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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부적응자' 아닌 '현실 불복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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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부적응자' 아닌 '현실 불복종자'

[전태일통신 62] 내가 대학진학을 거부한 이유

나 역시 친구들과 같이 성적이 좋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을 가야겠다는 부푼 마음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는 첫 등교부터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해 왔다. 새벽 3시부터 일을 시작해 마치는 시각이 아침 8시. 며칠 동안 남들보다 늦게 등교하자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너는 왜 항상 지각을 하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신문배달을 해요."
"그래.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왔으니 다른 친구들과 같이 대학을 가야지. 그만둬라."

계속된 강요와 체벌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연이어 긴 머리를 자르고, 강제적으로 문제집을 사고 야간 타율학습, 체벌 등등…. 처음부터 이런 학교와의 마찰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누구 한 명 '아니다', '싫다'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같은 의식에 파묻혀 잠재적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더 이상 학교 그늘에 가려 규제와 타협을 강요받을 수는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반강제적으로 실시한 보충수업을 반에서 홀로 거부했다. 보충수업을 안 하는 대신 전교생 성적등수대로 체벌을 받겠다는 교사의 일방적인 조건부 선택을 택했다. 그 때 가한 체벌은 온몸에 멍이 든 신체적 아픔을 주었지만, 나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프레시안

학교와의 치열했던 싸움, 씻을 수 없는 아픔

2000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줄임 학연)'이라는, 교육을 고민하는 청소년 인권 모임을 인터넷상에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가 싫어서, 선생이 싫어서, 공부가 싫어서 반항심에 모임에 나갔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문제의식은 일상생활의 어이없는 강압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당연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두발자유화 운동은 곧바로 대전, 광주, 부산 등 광역시로 확대되었다. 이때 교육당국의 탄압으로 친구, 선배, 동생들이 징계를 받고 심지어는 퇴학까지 당했다. 학연의 활동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다.

초창기 나는 익명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몸받이에 의해 제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학년 당시 집회(캠페인)신고 주체로 내 이름을 올리면서, 나도 그 탄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집회마다 얼굴 가리며 참석하는 학생들보다 이를 지켜보는 교사, 장학사들이 많아 모두가 긴장에 떨어야 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아 탄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아주 좋은, 그러나 끔찍하기만 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회원 명단을 공개하고 탈퇴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2~3개월 동안이나 수업도 못 받고 경찰서 뺨치는 조서를 쓰는 일이 힘겨워, 2주일 가량 집과 학교와 아예 연락을 끊은 적도 있었다. 그 2주 동안 많은 일이 생겼다. 장학사란 사람은 동생 학교 다니기 힘들 거라고 협박을 일삼지 않나, 학교에서는 학생연합의 뒤에 전교조가 있다고, 있지도 않는 배후관계를 내세우며 불법단체 활동이란 명목으로 나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이 억울함을 풀고자 다시 학교를 나갔다. 그러나 학교는 막무가내로 징계를 하루라도 빨리 내리려 했다. 그러나 전교조에서 '배후관계' 운운하는 말에 대한 해명과 탄압중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우여곡절 끝에 3자(교장, 전교조 교사, 본인)의 눈물 섞인 논의 끝에 합의롤 보게 되었다. 일은 원만히 종결되었지만, 당시 나의 마음에 긁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현실 불복종은 결국 대학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 ⓒ프레시안

다른 학생들이 '고3, 대학입학 예정자, 수험생'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 난 입시공부가 아닌 직업학교로 등교, 컴퓨터시스템 공부를 하였다. 물론 대학을 거부하는 대신, 학교 분위기를 흐리지 말라는 차원에서 쉽게 직업학교를 보낸 것이었다. 1년을 하고 싶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를 조금씩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연은 활동탄압과 각종 규제들로 인해 와해의 길을 걷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매년 수학능력시험의 때는 돌아온다. 10대라면 한 번쯤은 거쳐 갈 국가고시 '수능'. 확실한 진로를 결론짓지 못한, 결정된 것이 없는 나로서 수능은 마지막 현실 타협의 수단이 될 뻔했다.

친구들과 같이 수능을 접수하고, 학연 선배들이 많이 간 진보적으로 불리는 ㅅ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입학할 생각에 원서구입에 또한 적지 않은 돈을 들이면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에 대한 계획이 막연하다고 해서 대학을 간다고 하는 타협적인생각은 마음에 걸렸다. 3년의 학연 활동이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의 일부였을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의 양심적 검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기대 또한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굴레였다. 밤새워 고민해도 해답은 오리무중이었다.

수능 시험 날, 나는 어머님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수능고사장으로 가서 후배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곧 나는 한 손엔 도시락을, 한 손에는 피켓을 들고 광주광역시 교육청으로 걸어가고 말았다.

그 당시 '학벌없는 사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대학평준화와 수능 자격고시화를 요구하며 각 지역 교육청 앞에서 동시다발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행동이 없었더라도 이미 난 시험을 거부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의 당당함은 어디로인지 사라지고 집에 가는 발걸음을 무겁기만 했다. 고등학교 3년간 부모님 속을 무던히도 썩히더니 그도 모자라, 수능 시험도 거부하고 대학을 안가겠다고 하니…. 그저 내 신념과 고집이지만 부모님께는 매일같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광주 흥사단에서 반년동안 근무하면서 이라크전쟁 관련 반전평화운동 등 NGO운동을 깊게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현실도피의 부적응자가 아니다. 나는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바꾸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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