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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감독, 비정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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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감독, 비정한 영화

[프리뷰] 박찬욱의 신작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잔혹한 장면묘사로 박찬욱에게 종종 거부감을 느껴 왔다는 사람들도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에 이어 일명 복수 3 부작의 완결편에 해당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영화미학의 정점이자 완성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이번 영화로 상업영화의 미학과 작가영화의 실험성 모두에서 최고의 평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는 너무나 완벽해서 할 말이 없다. 논쟁도 있을 수 없다. 비판도 있을 수 없다. 평단에선 그래서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이 이룬 두드러진 성과는 바로 캐릭터에 있다. 주인공 '금자'의 캐릭터를 구축해내는 과정에서 배우 이영애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박찬욱은 자신이 현재 한국영화계의 가장 뛰어난 연출가임을 입증해냈다.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기존 장르영화의 관습적 틀을 가져오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여러 작품의 하나로 느껴지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결국, 캐릭터를 어떻게 변주해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 역시 한 여자의 핏빛 복수극을 그린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많은 영화들이 다뤄 왔던 소재의 드라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예컨대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 이 영화가 여느 작품들과 확연하게 선을 긋고 독특한 자기 세계의 영역에 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연배우 이영애를 완전히 다른 인물로 재탄생시킨 연출력에 근거한다. 이영애가 맡은 배역을 잘해냈느냐 못해냈느냐는 연기자에 대한 평가에서 논의 될 수 있는 문제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감독의 연출력을 두고 다뤄야 할 문제다. 이 영화의 금자탑과 같은 성과는 이영애란 배우의 연기력이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내부에서 변신의 잠재력을 일깨워내고 또 그것을 완벽하게 이끌어낸 감독, 박찬욱이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해 칸 영화제에서 주요 부문의 상을 수상해 대중적으로 스타감독이 되는 바람에 오히려 작품이 갖고 있는 깊은 주제의식이 뒤로 숨겨진 듯한 인상이지만 박찬욱은 사실 세상에 대해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철학이 빈곤해진 지금의 황폐한 영화계에 날이 서 있는 예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쭈뼛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전작들, 특히 복수 1,2부작에 이어 이번 작품의 면면에 흐르는 박찬욱의 생각과 고민은 한마디로 세상과 개인에 대한 구원의 문제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정말로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점은,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고 무책임한 온정주의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는 대목에 있다. 그건 아마도 박찬욱에게 있어 지금의 세상은 용서나 화해따위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한번 죄지은 자는 아무리 속죄한들 용서받기 어렵다고 그는 생각한다. 흔히들 얘기하는 속죄란 개념, 용서란 개념은 박찬욱에게 있어 마치 영화 속 첫 장면에서 금자가 목사에게 발칙한 눈초리로 얘기하듯 정말 "너나 잘하세요"에 해당하는 것이다.

박찬욱은 가식적이기 되기보다는 사람들이 불편해 한들 잔인해지기를 택한다. 그의 영화 속에서 흔히 나오는 주인공들의 행위처럼 상대를 칼이나 도끼, 면도칼로 찌르고 난자하듯 박찬욱은 '의식의 잔혹한 무기'로 관객들의 가슴을 찢는다. 그는 마치 스크린을 온통 피로 흥건하게 하는 것처럼(실제로 영화 속에서 최민식이 맡은 백선생이란 인물의 피는 양동이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는다) 새로운 세계란 것도 그렇게 헤집은 상태로, 곧 완벽한 아나키(anachy)의 상태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박찬욱은 잔인하고 비정한 무정부주의자다. 그의 영화가 늘 잔혹하다고 평가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거나, 설득될 수 있는 잔인함이다.

이번 영화가 스타일 면에서 전작들에 비해 달라진 점은 극 전반을 성우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박찬욱은 이 영화가 마치 제목 그대로 매우 '친절하게'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또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더 제목이 갖는 중의적 느낌, 곧 너무나 친절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잔혹한 느낌을 강조해내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금자는 13년의 복역기간 중 친절한 금자씨로도 불리지만 마녀로도 불린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인간이 갖는 선함과 악함, 용서와 복수의 마음, 이성과 광기, 그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스타일 면에서 이 영화가 특히 판타지와 키치, 만화적 요소를 적극 드러내고 있는 것도 현실세계의 비현실 같은 현실, 그 경계의 모호함을 더욱 더 강조해 내기 위함이다. 그의 영화가 끝간 데 없이 잔인하면서도 영화 내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유머를 깔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해도 먹고 마시는 일상을 벗어날 수 없다. 살고 싶지 않지만 결국엔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그 부조리함은 박찬욱에게 있어 웃어도 웃지 못하는 상황, 웃지 말아야 하지만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논법에 휘말려 종종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가도 결국엔 침묵에 빠져들게 되는 건 그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최근 들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일종의 기우일 수 있음을, 한국영화는 여전히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해 내는 작품이다. 삶과 세상을 날카롭게 성찰해내는 작가를 지니고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박찬욱과 그의 영화는 그래서 지금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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