였던 이산가족 문제에 가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이산가족'으로 시작했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정상회담 발표 후에 이산가족교류협의회 명의로 대통령 비서실과 통일부에 건의서를 냈다. 현재 신청된 이산가족들의 생사확인, 서신교환, 소규모 소포 교환,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을 정상회담에서 합의해 달라고 했다. 실무적인 것 같지만 정상간에 얘기가 돼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 1차 정상회담 이후 이어졌던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여전히 '시범사업'에 머물고 있어 정치상황에 따라 언제든 지연되고 연기되는 상태를 이제는 극복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도 인도주의 사안 아닌가'라는 질문에 이 전 총장은 "납북자 단체에서는 그 문제를 별도로 제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는 어차피 집 떠나 헤어진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산가족만 얘기했다"며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전향한 장기수 중 북송 희망자에 대한 문제도 인도주의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 전 총장은 지난해 7월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쌀 차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한 현 정부의 결정을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쌀·비료 제공이 중단되자 북한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거부해 1년 가까이 상봉이 이뤄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인도주의적 사업이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게 했다는 것이다.
"쌀은 차관으로 가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이라기보다는 경제(협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차관 못 주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료는 처음부터 인도주의 사안이었다. 수해가 나서 별도로 주는 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수해 지원과 비료는 거론하지 말고 쌀 차관만 보낼 수 없다고 했어야 하는데 그걸 싸잡아서 하니까 인도주의 문제와 정치 문제가 엉켜버렸다."
'역사를 산다는 것'이란
회담에서 만나본 북한 사람들은 어땠냐고 물었더니 "거기도 사람 사는 사회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회담을 하다 보면 고성이 오갈 때도 있지만 공적인 자리가 아닌 데에서는 가족 얘기, 애들 얘기 다 한다. 그런 차원에서 지내면 인간적이다. 친구 처럼 얘기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존심만 세고, 그러면서도 자꾸 뭔가 대가를 바라는 것 같아 심지어 남북 교류사업을 하는 단체의 사람들도 어려워 하더라'라고 했더니 조금 긴 설명이 이어졌다.
"1950~60년대에 우리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일본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북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기준으로 봐서 그런 거지 그 나름대로의 계획과 생활방식, 그리고 자존심이 있다. 그런데도 '잘 살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라오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매도하는 것은 심각한 편견이다. 가난할수록 더 자존심이 강하고 특히 우리 민족에 그런 기질이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북한을 이해하자는 쪽으로만 얘기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해하지 말자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남과 북의 모든 측면을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게 이 전 총장의 태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쪽 측면을 말한 뒤에는 반드시 반대쪽 측면에도 일리가 있다고 했다. 적극적인 대북 지원을 말하다가도, 북한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짚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남북대화나 한미FTA 협상 같은 게 벌어지면 반대 여론이 오히려 협상단에 도움을 줄 때가 있다고도 말했다.
북한이라는 힘든 상대와 협상하는 동시에 남쪽의 다양한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수십년간의 경험이 몸에 밴 듯한 태도였다. 너무 균형을 맞추다 보니 심지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호할 때도 있었다.
짧은 만남으로 누군가를 진보나 보수로, 좌나 우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전 총장에게 있어서는 그런 규정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에 대한 얘기를 다룬 과거의 여러 기사를 찾아봐도 그랬다. 언론사의 논조와 상관없이 이 전 총장에게는 '남북대화의 산 증인'이라는 말 외에 별다른 평가가 없었다.
그는 북한의 실상을 살피고 무엇이 필요하고 얼마를 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협상하면서도 남측 정부의 이익을 재면서 30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말한 "역사를 산다는 것"은 저런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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