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6자회담 복귀 거부와 미사일 발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안 통과, 미국과 일본의 경제·군사적 대북 제재 움직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날로 험악해져 가는데 남북관계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 정부는 갈 길을 잃은 듯하다.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며 한반도 문제에서 스스로 '왕따'가 됐던 김영삼 정권 시절의 '잃어버린 5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모든 건 북한 탓'이라며 손털고 일어서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1. 보수언론에 휘둘리는 대북정책
정부의 대북정책이 보수적인 여론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게 첫째가는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11일부터 3일간 열렸던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던 4일 오전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는 장관급회담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이 국방부와 외교부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회담일이 다가오자 소위 보수언론들도 '이런 회담을 왜 하냐'고 아우성쳤다.
이에 이종석 장관은 '대화의 문은 열어둬야 한다'며 대신 회담에서 미사일과 6자회담 복귀 문제만 논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못을 박았다. 회담 반대 여론을 달래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장관급회담은 원래 이산가족 상봉, 경제교류 같은 남북 내부의 문제를 다루는 자리다. 회담에 나오는 북측 대표단도 미사일과 6자회담을 논할 자격이 별로 없는 '대남라인'으로 구성된다.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핵·미사일 문제만 얘기한다는 건 사실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북측 대표단을 예상보다 하루 앞당겨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대화의 문을 유지하겠다며 강행한 회담이 오히려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는 꼴이 됐다.
물론 장관급회담이라도 미사일과 6자회담 복귀를 논의할 수 있고, 논의해야 했다.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열리던 지난 9월 평양에서 동시에 열린 16차 장관급회담이 별도의 대화 채널이 되어 9.19 공동성명 탄생에 기여했던 적이 있는 걸 보면, 장관급회담도 외교안보 문제를 논의하기에 요긴한 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만' 하겠다는 경직된 태도였는데, 역시 보수적인 여론을 의식한 탓이었다. 즉 '미사일과 6자회담만 얘기하겠다'는 선언은 북쪽이 아닌 남쪽에 대고 한 말이었다.
'남측 대중들도 선군정치의 혜택을 본다'는 북측 대표단의 말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장관급회담이 대남용이었음을 증명하는 명징한 사례다.
이 말은 회담 대변인인 이관세 통일부 정책홍보실장이 회담 둘째날 전체회의의 기조연설을 설명하던 말미에 나왔다. 이 실장은 "특히 북측이 제기했던 사안 중 선군정치와 관련해 우리 입장을 밝힌 게 있어 소개하겠다"며 이 얘기를 꺼냈다.
남북 접촉을 하다보면 별의 별 얘기가 다 나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정부가 그 당치도 않은 발언을 새삼 공개했던 이유는 뭘까. '북한의 엉뚱한 발언→언론의 대서특필→대북 비난 여론 증가→회담결렬 책임 면피'라는 공식에 몸을 맡기기 위한 전술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게 회담은 파행으로 끝났고 이 장관은 '각오했던 일'이라며 떳떳이 귀경했다. 박수갈채를 보낼 줄 알았던 보수 여론이 '그러게 왜 했냐' '결렬 책임지고 사퇴하라'며 뒤통수를 쳤다는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이 장관은 오늘(20일)도 "정부는 유엔 결의안을 정확히 해석해 차분하게 대응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는 말로 정례브리핑을 시작했다. "유엔 결의를 준수해야 하지만 적용은 엄격해야 한다"는 18일 발언에 대해 일부 신문이 '국제사회와 엇박자'라는 뉘앙스로 기사를 쓴 데 대한 대응이었다. 전날 보도해명 자료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브리핑 첫마디에 또 그 얘기를 꺼낸 것을 보면 그 문제가 현 사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한미동맹이 흔들린다, 안보공백이 생긴다' 같은 말처럼, 언론은 이제 정부가 무슨 얘기를 꺼내면 즉각 반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며 "자기 기사에 반응하면 또 쓰는 게 언론의 생리인데 정부가 그 싸움에 말려들어 결국은 휘둘리게 됐고, 남북관계에서 정작 중요한 아젠다는 놓치게 됐다"고 말했다.
#2. 쌀·비료 지원 중단은 패착
같은 맥락이지만 쌀·비료 지원 중단 문제를 따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장관은 지난달 21일 한나라당을 방문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쌀·비료 지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안 주겠다'가 아니라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가 정확한 표현이라며 기자들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까지 날리며 진화(실제 진화하려 했는지, 그 역시 제스처였는지는 모른다)를 시도했지만 그 다음날로 기정사실화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에 대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협상전략의 문제로, 정부가 스스로 발목을 잡히고 입지를 좁혔다는 것이다. 쌀·비료 지원이 아무리 인도주의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최악의 경우 협상카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미리 공개하는 순간 카드로서의 효력은 상실되고 단순한 압력수단이 돼버린다.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는 "협상의 핵심은 모호성인데 쌀·비료를 안 주겠다는 말을 명백히 함으로써 협상의 지렛대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불필요한 발언이었다"(서동만 상지대 교수) 혹은 "설사 북한 설득에 지렛대로 쓰더라도 전략적으로 잘못됐다"(김근식 경남대 교수)라고 입을 모았다.
두번째는 '인도주의 사업(쌀지원과 이산가족상봉)을 근본으로, 경제·사회교류(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민간교류 등)를 중심에 두고, 정치·군사적 화해를 지향'하는 남북관계의 피라미드에서 맨 밑돌을 빼버렸다는 점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근본을 무너뜨리면 다른 사업들도 사상누각이 된다"고 말했고, 김근식 교수는 "김대중 정부 이후 인도적 지원을 끊은 것은 처음"이라며 개탄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최재천 의원은 "쌀·비료 지원은 최후에 빼야 할 주춧돌"이라며 "대북 경고가 정 필요했다면 개성공단을 늦추거나 금강산 관광을 쿼터제로 하는 방법 등을 우선 제시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번째는 인도주의적 지원이 갖고 있는 본연의 정신을 저버렸다는 문제. 전문가들은 미국도 민간단체를 통한 대북 쌀 지원을 중단하지 않는 마당에 우리 정부가 먼저 중단을 선언한 것은 도덕적 명분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영철 현대사연구소 부소장은 "인도적 지원은 정치 사안과 연계하지 말고 인도적인 문제로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앞으로 또 문제가 발생하면 쌀·비료 지원을 할거냐 말거냐의 문제가 바로 나온다"고 말했다.
네번째는 쌀·비료 지원 중단으로 미국·일본이 추진하는 대북 제재에 사실상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라가 됐다는 사실. 이는 곧 국제사회의 제재에 대한 북한의 반발에 우리가 맨 앞에서 화살을 맞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에 대해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최근 비공개 브리핑에서 "쌀·비료 중단은 국제사회의 어떤 제재보다 북한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종석 장관은 20일 "쌀·비료 지원 유보는 대북 제재에 동참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통일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보여줬다. 장관이 말한 '제재'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제재이고, 당국자가 말한 제재는 '제재와 유사하지만 다른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언어도단일 뿐이다.
정부는 여전히 미사일과 6자회담에 대한 '출구'가 마련되기 전까지 쌀·비료 지원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장관은 '그 출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금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기에는, 확실히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알쏭달쏭한 답변을 했다.
한편 인도적 지원 중단은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선언을 낳았다.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쐈기 때문에 지원을 유보했고, 그래서 야기된 이산가족 상봉 중단의 책임은 결국 북한에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그같은 태도는 논리적으로만 성립될 뿐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또하나의 인도적 사업을 정치 논리로 다뤘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장관은 21일 <MBC> '100분토론'에서 이산가족 상봉 중단에 대해 "유감스럽지만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해 먼저 이 문제를 풀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상과 같은 문제는 정부의 대북정책이 보수적인 여론에 휘둘린다는 앞의 지적과 맞닿아 있다. 이 장관은 20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상황에서 쌀·비료 지원은 결코 우리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국민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보수적인 여론을 유포하는 세력일 뿐이다. (下편에 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