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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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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

아들 건국기반 아버지가 닦아주다

이행리가 의주에 사는 동안 두 아들을 낳은 먼저 부인 손(孫)씨가 죽자, 등주(登州, 安邊)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이들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襄陽)에 있는 낙산(洛山) 관음굴(觀音窟)에 가 기도해서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꿈을 꾸고 얻은 아이인데, 꿈에서 중이 가르쳐준 대로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지었습니다. 그가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李椿)입니다. 도조(度祖)지요. 원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패안첩목아(孛顔帖木兒)라는 몽고식 이름도 있고요.

이춘은 조상의 터전을 이어받아 함흥에서 안변에 이르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도중에 충숙왕(忠肅王)을 찾아가 하사품을 받은 적도 있군요. 이춘은 자손이 잘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흰 용이 나타나 검은 용에게 집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춘이 신경쓰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자 흰 용은 또 꿈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날짜까지 알려주는데야, 이춘도 할 수 없이 활과 화살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연못 안에서 흰 용과 검은 용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춘은 단발에 검은 용을 쏘아 처치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의 활솜씨 얘기가 나오겠지만, 그 할아버지 이춘도 1백보 밖의 나무 위에 앉은 까치 두 마리를 쏘아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꽤 괜찮은 실력이었답니다.

아무튼 흰 용은 다시 꿈에 나타나 사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 자손에게 큰 경사가 있을 것이오.” 이춘은 1342년에 죽어 함흥에 묻혔습니다. 의릉(義陵)입니다.

나중에 환조(桓祖)로 불리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본래 집안의 세습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이자춘의 아버지 이춘은 부인을 둘 두었습니다. 박광(朴光)이라는 사람의 딸이 첫 부인이었는데, 이자춘은 그 둘째 아들이고 위로 자흥(子興)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박씨가 죽자 이춘은 화주(和州)로 옮겨 쌍성 총관의 딸인 조(趙)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그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복잡해지죠?

예, 결국 일은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춘은 죽기 전에도 풍질 때문에 관직을 이자흥에게 넘겨주려다가 후처인 조씨의 반대에 부딪친 적이 있는데, 이춘이 죽은 뒤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이춘이 죽은 뒤에는 정상적으로 맏아들 이자흥이 이어받았지만, 이자흥이 곧 죽어버려 문제가 꼬였습니다. 제대로 하자면 이자흥의 맏아들이 이어받아야 했겠지만, 아들 교주(咬住)는 어렸습니다. 그 틈을 후처의 아들들이 노렸습니다. 이들 형제는 왕실과 핏줄이 닿는데다 외할아버지가 쌍성 총관이어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조씨 소생인 나해(那海)가 임명장과 도장을 훔쳐간 것입니다.

이자춘이 형수와 함께 원나라 관청에 가서 결정을 받아 왔는데, 교주가 어리니 임시로 이자춘이 이어받았다가 교주가 어른이 되면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맏아들이 아닌 이자춘은 조카에게 넘어가야 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고, 결국 조카가 커서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조카가 사양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록을 조금 더 넘기면 이천계(李天桂) 곧 교주는 자신이 진짜 후계자라 해서 사촌인 이성계를 꺼렸다는 기록이 나오니, 이는 헛소리임이 분명합니다. 이성계는 그 ‘빚’ 때문에 이천계 남매가 자신의 집 종을 부추겨 나쁜 일을 꾸몄어도 말을 못하고, 그들 자손의 혼사 등 여러 일들을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자춘은 윗대 조상들과는 달리 자기 지역을 넘어 중앙 무대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이성계가 큰 활약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반이 바로 이자춘 때에 이루어진 셈이죠.

그 계기가 된 것이 1356년의 쌍성 토벌이었습니다. 중앙에서 보낸 장수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현지에 있는 이자춘에게 벼슬을 주고 힘을 합치도록 했는데, 그 연합군이 승리를 거둬 함흥 이북의 여러 성을 수복했습니다.

고려 고종 때 원나라에 넘어간 지 99년 만에 되찾은 것이라나요. 이자춘은 사복시(司僕寺) 경(卿)의 벼슬을 받고 서울에 집 한 채까지 받았습니다. 공식적인 중앙 무대 진출이었지요.

그 뒤 이자춘은 왜구 방어에 나서면서 몇 개의 중앙 관직을 지낸 뒤 근거지인 동북면 지역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지역 출신이라 군벌화(軍閥化)를 우려하는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호부(戶部) 상서(尙書)의 벼슬을 더 주었습니다.

잘 나가던 그는 불행히도 비교적 일찍 죽었습니다. 1361년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으니까요. 함흥에 장사지내 나중에 정릉(定陵)으로 불렸습니다. 전국적인 인물이 된 것을 실감케라도 하듯, 임금이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부의를 보냈으며 사대부들의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들렸답니다. “이제 동북면에는 인물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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