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삼국지 바로 읽기‘의 저자 김운회 동양대학교 교수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마련한 새 기획물 ’대쥬신을 찾아서‘를 오늘부터 주 1회 연재합니다. 김 교수는 ‘삼국지 바로 읽기’를 프레시안에 연재, 삼국지에 담긴 중화사상의 문제점을 신랄히 지적하면서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필자입니다.
‘대쥬신을 찾아서’는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연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중국 측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여러 문헌의 기록을 통해 여지없이 파헤쳐 줄 것입니다. 20여회에 걸쳐 계속될 김 교수의 기획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올바른 사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
***연재를 시작하며**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운회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여러분들과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지난 해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여러분들이 보여준 깊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삼국지 바로 읽기’를 연재할 당시 저는 ‘쥬신’에 관해 간략히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충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의혹이 증폭되고 논쟁이 끝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언제 기회가 되면 ‘쥬신’에 대해 다시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일이 빨리 온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올해를 넘기면 다시 이 이야기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일에 뛰어든 직접적인 이유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① 기존의 사학계가 추진하는 ‘고구려 지키기’, ② ‘요동사(遼東史)’ 개념[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보려는 시도], ③ ‘쥬신’의 관계사(關係史)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쥬신’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17세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미 ‘고구려 지키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도임을 ‘삼국지 바로 읽기’를 통해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1천4백여 년 전에 없어진 나라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한다거나, 조공-책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한들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발해의 역사를 지킨다 해도 이미 1천 년 전에 없어진 나라이니 그 또한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1천 년 전의 국가의 토지대장이 있다한들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무력이 있습니까?
‘요동사’ 개념도 의미가 없는 시도입니다. 요동은 우리 민족의 주요 근거지인데 이것을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분리한다니 말이 안 되지요. ‘요동사’ 개념에서 말하는 한국이라는 것은 삼한(三韓)의 개념을 근거로 하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중국의 사서(史書)만을 중심으로 개념화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라는 개념은 한반도 남단에만 있었던 삼한(三韓)을 포함하여 북방계 유목민의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나타내는 용어 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충분히 밝혀 나가겠습니다.
‘요동사’ 개념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민족사의 진원지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은 모두 요동을 근거지로 하거나 요동을 주요 세력권으로 한 국가들입니다. 특히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라고 하기도 하여 충실한 부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요동의 국가라고 한다면 상식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이제 쥬신의 관계사로 동북아시아 역사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쥬신의 관계사로 보는 동북아의 역사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만 ‘삼국지 바로 읽기’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정리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실적으로 다시 연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동향을 보면서, 학문적인 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뿌리’가 근본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 왔음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고민은 저 힘만으로 이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사(古代史)의 영역은 어쩌면 범위도 방대하여 저 같은 ‘아웃사이더’가 다룬다는 것도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아웃사이더’이므로 더욱 편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바둑도 훈수꾼에게 묘수(妙手)가 더 잘 보이는 것처럼 때로는 ‘아웃사이더’의 눈이 정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앞으로 연재할 글은 ‘삼국지 바로 읽기’처럼 재미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쥬신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우리의 참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다음과 같은 항목을 하나하나 살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제가 ‘삼국지 바로 읽기’를 연재했던 글과 약간은 중복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사실상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먼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예맥(濊貊)·숙신(肅愼)을 검토하고 이들과 말갈(靺鞨)의 관계는 물론 알타이 신화, 쥬신의 호수 고구려, 몽골·백제·일본·신라 등의 국가간 관계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때로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쥬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만 된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은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음의 일은 관련 전문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쥬신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좁은 한반도에서 안주하면서 같은 쥬신 사람들을 서로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현재는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원수(怨讐)처럼 지내더라도 그 ‘뿌리’를 알고 화해의 장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쥬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합니다.
‘삼국지 바로읽기’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시피 형제간 동족간의 싸움이 더욱 처절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죠. 부여와 고구려를 보세요.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한국전쟁의 양상을 보세요. 아마도 한국전쟁만큼 처절하고 잔인하게 형제와 자매를 살육한 다른 예는 인간의 역사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부여는 철저히 중국을 지지하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쥬신의 뿌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화해할 필요는 물론 없겠지만 지금처럼 쥬신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쥬신을 재발견(再發見)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학문은 정치에 종속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변하는데, 그 말 자체도 정치적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다 정치싸움이거든요. 저는 정말 사람들이 ‘진리(眞理)’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엔 세속(世俗)에는 세속의 진리가 따로 있고, 사상과 종교에는 그 나름의 진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진리도 각각의 차원(dimension)의 문제지요.
제가 하는 일은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어떤 민족적인 ‘집단 무의식’과 그들의 ‘민족적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과제입니다.
자, 다시 길을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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