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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문제? 반기문 총장한테 물어봐!'

부시, 대선 앞두고 이라크 문제의 '국제화' 시도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유엔의 역할을 확대하는 등 이라크 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영국의 <가디언>이 23일 보도했다.

이는 이라크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 대한 미국의 책임을 국제사회에 떠넘기는 한편, 2008년 미국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될 이라크 문제가 공화당의 재집권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한 시도다.

미군 철수를 '영광스러운 퇴각(glorious retreat)'이라고 미화했던 베트남전을 연상케 하는 이 계획은 지난 2월부터 바그다드에 미군 병력을 증강시킨 것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라크 장악을 위한 이란과의 각축전에서 미국이 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2003년 유엔을 무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던 부시 행정부가 이제 와서는 유엔의 힘을 빌려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또한 유엔의 도움으로 이라크를 관리하게 되더라도 중동패권과 석유라는 핵심 이익까지 넘겨줄 리는 없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라크판 '영광스러운 퇴각'의 내용은?

<가디언>은 부시 행정부가 세우고 있는 '국제화' 계획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인도주의와 관련된 유엔 기구들의 이라크 내 역할을 강화하고, 유엔 이라크 사령부를 창설하며, 가능하다면 무슬림이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을 만드는 등의 조치를 통해 유엔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

둘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일본, 유럽연합(EU), 그 중에서 특히 새로 선출된 프랑스의 보수정부가 이라크 정책 결정 과정에 더 많이 참여토록 하는 것.

셋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인근 수니파 국가들,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의 이라크 지원 확대.

넷째, 수니파-시아파-쿠르드의 화해를 유도해 이라크 정부의 독자적인 생존력을 향상시키는 시도를 재개하는 것.

다섯째, 최전선의 전투 임무를 미군에서 이라크군으로 이양하는 대신 미군은 지도적인 역할만 하도록 하는 것.


부시 행정부의 속사정에 정통한 한 전직 고위 관리는 이에 대해 "이라크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 유엔군이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대체함으로써 이라크 정부에 대한 정치·경제·군사적 지지를 확보하겠다는 국제적 차원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민 부시 대통령. ⓒ백악관 홈페이지

"부시 행정부에 '빚'이 있는 반기문 총장"

이라크 문제를 유엔과 국제사회에 떠넘기기 위한 미국의 작전은 사실상 시작됐다.

미국의 한 고위급 외교관은 지난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유엔이 갖고 있는 엄청난 전문성이 이라크에서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유엔과 그 산하기구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이라며 세계은행과 IMF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교관은 특히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던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대신 미국의 정책에 호의적인 반기문 총장이 새로 취임한 것은 이라크 문제에 유엔을 활용하겠다는 미국의 계획을 더 쉽게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가디언>은 미국의 지지에 힘입어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현 총장은 미국의 요구에 수용적인 자세를 보일 것이며,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였다가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긴 잘마이 칼릴자드도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엔에 대한 설득 노력과 동시에 부시 행정부는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행보도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 부시 행정부가 주목한 나라는 프랑스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퇴임하고 신임 고든 브라운 총리의 태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파 정권이 집권한 프랑스가 영국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미국의 최대 동맹국인 일본과 파키스탄은 이미 미국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듯하다. 일본은 최근 걸프 지역의 석유 수출국 가운데 중도적인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미국을 돕고 있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도 지난주 이라크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은 중동 국가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전직 고위 관리는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는 수니파 정부가 다시 들어서지 않을 것이며, 누리 알 말리키 총리가 이란과 손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 전에 그를 지원해야 한다'면서 사우디 등 주변 아랍국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전했다.

'철군 시한 없는 전비법'에 합의한 민주당의 계산속

이라크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는 미국 내 정치무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08년 대선과 의회 선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의 전직 고위 관리는 이라크 사태가 악화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책임지겠다'며 정치적 도박을 거는 현상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책임 떠넘기기 경쟁(blame game)은 이미 시작됐다"며 민주당은 이라크 문제를 쟁점화해 표를 얻으려고 하고, 공화당은 이라크에서 패배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미군을 철군하는 상황을 최대한 미뤄보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이 미군 철수 시한을 명기한 이라크 전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강력히 저항하자 민주당이 끝내는 철군 조건이 없는 전비법에 동의하려 한다는 보도는 그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라크의 혼란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놔두고 그 책임을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에 떠넘겨 표를 모으겠다는 게 민주당의 속셈인 것이다. 여기에는 철수 시한을 적시한 전비법을 한 번 통과시킨 것으로 '민주당은 할 만큼 했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책임 회피 현상은 개인 수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들은 현재 이라크 정책에서 거리를 두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라크 관련 업무를 백악관 전쟁보좌관인 더글러스 루트 중장에게 넘기려고 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루트 중장을 '봉(fall guy)'이라고 부른다.

국무부와 국방위 고위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라크 업무 이관 현상도 마찬가지다. <가디언>은 이라크 주둔 미군 최고사령관 데이비드 페트래우스 대장에게 이라크라는 '침몰하는 배'를 타도록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배를 버리고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지적했다.

미군 증강 계획은 '이라크 폭탄 돌리기'

미군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파하는 것도 '이라크 폭탄 돌리기'의 일환이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임기 내에, 공화당 입장에서는 내년 선거 전까지, 미군을 '영광스럽게' 철수시키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보낼 수 있는 데까지 보내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부시 행정부는 증파를 완료하고 이라크 상황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9월 이후에도 미군 증파 계획을 6개월 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는 게 전직 고위 관리의 전망이다.

리언 크로커 미국 대사가 최근 바그다드에서 이라크의 상황이 안정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9월이 되도 '고지'를 달성했다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크로커 대사 말고도 미군 철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동시에 증파 계획이 완료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고위 관리들이 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디언>은 미 국방부가 지난 주 3만5000명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올해 안에 이라크에 배치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며 그렇게 되면 내년 봄에는 이라크 주둔 미군이 약 16만 명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22일 이라크로 떠나고 있는 미군의 추세로 볼 때 연말이 되면 미군 전투병의 수가 현재 9만8000명의 거의 두 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 계산법으로 한다면 미군의 총수는 지원군까지 포함해 총 20만 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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