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사에서 이른바 "조약 개정"은 매우 중대한 외교적 과제였습니다. 명치유신 이전, 에도 막부 시절에 서양 강국들과 체결했던 통상조약의 불평등한 상황을 명치유신 이후 어떻게든 교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했던 것입니다.
치외법권 제도의 철폐와 관세 자주권의 회복이 핵심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일본의 근대국가 발전에 걸림돌이었고,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사태였습니다.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특명전권 대사로 하여 유력 정치가들을 포함한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던 것은 바로 이 조약개정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한편 이들이 사절단으로 떠났던 시기, 일본 내부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중심으로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기세를 높입니다.
정한론이 명치유신 정부의 비공식 정책이 되고 실천에 옮겨지려는 찰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합니다. 일본 근대국가의 집단적 유학이 된 셈이었습니다.
사절단의 조약개정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들은 일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눈에 정한론은 극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국가의 역량 소진을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약개정에는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던 일본이 1876년 조선을 압박하면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해 불평등한 경제관계를 수립합니다. 명치유신 개혁파들이 정한론을 반대했지만 그것은 본질적 반대가 아니라 절차적 준비의 부족함에 대한 비판이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정한론은 결국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일본은 국내 개혁에 최우선적으로 몰두합니다.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비롯한 조약개정에 성공하는 것은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이후 40년이 지난 1911년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일본은 청일-러일전쟁의 승자로서 그 국제적 입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번 잘못 만들어진 조약을 바꾸는 데에는 무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요구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때와 지금은 당연히 여러 가지가 다른 점이 있으나 그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가는 길과는 별도로, 이 조약 개정에 대한 당시 일본의 노력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극력 피하려 했던 결과인 것입니다.
사미르 아민(Samir Amin)은 그의 <세계적 차원의 자본축적론(Accumulation on a World Scale)>에서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구조조정 당하는 식민지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 나라의 경제가 자신의 절실한 요구가 아닌, 강대국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체제로 변화하는 모순에 대한 지적입니다.
한미 FTA의 문제는, 단지 특정 분야에 대한 협상과 교환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에 종속적으로 통합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내적 역량을 갖추는 것에 기여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한번 잘못 맺은 조약의 개정을 위해 40년을 보내야 했던 일본의 과거는 여전히 교훈이 됩니다. 일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한미 FTA, 누구를 위한 협상인지 정말 잘 따져 봐야 할 겁니다. 지금처럼 국력을 쓸데없어 소진하지 말고 말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