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황으로 볼 때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가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주둔 연장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는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왜 더 주둔해야 하는지 국민에게 설득하는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이라크 상황에 대해 국민에게 알리거나 이에 따른 합리적 대응방향을 공유하려는 노력도 일체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군대는 2600여 명이나 이라크에 파견되어 있건만 정부의 대(對)이라크 정책은 실종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언급하는 것도 식상해진 '철군 릴레이'
지금 이라크는 어떤 상황인가? 2006년 5월 우여곡절 끝에 내각구성을 완료한 이라크 정부의 총리 알-말리키는 이라크 18개 주 중 상당수의 주에서 언제라도 이라크가 치안유지권한을 넘겨받을 수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영국, 호주, 일본 등은 이미 이라크 남부 사마와주 등의 치안유지권한을 이라크 정부에 이양한 상태다.
한국군이 주둔하는 북부 쿠르드 지역의 아르빌은 애초 이라크 전쟁 자체가 비껴간 쿠르드 자치지역이며, 잘랄 탈라바니 현 이라크 대통령이 이미 2005년 이후 북부의 지역에서는 언제라도 이라크군 스스로 치안을 유지할 수 있고 공언해 온 지역이다.
그렇다고 이라크가 평온해진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이라크 북서부 4개 주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서 무장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이 무장 저항의 대상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는 미·영 중심의 다국적군이다. 팔루자, 하디타 학살 등이 일어난 곳도 이 지역이다.
한국의 자이툰 부대가 비교적 안전한 지역인 아르빌에서조차 영외 출입을 극도로 제한하고 사실상 숨죽여 지내고 있는 이유도 이라크 전역에 존재하는 반점령군 정서와 저항세력의 공격 가능성 때문이다. 영국과 호주, 그리고 일본의 파견부대가 이라크 남부의 치안권을 이라크 정부에 넘긴 실제 이유도 이 지역에서 주둔하는 데 따른 자국의 피해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당성을 결여한 점령군의 존재는 이라크에 저항과 더불어 극단주의가 발흥할 토양을 제공했다. 미군에 지휘되는 이라크 경찰·군인들이 점령군의 대리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이라크 내 종파와 종족간 갈등은 심화되고 이라크인들은 분열됐다. 이라크 점령세력들이 약속한 재건지원은 공염불에 불과했고 이라크의 민생치안은 극적으로 후퇴했다. 이라크 점령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안정화시키기 보다는 이라크를 점점 더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분석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시인한 정부
이같은 정황으로 인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 5월 말 이라크에서 '실패와 실수'(setbacks and missteps)가 있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블레어 총리는 지난 8월 1일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비영리단체 국제문제회의(World Affairs Council) 연설에서 "중동정책과 환경·빈곤·무역 등의 분야에서 기존 전략을 재창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추진해 온 외교정책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이 전쟁은 결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면서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에 의문을 표시하고 공평과 정의에 바탕을 둔 '가치전쟁'만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해법이라고 주장해 자신의 파트너였던 미 부시 행정부에 공개적인 반론을 펼쳤다.
이라크 주둔 동맹국들이 하나둘 이라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많이 인용되었기 때문에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마디로 대폭 감군을 실시하고 있는 미군과 영국군을 제외하고, 1000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미국과 영국조차 의회와 정부에서 철군 일정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그 계획이 세세하게 국민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철군논의의 무풍지대는 한국이 유일하다.
참여연대는 이같은 이라크 상황과 관련해 지난 2006년 5월 초 국방부와 외교통상부가 적절한 정세분석을 하고 있는지, 그 정세분석을 국무회의나 청와대에 보고하여 검토한 바 있는지를 묻는 정보공개청구를 접수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양 부처의 공식 답변은 이와 관련된 보고서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된 외주 연구프로젝트 역시 실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아무런 분석도 연구도 없이, 혹은 그런 분석과 연구가 없다고 거짓 답변을 하면서 이라크는 안정화되고 있으며, 자이툰의 재건지원은 성공적이라는 주장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올해 연말에도 자이툰 부대의 파병을 재연장하겠다는 입장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이 최근 기사에서 적절하게 인용했듯이, 작년 연말 파병재연장 동의안이 통과되던 국회 본회의에서 파병연장에 찬성발언을 한 두 명의 집권여당 의원 중 한 명은 '이번(지난해) 연장을 사실상 마지막 연장'이라고 밝혔고, 다른 한 명은 '사실상 철군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라크 민간정부가 수립되는 올해 상반기 이후에는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철군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회에서는 철군 논의를 본격화하기 위한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고 있다.
지난 해 말 필자는 파병 반대 운동을 펼친 시민단체 회원들이 주축이 된 '이라크 모니터팀'이 2년 여의 모니터 결과와 6개월 여의 준비기간을 통해 작성한 300페이지 분량의 '이라크 보고서'를 국회의원 전원에게 일일이 전달하며 파병연장을 부결시켜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이라크 치안유지나 재건을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낯부끄러운 주장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한미동맹 위기? 철군국가들과 미국의 동맹이 깨졌는가?
가장 안전하고 피해가 없다는 아르빌 지역에서조차 우리군은 쿠르드 민병대의 보호 아래 영내에 틀어박혀 있다. 자이툰 부대가 아르빌 치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쿠르드 민병대가 자이툰 부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이 기이한 파병을 왜 연장해야 하는가? 쿠르드 지역을 돕기 위해서라면 파병 대신 군대주둔비용 전체를 ODA(개발원조)로 제공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정부가 모르지 않을 터이다. 자이툰 부대가 '재건 지원'을 위해 사용하는 예산은, 군의 보고를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이툰 주둔 비용의 1/10에 불과한 것이다.
자이툰 부대의 파병연장에 '한미동맹'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도 더 이상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우리보다 늦게 파병한 일본은 이미 철수했다. 3대 개전국 중 하나인 호주는 파병 1년만에 대다수의 병력을 철수하고 나머지 상징적 규모의 군대도 철수하고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1000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나라는 이제 한국밖에 없는데 나머지 철군국가들과 미국과의 동맹은 다 깨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파병연장과 한미동맹을 연관시키는 식의 낡은 논리를 내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와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것은 중동지역에서의 확전의 가능성이다. 파병반대국민행동 등 평화단체들은 미국이 이라크 점령 외에도 이란 혹은 시리아 등에 대해 새로운 군사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중동을 군사적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
올 해 여름 레바논으로 진격한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단순히 헤즈볼라라는 한 '무장단체'와 이스라엘군 간의 무장갈등으로 볼 수만은 없다. 상당수의 관측자들은 이 무장 갈등이 미국의 '새로운 중동' 정책과 연관되어 있고, 미국과 이란의 무장갈등으로 나아가는 전초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패권주의가 중동 전체를, 그리고 우방국들을 전쟁과 무장갈등의 늪에 빠뜨릴 가능성과 위험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악화를 막기 위해 우리국민과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은 명분없는 점령과 군사적 협력을 중단하는 길이다. 지체하지 말고, 이라크에서 나아가 중동지역에서의 패권적 군사행동의 소용돌이에서 발을 빼야 한다.
자이툰 부대는 연내에 철수해야 한다. 국회는 당장 철군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부에게 이라크에 대한 각종 정보와 철군의 절차에 대한 계획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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