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장도빈과의 만남**
혁명검찰부장일 때 재벌들 잡아오래서 이병철 이정림 등이 잡혀왔는데 그중 학자 이선근이 있었다. 이것 저것 신문하다가 내가 그 사람에게
'고구려는 망했지만 망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사 연구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가 왜 신라중심이 되어야 했나' 물었다.
이선근도 한국사가 고조선, 발해를 포함한 지역을 망라하지 않고 한반도내 신라 중심의 역사가 돼버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선근에게
'나쁜 놈이다. 학자란 사람이 알고도 그러다니 그럼 고구려를 일으켜 세운 발해사를 누가 연구했느냐' 했더니 이선근이 얼굴에 진땀을 흘리면서
'학자라고는 하지만 그 방면을 연구한 학자가 없다. 그중 장도빈이 그 방면을 안다.'고 했다.
내가 부하들을 데리고 '우리 장도빈(張道斌; 1888 - 1963)선생 댁에 세배하러 가자' 했다. 갔더니 한옥에 한복 입은 영감이 자기 잡으러 온 줄 알고 놀랐다가 내가 설명을 하고 세배를 하니 눈물을 흘리며 '오래 산 보람있다'고 했다.
나는 장도빈으로부터 발해와 우리 고대사를 잘 배웠다. 이병도가 신석호와 함께 이마니시의 하수인이 되어 고조선의 역사를 잘라버리고 한국사를 신라건국부터 쓴 사실을 확인했다. 장도빈은 1938년 6월 조선총독부가 극소수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책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 자기 이름이 오른 걸 보는 기분이 어떨까'
하고 장도빈은 이야기 하면서 한국 역사교육에서 이병도의 역사관이 참으로 많은 문제를 지닌 것임을 지적했다. 이병도는 일본이 한국을 능멸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1. 단군은 가짜다. 2. 한국은 독립한 사실이 없다. 3. 한국은 민족이 아니고 자연 발생된 집단이다' 는 것이었다. 그가 국립서울대에서 가르친 후학들이 대를 이어 학맥을 형성하고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다.
나는 이병도를 만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이 이병도에게 찾아갔다.
'당신은 한국사에 열등감을 갖고있는 사람이다' 하니 이병도가
'누구 앞에서 큰소리냐' 고 했다.
그런데 이때의 일이 이병도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후일 최태영박사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내가 혁명검찰 본부에 일반 사병 아닌 중령급으로 보초를 세우고 누가 오는지를 보게 했다. 양복입고 오는 자들은 내게 청탁하러 오는 자들이니 받아들일 것 없고 아마 한복입고 오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했다. 과연 어느날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보자기에 꾸러미를 싸들고 내게 찾아온 노인이 있었다. 부하들이 그에게 말을 시키니 그 노인 장도빈은 도도하게 '내가 너희들 책임자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장도빈은 그때 내게 책을 2권 전했다.
'이것 가지고 활용하면 된다. 이병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되는지 일반에 알려야 되는데 학자들은 겁이 많고 박창암 자네가 힘이 있는 것 같으니 앞일을 부탁한다.'
그것이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와 장도빈의 저작 대한국사이다. 나는 이 책을 가보로 지녔다. 장도빈은 1963년 작고했다.
내가 이때 장도빈으로부터 들은 조선사편수회와 이병도의 이야기는 1980년 일본서 신국민사가 발행한 계간 역사와 현대 여름호에 그대로 발표했다. 조선사편수회와 이병도를 비판한 글은 그때가 처음이라 했다.
그후 일은 장도빈의 아들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이 고합장학회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원하고 고려학술문화재단을 만들어 만주 현지답사를 하고 연구서적이 나왔다.
일제에 영향 받지 않은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고 역사교과서의 식민사관을 지적하는 등 새로운 국사부흥을 위해 애쓴 국사찾기 협의회는 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알타이어를 연구한 영문학자 박시인 서울대 교수, 재야사학자 등이고 나 혼자 군인이었다.
나는 장도빈 사후에는 최태영(崔泰永) 전 서울법대 학장의 역사관에 관심을 가졌다. 최태영은 이병도에게
'당신이 언제 한국역사를 제대로 배웠냐. 법과하려고 일본갔다가 일본사 배운 것 아니냐' 고 그의 한국사연구의 정당성을 비판한 사람이다.
'당신 죽은 뒤 당신네 일파들 중에는 당신 위해 총대 메줄 사람 없다. 이마니시에 속은 것 알았으면 단군이 실존인물이란 사실을 더 이상 왜곡말고 지금 양심 선언해라'
최태영이 이병도를 설득했다. 그래서 이병도가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단군실존을 확신하는 글을 냈다. 그러나 최태영은 후일
‘그때 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만 설득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미 기득권 세력이 돼버린 사람들이 또 생겨났다’ 고 했다.
***월간 자유 발행과 국사를 위한 헌신**
전역한 뒤 박창암장군은 서예에 전념하면서 1968년 사재를 내어 반공과 역사연구를 지향하는 조그만 월간지 <자유>를 창간했다. 고구려 발해의 고토 연구등 역사관 확립에 남다른 정열을 쏟고 우리의 고대사 연구와 국사교과서의 역사전달 방식을 비판했다. 만주 간도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 이 지역에 대한 확신이 더했다. 호(號)도 '滿洲'로 지을 정도였다.
한국사 연구에 큰 사건이 된 환단고기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었다. 박창암 장군이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 원문을 전해 받고 일본인 변호사 가시마(鹿島 昇) 에게 보여주어 일본에서 번역되어 나오기에 이르렀다. 환단고기의 일본어번역은 일본에서 상가야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이 사실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그 뒤에 국내에서 한글로 번역되었다.
월간 <자유>의 발행은 지원받는 것으로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출판비용은 외상이 많았다. 일년 중 한달은 걸러도 발행취소는 안 되니까 11번씩 냈다. 2001년까지 발행하다가 지금은 퇴역장성들의 모임 성우회가 인수받아 발행하는 책이 되었다. 이 책에는 박장군이 박정희정권을 대담하게 공격한 사례, 역사연구, 반공, 전술에 관한 글 말고도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실렸다. 여기서는 존 코벨의 미술사논문과 이갑성 건에 대해서만 쓰겠다.
***존 코벨의 한국문화 연구**
미국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 박사의 글이 1982년 월간 자유에 1년여 연재되었다. 일본에 남은 백제 미술을 소개하고 부여족이 왜로 건너간 경과, 일본 천황이 어떻게 해서 백제혈통인가를 밝히는 고고학적 내용의 글이 많았다. 지금은 이런 주장이 거의 일반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대담한 발표였다.
코벨박사는 그 당시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문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6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되는데 그러기가 어려우니까 코벨은 자기 이름을 감추고 3대 4대 조상까지 다 동원한 이름으로 글을 발표했다. 코벨은 체류허가 받는 일로 속썩이지 않고 계속 한국문화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한국정부의 지원을 바랐지만 허사였다. 기존 학계를 매우 비판했으므로 국내 일부 학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일본인의 역사왜곡을 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일본학계에서도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추방해 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때 박창암장군이 나서서 코벨의 신원보증인이 되어 추방되지 않게 했다. 코벨 박사와 아들 알란 박사는 계속 한국문화를 연구하며 한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임나일본부에 대한 제3국학자의 반론 등 천금같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갑성사건**
1980년 어느날 조경한(曺擎韓;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나를 불러 이갑성(1889 - 1981)이 일제의 밀정 노릇 한 내용을 말해주며 '내가 이걸 밝혀야 되겠는데 자네 용기있나' 했다. 조경한은 기개가 도도하고 학식이 높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임정 국무위원이었다.
이갑성은 장택상도 윤치영도 꺾지 못한 인물이었다. 내가 그 내용을 월간 <자유>에 썼다. 이갑성이 사망하기 얼마 전이었다.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그의 사망 전에 발표해야 바른 역사가 설 것이다. 재판이 이어졌다. 이후 윤치영과 임병직이 '몇이 들러붙어도 해결 못한 이갑성 건을 해결해줘서 고맙다'하고 공식석상에서도 나를 보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절 이렇게 하고도 남는다' 했다.
2002년 10월 월간 자유에 실린 박창암의 권두언 등을 모은 책 <蒼巖>이 발간되어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때 김점곤 장군이 인사말에서 이갑성 사건이 자유지에 발표된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박창암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신념을 수호한 군번 11700의 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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