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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지배블록' 깨뜨린 참여정부의 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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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지배블록' 깨뜨린 참여정부의 과오

한반도 브리핑 <8> 전략적 유연성-한미FTA의 정치지형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지적되어 왔던 것이 일련의 정책에 대한 '정무적 판단'이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이 취약성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에서 거의 절정에 달했다는 느낌이다. 정책에 대한 정무적 판단이란 해당 정책이 미치는 그 분야에 대한 직접적인 효과뿐 아니라, 정권의 지지기반이나 이해기반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평가를 뜻한다. 나아가 FTA는 대외경제와 관련된 사안이지만 보다 넓게는 외교안보적 성격도 띠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안보전략적 평가도 포함된다고 하겠다.

시기적으로나 한미관계의 현황에서 볼 때 이것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같은 대국과의 FTA협상은 그 파장이 국민경제 전체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만큼 그 힘겨운 대외협상도 그 비중은 전체에서 30% 정도이고 오히려 국내 이해관계 조정, 즉 국내협상이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통상 분야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대외협상능력뿐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고 이끌어갈 정치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사안을 정부 유관 부처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는지 매우 회의적임은 최근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발언은 물론이고 정부가 제시한 논리나 근거, 자료의 불충분함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도 부정하면서 사후적으로 부족하나마 대응 논리를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존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열린우리당 의원이 개별적으로 전략적 유연성, 용산기지 이전 협상과정의 부실함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고, 한미FTA에 대한 몇몇 의원 개인적 차원에서 비판적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으나, 그 이외에 공식적 입장 정리는 물론이고 당 차원의 보고서 하나 발표된 적이 없었다. 일 년에 수십억 원 국민세금을 쓰며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를 지향한다던 당소속연구소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지방선거 막판에 선거 참패가 예상되자 열린우리당에서는 '민주평화개혁세력'을 저버리지 말아달라는 마지막 읍소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를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 국정선거가 아닌 지방선거였다는 점, 여당이 이 문제를 쟁점이 되지 못하도록 피해갔다는 점 등은 있으나, 스스로 '평화세력'이라고 자임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지지층이 대거 이탈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선거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 예를 들면서 올바른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국민들의 지지를 잃는다고 해도 길게 보면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멀로니 총리의 예는 전혀 맥락이 맞지 않으며 훗날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한 업적으로 볼 수도 없다는 지적이 여기저기 나오고 있으나, 가령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과연 한미FTA협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평화의 지배블록, 참여정부 탄생과 6자회담의 원동력

지난 3월 28일 각 부문별 단체 270개가 망라된 한미FTA 저지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한 데 이어 4월 15일에는 서울에서 약 1만5000명이 참가한 반대시위가 개최된 것을 시발점으로 반대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 270개 단체의 구성원을 보면, 아직은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이른바 '민중운동' 부문이 중심이 되어 있으나, 환경, 생활, 소비자, 인권, 보건-의료, 문화-예술 등 시민운동 부문이 대거 결합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나아가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 출범 이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부문이 하나의 이슈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은 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 한미FTA를 막기 위해 97년 이후 다시 모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프레시안

이 단체들은 FTA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 국민운동 본부에는 속하지 않지만 직접적인 반대론 외에 한시적 협상 이후 중단론, 차기 정권 이관론 등 간접적인 반대 입장의 단체들도 널리 포진하고 있다. 전문가-지식인층만을 보아도 진보 성향의 5개 싱크탱크들(희망제작소, 세교연구소, 참여사회연구소, 좋은정책포럼, 진보정치연구소)이 대체로 이러한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정부의 한미FTA 평가 프로젝트 공모에 기존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말고는 국책연구기관들이 일체 응모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부정적 여론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지형 상으로 보면 이들 단체가 대표하는 층이 한국사회의 범진보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여기에 일부 중도세력까지 가세하고 있다는 데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 정치적 함의는 한미FTA라는 이슈를 넘어 훨씬 넓은 범위까지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한미FTA가 단순한 경제 이슈를 넘어서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 구도와 연관된 사안이라는 점뿐 아니라, 이들 세력이 띠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이들이 모두 열린우리당 지지만은 아니고, 상당수 민노당 지지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노동자·농민운동 내에서도 겉으로 내세우거나 조직화된 것은 아니어도 실제 투표현장에서는 여당 지지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 탄생의 주요 지지기반 중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잊어서는 안 될 점은 이들의 성향을 외교-안보 분야와 관련해서 볼 때, 남북 화해-협력 및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는 주력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력은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지속되어 오면서 내부의 이견을 넘어서 남북 민간교류에도 통일적으로 대응해 왔다.

김대중 정부는 사회경제적 개혁 분야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이들 세력의 지지를 결집해 낼 수 있었다. DJ정부는 적어도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중심으로 한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으며, 냉전-수구세력과의 '전선'에서 전면에 서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평화세력으로서 개혁-진보세력과 중복되면서 다수파를 형성하며 노무현 정부 탄생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 정치에서 외교-안보 분야를 축으로 '평화의 지배블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며, 국내정치뿐 아니라 남북 관계나 동북아시아 화해-협력에서 한국정부가 외교 역량을 발휘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힘이 나아가 북측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속적인 남북-화해협력을 진전시키는 데 추진력이 되었다. 제2차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북미 간의 군사적 대결을 막는 핵심적인 억지력이 되었던 것이다. 1992-94년 제1차 북핵위기 당시 북미 양자 대결구도에서 소외되었던 한국이 제2차 위기를 수습하는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게 한 토대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블록의 균열과 '신뢰의 위기'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등장 이후 한미관계의 일련의 협상에서 이러한 블록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용산기지 협상,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이와 같은 평화의 지배블록 내에 '신뢰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의 전략구도를 뒤바꿀 수도 있고, 한국, 나아가 한반도의 장래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을 이렇다 할 공론화 과정 없이 합의해 버렸다는 사실에서 협상 결과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일단 지지층의 심각한 이반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협상과정의 철저한 비밀주의는 참여정부라는 이름과 상반되는 국민 참여 배제의 외교로서 지지층 내에서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적 반응을 낳고 있다. 나아가 일체화되어 있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협상과 기지이전 협상을 분리시키고, 협상의 우선순위를 전도시킴으로써 한국정부의 협상카드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저자세 협상방식으로 비쳤다.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대추리 주민들의 반발은 그 핵심이 신뢰의 문제에 있는 것이지 반미의 문제에 있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쏟아낸 바 있는 동북아균형자론, 협력적 자주국방 등 발언도 그 지향성이 갖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실제협상과는 동떨어진 일관성 없는 말의 잔치로만 간주되고 있다.

이제 정부의 한미FTA 협상 개시 선언은 이러한 신뢰의 위기를 인식의 수준에서 행동의 수준으로 확대시키고(escalate) 있다. 한미FTA는 한국경제체제의 구조적 성격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으로 노동자, 농민, 각 분야의 경제주체를 포함하여 국민 전체의 경제적 삶이 걸려 있는 절실한 문제다. 한국경제를 미국식 자본주의 방향으로 가져갈 것인가 하는 국가백년대계의 정책인 것이다. 하지만 협상 개시를 선언하기까지 정부는 물론이고 전문가, 정당, 사회단체, 이익단체 등이 참여한 제대로 된 공론화 절차는 진행된 바 없다.

OECD 가입국이자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로서 아시아에서 드물게 밑으로부터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 국민의 수준이라면 그 판단을 들어 보기에 충분한 민주적 주체다. 노무현 대통령이야말로 북핵위기가 악화될지도 모르는 긴장된 선거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냉전적 투표행태와는 달리 유권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당선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바로 평화 블록의 형성이라는 집단적 힘과 그것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단체들의 조직적 움직임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앞으로 각 부문별로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따져보는 작업이 진전되고 협상이 개시됨에 따라 분야별 가이드라인이 설정되면, 이 움직임에는 이익단체와 직능단체가 가세하게 될 것이다. 전례가 없는 사태인 만큼 그 파장이 어디쯤 미칠 것인지 전혀 가능할 길이 없다. 농축산업은 물론이고 영화, 보건-의료, 통신-미디어, 교육, 법률, 지적 재산권, 등 서비스 산업 전반이 걸려 있으며, 여기에 환경, 노동 등 부문이 연관되어 있는 터라 광범한 층의 참가가 예상되고 있다.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은 여기에는 과거의 대중행동과는 달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협상으로 가져 가려 한다면 국내 이해의 조정만으로도 종래의 어떠한 대외협상보다 오랜 시간과 노력, 밀고 당기는 씨름이 수반될 것이다. 당초 정부가 밝힌 대로 미국 측 사정인 내년 3월까지 협상을 완료하려고 한다면, 정부와 시민사회 간에 일대 격돌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민주평화개혁세력에 대한 지지 읍소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이었다. 현 상태 하에서는 평화블록이 더 이상 열린우리당의 패배에 대한 방파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며, 이 쟁점의 입장 정리를 통한 세력의 재정비 없이는 내년 대선까지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해 준 것이기도 하다.

이미 평화블록 안에서 정부와 지지층 간의 균열이 생겨난 이상 지배블록으로 볼 수 없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미FTA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이나 청와대는 한미FTA 반대론을 북한이나 쿠바와 같이 파탄에 빠뜨릴 수도 있는 폐쇄경제의 논리로 간주하는 색깔론을 방불케 하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더욱이 보수언론은 모두 이를 지지하고 진보성향의 언론이 이의를 제기하는 지지층의 역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판 대연정 제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닌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배블록의 형성으로 국내에서 발휘되는 효과는 북한이나 남북관계, 한반도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나 단체들이 절감해 온 터였다. 적어도 정부가 전선의 전면에 서 있는 이상 일부 돌출적 사건을 제외하고 진보적 전문가나 단체들이 색깔론의 직접적인 공세에 시달릴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부 내 공안담당 부서의 냉전적 행위가 억제됨으로써 전문가나 사회단체들에게는 행복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거꾸로 보수단체들이 조직화되어 대중시위에 나서는 양상으로 국면은 뒤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적어도 노무현 정부 하에서 과거의 냉전적 상황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기관의 과거사청산 작업 등 중요한 진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블록의 균열이 정권교체로 이어질 경우 사태는 짐작하기 어렵다. 현 정부 하에서 한나라당의 반대나 여당 내 혼선으로 국가보안법 개폐가 불가능해진 것이나 한나라당이 사학법 반대투쟁 과정에서 이념 공세를 동원한 행태를 감안할 때, 국내 냉전에서 확실히 벗어났다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한미 경제-안보 동맹 강화가 남북관계 개선 가져다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배 블록의 내부균열이 국내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태가 이대로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겉으로는 별개 사안으로 보이는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블록의 약화는 김대중 정부 이래 대외적으로 확대시켜 온 한국의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위축시킬 수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현 정부가 남북 화해-협력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 남북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몽골 방문에서의 발언에서 보듯이 올해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부쩍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하여 대북경제협력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다. 전략적 유연성에 이어 한미FTA까지 추진하는 마당에 이제 미국의 대북정책과는 다소 어긋나게 한국이 대북경제지원을 포함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선다고 해도 미국을 설득할 명분은 충분하지 않는가 하는 측면이다. 특히 FTA 반대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일부 논자들 사이에서 FTA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기도 하다.

당초부터 실제로 이러한 전략적 판단이 서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뒤늦게나마 이러한 논리라도 나오는 것이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긍정적인 점이 있기는 하다. 우선 미국 측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을 관철해야 할 당위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남은 임기 안에 현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하여 남북관계 개선에 일정한 성과를 내는 것은 평화블록의 유지를 위한 요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희망사항일 뿐이지, 전략적 유연성 합의, 한미 FTA 협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정책은 한국에 접근해서 온건해지기보다는 강경일로를 걷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한미FTA로 남북관계 개선에 유리한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도 남북관계 개선과 한국경제를 송두리째 맞바꾼다는 주객이 전도된 논리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중장기적 차원에서도 과연 낙관적 전망이 통할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력은 남북화해-협력의 물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미국 경제와 일체화된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도 남북경제협력이 미국 대북정책의 구조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IMF경제위기 이후 한국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5% 이상을 월가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외자가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개방 수준 아래에서도 한국 대기업들은 대북 투자에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우선 금융부문만 보더라도 한미FTA가 체결되어 한미 간에 제도의 일체화가 실현된다면 산업정책을 펼 수 있는 남한의 금융체제는 현저하게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민간기업 차원의 대규모 남북경제협력을 뒷받침할 남한 독자의 개발금융 역량은 크게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외교-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한국의 그것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러나 미국의 협력은 한미 관계가 일체화됨으로써 확보된다기보다는 양자 관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차원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확대시킴으로써 더욱 용이해질 수 있다.

더욱이 단기적으로도 북측은 전략적 성격을 지닌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소극적 태도로 나올 수도 있다. 또한 이와 맞물려 북핵문제나 동북아 경제협력에 대한 중국 측의 비협조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남북 철도연결 사업을 줄곧 경제협력 사업으로 간주해 오던 북측이 최근 들어 느닷없이 이를 군사안보 사안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측이 서해 해상경계선 획정문제와 철도 연결 문제를 연계시키기 시작한 데 대하여 일단 우리 정부는 포괄적인 군사회담이란 틀 속에 포함시킨다는 조건부로 이를 받아들였으나, 북측이 기존 주장을 고집하면서 협상은 결렬된 바 있다. 어떻든 남측도 철도 연결 사업을 군사안보 문제로 인정하게 된 셈이다.

이번 제주도의 남북경제협력위원회에서 남북경공업 협력을 철도 연결과 연계시킴으로써 합의가 성립한 것은 남북경협의 모멘텀이 유지되었다는 점에서는 일단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김대중 정부 이래 유지되던 남북경협의 정경분리 원칙은 사실상 변경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북측이 철도 연결과 관련해서 내세우는 표면적인 논리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바라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아직은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그 이면에는 전략적 유연성 합의, FTA체결에 따른 한미일체화 움직임을 우려하여 북측이 철도 연결을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북상하는 통로로 간주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관련기사 ☞) 경의선 철도는 중국대륙으로까지 연결되어야 경제성을 갖는 만큼 그 이면에 중국의 의향이 개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역사적 성과 손상시킨 참여정부

이처럼 국민의 정부 5년, 참여정부 3년을 지속해 온 '평화의 지배블록'이 분열되는 사태는 남북 화해-협력, 한반도 평화에서 그동안 힘겹게 일궈 온 역사적 성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 한국에 국한된 평화 블록은 북측까지 확고하게 연결된 한반도 평화 블록으로 확대되어야 비록 정권이 교체되어도 남북 화해-협력정책, 한반도 평화-번영 정책은 뒤로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될 수 있다.

서독 사민당은 69년부터 82년까지 브란트 총리 4년 반, 슈미트 총리 8년 반, 도합 13년 집권을 통해 동방정책을 지속한 결과,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독일판 평화 블록이 기민당의 콜 총리로 이어지며 89년 독일 통일로 실현된 바 있다. 독일식 흡수통일은 현명한 선택치도 현실적인 것도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반도 상황은 독일과는 질적으로 다르지만, 아직은 동서독의 교류-협력 실적에도 훨씬 못 미치며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 및 남북관계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평화블록이 지배블록으로 지속되어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도 평화 블록의 유지-확대는 다수파 형성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설사 정권 교체가 된다고 해도 이 블록이 유지되어 한나라당을 견인하여 대북 정책의 일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캐나다의 멀로니 정부 예를 들었다는 것은 당시 캐나다 여당처럼 앞으로 13년 간 야당에 정권을 내주는 일이 있어도 한미FTA는 관철시키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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