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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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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3>

'무기' 빼곤 모든 것이 중세적

***근대주의에의 면역**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아프간을 통치했던 아마눌라 칸은 이란의 레자 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와 동시대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근대주의에 젖어 있었다. 1924년 그는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롤스로이스를 사 갖고 들어와 그의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개혁 프로그램에는 의상의 변화도 포함됐다. 그는 왕비에게 베일을 벗을 것을 권했고 남성 국민들에게도 전통의상 대신 서양 옷을 입으라고 촉구했다. 또 아프간의 전통에 반해 일부다처제를 금지시켰다. 전통주의자들은 즉각 아마눌라의 근대화 개혁에 반대했다. 농경부족중 어느 누구도 그의 개혁에 동조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그의 개혁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없는 근대화였다. 부족간 결혼도 금할 정도의, 일체의 공업 기반 없이 농경에만 의존하는 부족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문화를 강요한 것이었다.

그의 표피적이고 형식적이며 조잡한 근대화 개혁은 아프간 전통문화의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항원 역할을 해, 이후 수십년간 보다 합리적 형태의 근대주의도 아프간문화에 뚫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오늘날에도 근대주의의 전제조건, 즉 자원을 개발해 값싼 원자재를 세계시장에 내다 팔고 선진국의 소비재를 사 오는 방식은 아직도 형성되지 못했다. 아프간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람도 여성의 참정권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가장 진보적인 분파가 여성에의 투표권 허용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가장 보수적인 분파가 여성의 교육 및 일체의 사회활동을 불허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나아가 1천만 여성이 부르카스(베일)에 갇혀 지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일부일처제를 시행하려 했던 아마눌라의 근대화 실험이 있은 지 70년 후 아프간의 모습이다.

2001년 현재에도, 이란-아프간 접경의 난민수용소에서도 일부다처제는 아프간 여성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는 파쉬툰과 하자레의 결혼식에 각각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신랑에게 보다 ‘풍성한’ 결혼을 기원하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 나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또다른 결혼식에서 신부측 가족들은 “신랑이 능력만 있다면 신부 4명까지는 매우 좋은 것”이라며 이는 “종교적 전통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길이도 하다”고 말했다.

‘칸다하르’의 영화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사베수용소의 결혼식에 갔을 때, 2살짜리 신부가 7살짜리 신랑과 결혼하는 것을 보았다. 그 의미를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아이나, 아직도 공갈 젖꼭지를 물고 있는 여자 젖먹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아프간의 뿌리깊은 전통문화에 비추어 보건대 아마눌라의 근대화 실험은 다른 나라의 모방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부르카스를 보다 속이 잘 비치는 베일로 바꿀 경우, 신의 저주를 받아 검은 돌로 변해버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가 여성들의 부르카스를 강제로 벗겨내, 베일을 벗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눌라의 근대화 실험에는 또다른 왜곡된 관점이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위선의 문화는 계층간 갈등을 위장하고 감추는 한 방편이다. 예를 들어 이란에서 부잣집들은 집 내부는 궁궐처럼 호사스럽게 꾸미면서도 외부는 오두막처럼 허름하게 해놓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두려워해서이다. 다시 말해 핵심 귀족들은 허름한 외양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근대주의에 대한 반대는 전통조직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의 부자에 대한 반항의 형태로 표출됐다. 아마눌라 시대의 아프간 사회에서 노새 대신 말을 가지는 것은 명예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롤스로이스는 빈자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전통과 근대와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롤스로이스와 노새와의 싸움과 같았다. 그것은 빈자와 부자간의 전쟁이었다.

오늘날 아프간에서 유일하게 근대적인 물건은 무기 뿐이다. 전국토에 만연해 있는 내전은 일자리를 창출해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행동은 곧 근대 무기의 주요 시장이 됐다. 아프간은 동시대에 훨씬 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칼과 창으로 싸울 수 없다. 무기의 소비는 중요한 일이다. 긴 턱수염과 부르카스 다음으로 스팅어 미사일은, 소비와 근대문화를 뜻하는 근대주의의 상징이다.

아프간의 무자헤딘에게 무기는 일자리를 얻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다. 만일 아프간에서 모든 무기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나 서로를 공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면, 현재의 경제상황으로 보아 모든 무자헤딘들도 다른 나라로의 난민 행렬에 끼어들 것이다.

아프간에서 전통과 근대, 전쟁과 평화, 부족주의와 민족주의의 문제를 분석하려면 무엇보다도 경제 상황과 고용 위기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현재로서는 아프간 경제위기에 대한 즉각적 해결책이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장기적인 해결책은 남부가 북부를 군사토벌 한다거나 또는 그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기적에 달려 있다. 그러한 기적들이 여러번 일어나지 않았던가? 소련의 철수는 기적이 아니었나? 무자헤딘의 정권 장악은 그들 편에서 보자면 기적이 아니었을까? 탈레반의 갑작스런 국토 정복도 비슷한 종류의 기적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을까? 여기서 얘기되는 근대주의에는 2개의 근원적 문제가 있다. 하나는 경제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익은 근대주의가 초래한 아프간 전통문화의 면역력 강화이다.

***지리와 그 결과들**

아프간의 국토 면적은 약 70만평방km이다. 이중 75%가 산이고 사람들은 깎아지른 산으로 가로막힌, 좁아터진 계곡 속에서 살고 있다. 그 험준함은 자연조건의 열악함, 통행의 어려움, 경제활동의 장애를 뜻할 뿐만 아니라 각 부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적 정신적 요새로 생각하게 만든다. 아프간에는 지방간 도로가 거의 없다. 도로의 부족은 아프간을 정복하려는 전사들에게만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을 이끌어 번영을 가져올 사업가들에게도 장애가 된다.

역시 같은 이치로 아프간의 산들은 외국의 침입을 가로막아 다른 문화나 상업활동의 침투를 봉쇄한다. 국토의 75%가 산인 나라에서는 잠재적 공업도시를 위한 소비시장의 창출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농산물의 도시 반출도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근대적 무기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오래 지속되며 결말도 나지 않는다.

고대에 아프간은 중국에서 인도를 거쳐 칸다하르로 통하는 실크로드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뱃길이 뚫리고, 20세기에 항공로가 열리면서 고대의 상업루트였던 아프간은 이제 막다른 골목이 되고 말았다.

낙타와 말이 다녔던 고대의 실크로드는 근대적 도로와는 다르다. 이 구절양장의 길을 따라 나디르 샤와 알렉산더 대왕, 티무르 등이 인도로 갔다. 그 길에는 원시적인 나무 다리가 있었으나 지난 20년간의 전쟁으로 심하게 훼손됐다.

20년간의 침략전쟁과 내전을 거치면서 아마도 아프간 사람들은 어서 빨리 승자가 나타나 그 방향이 어찌 됐건, 아프간의 역사적 운명을 한 방향으로 끌고 가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산들이 방해물이 되고 있다. 어쩌면 아프간의 진정한 전사는 굶주린 아프간 사람들이 아니라 굴복을 모르는 험산준령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드 샤 마수드(9.11테러 직전 암살당했음)가 이끄는 북부동맹의 생존은 판즈쉬르 계곡이 보장해 주고 있다.

아프간이 그토록 험준하지 않았다면 소련이 쉽게 정복했을 것이다. 아니면 쿠웨이트 평원을 휩쓸었던 미국의 먹이가 되어 중앙아시아 시장에 통합됐을지도 모른다.

험준한 지형은 전쟁 비용을 늘릴 뿐만 아니라 평화시의 복구 비용도 증가시킨다. 아프간 지형이 그토록 험악하지 않았다면 아프간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운명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아프간의 지리는 불행인가?

끊임없이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전사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가 아프간 전체를 정복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군대에 보급을 위해 쉬임없이 산 정상을 정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산들은 외국의 침략자로부터 아프간을 지키기에 충분하다.

각 부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계곡들을 지켜 왔다. 일단 적이 떠나면 이들은 계곡을 세계의 전부로 생각한다. 그 산들은 그러나 농사를 매우 어렵게 한다. 국토의 15%만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며 실제로 경작되는 땅은 그 절반에 불과하다.

아프간은 그 자신의 지형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산악지역에는 길이 없으며 길을 내는 비용도 엄청나다. 설사 길이 있다 해도 군사용이거나 아니면 아편 밀수꾼들을 위한 샛길이다. 어떻게 국경 주변의 길이 아프간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국토의 대동맥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지방간 도로도 전쟁통에 파괴됐다. 누가,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험준한 산맥에 터널을 뚫어 길을 내는 비용을 대겠는가? 그 비용을 대서 이득을 창출할 근거가 있단 말인가?

아프간에는 개발되지 않은 광맥들이 그득하다고 한다. 그러나 채굴된 광물들이 어떤 길을 따라 수송될 수 있을 것인가? 불확실한 장래에나 이윤을 낼 광산 개발에 초기 투자를 할 사람은 과연 있는가? 도로의 부족이 소련인이나 아프간인의 광산 개발을 가로막았던 것은 아닌가?

반면 아프간은 수많은 샛길들의 땅이며 이는 아편 밀수꾼에게는 천혜의 지형이다. 얼마든지 골라 다닐 샛길이 있으니 이들을 단속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교차로에서 마약 밀수꾼을 기다릴 뿐이다. 이란의 셈난이라는 도시에서 아프간 밀수꾼이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는 칸다하르에서 등짐 분량의 마약을 맨발로 걸어서 운반해 왔는데 체포될 당시 발바닥 피부가 모두 벗겨졌음에도 여전히 걷고 있었다.

아프간의 산에서 물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재앙이다. 겨울에는 물이 언다. 봄에는 홍수를 이루며 여름에는 가뭄이 찾아 온다. 댐이 없기 때문이다. 통제불능의 수자원과 척박한 토양으로 농업의 가능성은 감소된다.

이것이 아프간의 지리적 초상이다. 넘기 힘들고, 경작이 불가능하며 수송비용 때문에 개발이 불가능한 광산들. 아프간을 부족 박물관, 언어 박물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험준한 지형 때문이다. 이 나라의 모든 전통은 고립과 간섭 불능으로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험악하고 메마른 나라에서 생계를 위해 아편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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