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기아 참상을 영화로 찍기 위해 방글라데시 유엔 대표인 카말 후세인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북부동맹이 장악한 아프간 북부와 탈레반이 지배하는 칸다하르, 두 곳을 모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규모 인원만이 갈 수 있다고 전갈이 왔는데 결국 나와 나의 아들, 둘이 소형 비디오 카메라만을 갖고 들어갈 수 있다는 허가가 나왔다. 우리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가서 아프간 입국 허가를 받고 유엔 소유의 10인승 비행기로 입국하기로 돼 있었다. 이 비행기는 1주일에 한번은 아프간 남부를, 그 다음 주에는 북부를 왕복하는 비행기였다.
유엔 사무소가 아프간 측에 대해 입국 시기를 물어본 것은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후였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프간 측의 응답은 한달을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달쯤 지나면 더 추워질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므로 당신의 영화가 훨씬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2월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더 재미있다니?” 하고 내가 물었다. 그들은 그래야 세계의 양심을 일깨울 것 아니냐고 응답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남과 북 모두를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탈레반 측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글쟁이나 영화쟁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굶주림에 관해서만 찍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파키스탄에 재입국하려면 유엔의 초청장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후에 테헤란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으로 가라는 팩스를 받았다.
이전에 ‘칸다하르’에 쓸 의상을 구하기 위해 페샤와르에 갔을 때 이 대사관에서 파키스탄행 비자를 받은 적이 있던 터라 ‘이제는 됐구나’ 싶었다. 그러나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응대는 친절한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을 기다리다가 매우 고상해 보이는 숙녀와 한 신사와 함께 한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 머물렀던 약 20분중 15분동안 이 두 사람은 내 딸 사미라와 그 애의 영화판에서의 성공에 대해 얘기했다. 그들은 정작 내 용무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 자신들에게 비자를 신청하면 잘 해주었을 텐데, 왜 유엔을 통해 신청했느냐며 그 이유를 물었다. 나아가 그들은 탈레반 정부를 왜곡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아프간보다는 파키스탄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탈레반(아프간) 대사관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내 영화 ‘사이클리스트’를 봤느냐고 물으며 영화 중 일부는 페샤와르에서 찍었고, 그 영화는 정치적 영화라고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내 관심은 인도적인 것이며 특히 기아와 관련해 아프간인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영화는 실업과 굶주림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란에도 아프간인 2백50만이 있는데 왜 그들을 찍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내 여권을 두고 가라고 말했다. 며칠 후 여권이 돌아왔다. 파키스탄에 관광객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영화 촬영은 안 되고 아프간 입국은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대사관을 나올 때, 그동안 탈레반에 관해 읽었거나 들었던 내용들이 내 눈 앞을 스쳐갔다.
한번은 페샤와르의 탈레반 학교에서 나의 이란인 신분이 밝혀지면서 강제로 쫓겨난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페샤와르에서 ‘사이클리스트’를 찍다가 체포돼 수갑을 찬 적도 있다. 아프간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 할 때마다 파키스탄에서 끝나게 되는 이유를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나보고 조심하라고 한다. 국경 부근에는 언제나 납치나 테러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자헤단과 자볼 사이에서 반대파로 의심되는 자들을 암살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나의 관심은 인도적인 것이지, 정치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경 부근에서 나를 죽이거나 또는 암살하려는 자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촬영을 거의 끝마치고 주변을 거닐고 있을 때, 한 무리가 다가오더니 마흐말바프를 아느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가늘고 긴 턱수염에 아프간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아프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저쪽으로 갔다고 말해주고는 반대 방향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들이 정치적 이유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아니면 몸값을 뜯어내려는 밀수꾼들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제 다시 안보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탈레반은 대중들에 대한 무장해제와, 절도범 손목 절단, 간통범에 대한 돌팔매질, 반대파 처형 등의 중벌 제도를 통해 외견상 안전을 확보했다.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졌다 해도 샤리아(탈레반의 소리) 라디오는(하루에 2시간만 방송한다)는 그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또 이렇게 보도한다. ‘타카르 인민들이 탈레반을 환영했다’고. 사실 이 말은 탈레반이 타카르를 공격해 정복했다는 뜻이다. 그 나머지 뉴스는 금요 기도회, 또는 바미안의 도둑놈 손목이 잘렸다거나 칸다하르의 젊은 간음녀가 돌에 맞아 죽었다거나, 아니면 10대 소년들의 머리를 서방 이교도처럼 잘랐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은 이발사의 얘기 등으로 채워진다. 어찌 됐건 이 같은 형벌과 선전 덕택으로 아프간에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널리 펴지게 됐다.
탈레반이라 한들 대중들의 복지를 보장할 재주는 없다. 아프간에는 그만한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레반은 이 나라에 안전을 가져 올 유일한 정부이다. 탈레반과 싸우는 자들은 아프간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며, 탈레반 지지 세력들은 아프간은 아프간인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든 아프간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면 우선 이 나라에 안전을 가져 와야 한다. 어떤 전쟁이든 안보 불안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부족주의에 물든 아프간에서는 누군가 권력을 장악하려 하면 반드시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탈레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정치적으로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정부의 도구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들은 배고픈 젊은이였다가 파키스탄 내의 탈레반 학교에 들어가 (종교.군사적)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다. 처음에 이들은 빵 때문에 학교에 들어갔다가 학교를 나와서는 아프간 내에서 정치.군사적 지위를 차지한다.
어떤 정치그룹의 관점에서 보자면 탈레반은 근본주의자들인 반면, 다른 정치그룹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드 압달리 이래 아프간의 유일한 지배자였던 파쉬툰족의 일원이다. 오늘날 그들은 십수년의 혼란 끝에 2백50년 지배의 전통을 재현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한다. 타지크족의 9개월 지배, 또 다른 타지크 라바니 대통령의 2년 지배를 빼놓고는 건국 이래 2백50년 내내 파쉬툰이 아프간을 지배해 왔으며 아프간은 자신들의 통치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여러 차례 지적했다. 내 직업은 영화감독이고 내가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든 것은 보다 정확한 분석에 바탕해 영화 대본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 들어갈수록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에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자 미국은 사흘 안에 쿠웨이트를 이라크로부터 탈환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막강한 국력의 미국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사회적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채 부르카에 갇혀 있는 1천만 여성을 구해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미국은 근대 속의 이 야만을 중단시키려 하지 않는가? 힘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가? 이미 내가 말했듯이 아프간에는 쿠웨이트와는 달리 귀중한 자원도 돈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여성들**
아프간 사회는 남성 우위의 사회이다. 아프간 인구의 절반인 1천만 여성의 인권은 아프간에서 가장 소수의, 이름조차 없는 부족보다도 못하다. 아프간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없다는 것은 나중의 문제다.
탈레반 정권 이후 여학교는 폐쇄됐으며 오랜 동안 여성은 거리에 나갈 수도 없었다. 보다 비극적인 것은 탈레반 이전에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은 20명중 1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아프간 전통문화는 여성의 95%에게 교육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레반은 그 나머지 5%에게서마저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탈레반이 아프간 문화를 바꾸었는가, 아니면 아프간 문화가 탈레반 출현의 원인이었는가?
아프간에 머물면서 부르카를 쓴 여성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중고품 가게에서 쇼핑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내 주의를 끈 것은 일단의 여성들이 부르카 밑으로 손을 내밀어 꼬마들에게 손톱을 다듬도록 시키는 광경이었다. 한동안 나는 왜 이들이 손톱 다듬는 기구를 사서 집에서 쓰지 않을까 궁금했었다.
뒤에 들은 바로는 손톱 기구를 사는 것보다는 길거리 아이들에게 시키는 편이 더 싸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비록 부르카에 싸여 가난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의 아름다움에 그 정도 신경을 쓴다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나는 여성들을 그러한 환경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에 만족해 한다는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아프간 여성들은 라이벌과의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그 자신을 가꿔야 한다. 일부다처제는 젊은이 사이에서도 매우 보편적이어서 많은 아프간 가정들이 하렘을 연상시킬 정도다. 신부측 집안에 주어야 할 결혼 수당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아프간에서의 결혼이란 여자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제작 당시 만난 한 노인은 열 살짜리 딸을 신부로 내주고 받은 돈으로 자신도 열 살짜리 신부를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환을 통해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듯이 소녀들을 이 집 저 집으로 돌려 재활용하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신랑과 나이 차이가 30년에서 50년이나 되는 신부도 있었다.
이 여성들은 대개 한 집에 살며 심지어 한 방에 사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이같은 관습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영화 제작을 위해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꽤 많은 전통의상과 부르카를 이란에 가져 왔다.
집요하고도 오랜 설득 끝에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여성 중 많은 사람들이 돈 대신에 부르카를 달라고 했다. 어떤 아줌마는 딸의 결혼식에 쓰겠다며 부르카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란에서도 부르카가 유행할까 두려워 어느 누구에게도 부르카를 주지 않았다.
언젠가 한 아프간 여성들에게 영화 출연을 요청하자 이 여자들의 남편은 자신은 정조를 너무나 중시하기 때문에 아내들을 출연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부르카를 쓴 채 촬영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 남자는 시청자들이 부르카 속에 있는 것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기 때문에 정조를 더럽힌다고 대답했다.
다시 한번 나는 자문한다. 탈레반이 부르카를 가져왔나, 아니면 부르카가 탈레반을 불러 왔나? 정치가 문화를 변화시켰는가, 아니면 문화가 정치를 규정하는가? 이란의 니아탁 난민수용소에서 아프간 난민 스스로가 공중목욕탕을 폐쇄시켰다. 벽을 지나면서 벽 너머에 남성, 또는 여성이 옷을 벗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이란다.
현재 아프간에는 여의사가 없다. 만일 여성이 의사를 보려면 아들이나 남편, 또는 아버지와 함께 가 이들을 통해 의사와 얘기해야 한다.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신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나 오빠, 또는 남동생이다.
***아프간의 공격성**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의 공격성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 의한 것이며, 이 동물적 본능을 얇은 막으로 가린 것이 문명이라고 한다. 이 얇은 막은 아주 가벼운 충격으로도 찢어지기 마련이다. 폭력이란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하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폭력의 발현 양식일 뿐이다. 폭력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도대체 칼에 목이 잘려 죽는 죽음과 총알이나 수류탄, 지뢰, 미사일에 맞아 죽는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대개의 경우 공격성에 대한 비판은 사실은 공격 수단에 대한 비판이다. 세상의 부정의에 의한 1백만 아프간인의 죽음은 인간에 의한 공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내전과 소련과의 전쟁으로 인한 아프간 인구 10%의 죽음은 인간의 공격으로 간주되지 않는 반면 누군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면 며칠이고 TV의 톱뉴스로 보도된다.
물론 칼에 목이 잘리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지뢰밭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왜 똑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걸까? 칼은 공격적이지만 지뢰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근대 세계에서 아프간이 비판받는 것은 공격의 형태이지, 그 내용은 아니다. 서방은 불상의 파괴는 비극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1백만명의 죽음은 그저 통계로만 생각한다. 일찍이 스탈린이 말했듯이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백만의 죽음은 그저 통계일 뿐”이다.
내 품에 안겨 배고픔에 떨던 12살짜리 아프간 소녀를 본 이후(내 딸 한나와 동갑이다) 나는 이 굶주림의 비극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통계 숫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내가 왜 이토록 무력해졌습니까? 마치 아프가니스탄과도 같이.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끄러움으로 스스로 무너져 버린 바미안의 불상, 아니면 지금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헤랏 시인의 그 시, 그 허망한 방랑뿐이다.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간다네
돈 한푼 없는 이 이방인은 이에 돌아간다네.
인형 하나 없는 어린아이도 떠난다네.
내 방랑에 씌웠던 주문(呪文)도 오늘 밤에 풀리겠지.
텅 빈 식탁도 접혀지겠지.
고통 속에 나는 지평선을 헤맨다네.
모든 사람이 방랑하는 나를 보고 있네.내가 갖지 못한 것, 이제 두고 떠난다네.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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