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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국정의 모든 것은 나를 통해 이뤄진다"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50> 카스트로의 방미와 대립의 시작

지난해 7월 장출혈로 대수술을 받고 권좌에서 물러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최근 체중이 불고 체력단련운동을 재개할 만큼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의 주요사안을 보고받고 최종결정권을 행사하는 횟수도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카스트로의 복귀설이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그가 지난 1959년 4월 15일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 및 미국 언론인들과 나눈 대화내용이 뒤늦게 공개됐다.

지난 1959년 1월 8일 독재자 풀헨시오 바띠스타를 몰아내고 아바나에 입성한 카스트로는 쿠바혁명군 원수 겸 국무총리에 취임해 소수의 엘리트층이 독점하고 있던 국가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강력한 재산분배정책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강력한 경제재제 조치와 석유판매금지 등 외교단절을 선언하고 카스트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미국과의 경제협력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그의 워싱턴행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카스트로는 개인 자격으로 방문을 강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워싱턴 방문에서 양국이 상호 대립각을 세우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쿠바일간 <그란마>는 지난 13일 카스트로의 미국 방문 48주년을 맞아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 속에는 왜 카스트로가 반세기 동안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됐는지 간접적으로 설명돼 있다.

일간 <그란마>가 13일(현지시간) 보도한 특집기사의 내용을 간추린다.

"친미정권인 바띠스타를 축출하고 공산혁명을 완수한 카스트로의 미국 방문은 공식적인 국빈 신분이 아니었다. 그의 방문은 철저히 개인 자격이었으며 카스트로를 초청한 기관도 민간언론단체인 미국 일간지의 편집인들이었다.

그의 미국 방문은 비록 비공식적인 것이었지만 미국인들은 혁명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직접들을 수 있는 황금의 기회였다.

당시 중남미 국가들은 모든 집권자들이 예외 없이 집권을 하자마자 워싱턴을 방문해 정치적인 보호를 요구하고 경제적인 원조를 구걸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피델은 달랐다. 그는 돈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게 아니며 정치적인 지지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미국으로 망명한 독재자 바띠스따 추종세력들의 비난으로부터 쿠바를 보호하고 혁명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한 방문임을 강조했다. 그는 동행한 측근들에게도 쿠바에 대한 경제원조 문제에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미국과 외교적인 관계정상화를 위한 노력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 워싱턴 방문 중 중남미 이민자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카스트로 ⓒ쿠바 일간 <그란마>

구렛나루 수염에 군복을 입은 카스트로는 워싱턴과 뉴욕에 거주하는 쿠바 출신 시민들과 중남미 이민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피델은 경호 관례를 무시하고 연도의 환영인파 속으로 들어가 악수를 나누고 등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물론 이들 환영군중 속에는 축출된 바띠스따 세력들이 시간당 17달러를 주고 동원한 카스트로 미국 방문 반대시위대도 상당수 있었다.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갈망하던 카스트로는 뜻하지 않게 미 국무부의 카리브지역 국가 담당 윌리암 웰랜드 국장의 방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를 통해 카스트로는 미국 정부의 쿠바에 대한 깊은 속내를 파악하게 된다.

웰랜드 국장은 카스트로와의 대면에서 대뜸 "피델 카스트로 박사님, 쿠바에 관한 모든 사항은 내 손을 거쳐 이뤄집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국장님, 미안하지만 쿠바 국정의 모든 것은 (국장님이 아닌) 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미소로 응답했다.

웰랜드 국장의 이 말은 '쿠바에 관한 모든 문제는 모두 내 손 안에 있다'는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어 카스트로는 이때 심한 굴욕감을 느낀 것이다.

'닉슨의 경고 무시하고 쿠바에서 참패당한 케네디'

미국 정부 관리들과는 달리 카스트로를 초청한 미국 언론들은 그의 방문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대다수의 미국 언론들은 '카스트로의 미국 방문을 환영한다'는 타이틀로 쿠바가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원조보다는 이웃의 주권 국가로서 대우받기를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카스트로는 이들 언론들을 향해 독재자 바띠스따의 폭정 속에서 2만 명 이상의 무고한 쿠바인들이 마치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 안의 기독교도들처럼 무참하게 살해됐던 것을 상기시키고 공권력을 동원한 범죄로부터 쿠바를 구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카스트로는 이어 "우리는 배고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과, 잘 훈련된 정규군을 상대로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혁명의 구호에 따라 부패하지 않고 국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투명하고 열린 정부를 만들어 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부통령과 카스트로 ⓒ쿠바 일간 <그란마>

미국 방문 5일째 카스트로는 당시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을 만났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카스트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카스트로는 솔직 담백한 공산주의자이지만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장군을 연상케 하는 격렬한 혁명가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닉슨의 이런 경고는 그 다음해에 치러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무시된다. 하지만 닉슨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로부터 정확하게 2년 후, 그러니까 1961년 4월 19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반군들이 쿠바를 무력으로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일부 서방 정치평론가들은 카스트로가 독재체제를 확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반미 구호를 적절히 활용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보도에 따르면, 이웃의 주권국가로서 친선과 외교관계 증진을 희망했던 카스트로를 무시하고 그를 우습게 본 건 미국 정부의 관료들이었다.

결국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양국의 대결구도는 쿠바 혁명정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기싸움의 측면도 안고 있었던 셈이다.

만일 지난 1960년 미국 대선에서 케네디가 아니라 닉슨이 승리했더라면 쿠바는 물론 중남미 전체 정치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증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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