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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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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1>

"아프간이 뭡니까?"

어느 전쟁이든지 최대의 희생자는 인간이다. 무고한 인명이 살상된다는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보편적 인간성 자체도 말살되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전황에만 관심을 쏟을 뿐, 22년간의 내전과 3년간의 가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아프간인의 삶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프간은 '잊혀진 나라'다.

이란이 낳은 세계적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이 글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아프간 비극에 대한 무관심'(Limbs of No Body: Indifference to the Afghan Tragedy)은 우리들에게 아프간의 처참한 인간적 비극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저자가 지난 십수년간 아프간을 탐구한 결과 나온 이 글은 원래 아프간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지난 6월 20일 이란의 언론매체 '이라니언'(www.iranian.com)에 실렸던 것이다. 프레시안은 미국의 진보적 잡지 '먼슬리 리뷰' 11월호가 원문을 편집, 축약한 글을 번역, 6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이 글을 읽는 데는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 한 시간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과 기아로 14명이 죽어가고 있으며 또 다른 60명은 외국으로 빠져나가 난민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왜 이러한 죽음과 국외 망명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처참한 주제가 당신의 안락한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읽지 말기를 바란다.

***세계는 아프간을 어떻게 보나**

지난 해 나는 한국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다음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대답했다. 즉각 질문은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이 뭡니까?" 왜 그럴까? 어째서 한 나라가, 같은 아시아지역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이름도 낯설 정도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아프간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제 몫의 역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간은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도 아니고, 과학적 진보를 이룬 나라도 아니며 예술적 성취를 이룬 국가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중동에서는 사정이 다르며 아프간은 희한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기묘함은 그러나 긍정적 울림을 갖고 있지 않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즉각 이 이름을 밀수, 탈레반, 이슬람 근본주의, 소련과의 전쟁, 오랜 기간의 내전, 기아, 높은 사망률 등과 연결시킨다. 이같은 주관적 초상 속에는 평화라든가, 안정, 경제개발 따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곳에 관광을 가고 싶다거나 투자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어째서 이 나라는 이토록 철저한 망각 속에 방치돼 있는가? 아프간에 대한 멸시가 너무도 철저한 나머지는 언젠가는 사전에 이렇게 씌어질 날이 올 것 같다. 아프간은 모든 여성을 베일 속에 가리운 채 일체의 노출을 허용하지 않는 거칠고 공격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이 사는 마약생산 국가라고.

게다가 최근에는 아프간 내에 있는 세계 최대 불상의 파괴에 대해 전 세계의 예술 및 문화 애호가들이 아프간을 일제히 비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어째서 오가타 사다코(유엔 고등난민판무관) 한 사람을 빼놓고는 심각한 기아로 죽어가는 1백만 아프간 국민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왜 아무도 이 엄청난 비극의 원인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불상 의 파괴에는 소리내어 통곡을 하면서 배고픈 아프간 국민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하자는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현대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불상 하나가 더 소중하다는 말인가?

나는 아프간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지난 13년간 나는 아프간에 관한 영화 두 편을 만들었다.(1988년 The Cyclist, 2001년 Kandahar) 그 과정에서 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아프간에 관한 책과 문서 등 약 1만페이지를 읽었다.

그 결과 나에게는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아프간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그 이미지는 보다 복잡하고 보다 이질적이며 비극적인 그림이었다. 동시에 보다 선명하고 긍정적인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것은 망각과 억압이 아니라 관심과 주의를 요하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 비극을 바라보는 사디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유엔본부의 현관에 '모든 인류는 한몸'(All people are limbs of one body)라는 시를 쓴 사디 같은 사람 말이다.

어떤 나라의 이름과 관련되는 신문 기사의 제목은 언제나 면밀히 체크돼야 한다. 언론매체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는 한 국가의 이미지는 그 나라에 관한 사실과, 그 나라는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상상적 관념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나라가 참 좋은 나라인 것처럼 알려졌다면 그 근거가 제시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아프간에는 양귀비를 빼놓고는 외부인의 선망을 자아낼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세계 뉴스에서 아프간이 차지할 구석은 거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까운 시일 안에 아프간의 문제들이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일 아프간이 쿠웨이트처럼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이고 돈주머니가 두둑하다면 미국은 3일내에 아프간을 탈환할 것이다. 미군 동원 비용은 두둑한 돈주머니에서 지불할 수 있을 테니까.

소련이 아프간을 점령하고 있을 때, 아프간은 공산주의와 전쟁을 한다는 이유로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소련이 물러가고 해체된 지금, 어째서 미국은, 인권을 존중한다는 미국은, 1천만 여성이 교육과 사회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아프간의 현실에 대해, 수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난과 기아에 대해 아무론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가?

대답은 아프간에서는 얻어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프간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어여쁜 미녀가 아니다. 사디가 '모든 인류는 한몸'이라고 읊었을 때, 우리 시대를 말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통계로 본 아프간의 비극**

지난 20년의 기간에 대해 아프간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사실상 없다. 따라서 모든 수치는 상대적인 것이며 대략적인 것이다. 이 수치들에 따르면 1992년 현재, 아프간의 인구는 2천2백만명이다. 지난 20년간 약 2백50만명이 전쟁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죽었다. 군대의 공격, 기아, 의료시설의 부족 등이 이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매년 12만5천명, 매일 3백40명, 매시간 14명, 그리고 5분에 1명씩이 이 비극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거나 죽었다는 얘기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재수없게 핵잠수함에 갇혀 죽어가는 러시아 수병들의 소식을 인공위성 뉴스가 매분마다 전해주는 세상이다. 불상 파괴가 즉각 전세계로 전파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5분마다 1명이 죽어가고 있는 아프간의 비극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프간 난민의 숫자는 더욱 비극적이다. 보다 정확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아프간 국외, 파키스탄이나 이란에 사는 아프간 난민의 숫자는 6백30만명에 이른다.

이 숫자를 년(年) 일(日) 시(時) 분(分)으로 나누면 지난 20년간 매 분당 1명이 난민이 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숫자는 내전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구명도생하는, 즉 아프간 내 난민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인구의 10%가 사망하고 또다른 30%는 국외 난민이 됐음에도 국제사회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외면당한 나라가 있었단 말인가. 아프간에서 죽거나 난민이 된 숫자는 팔레스타인 전체의 인구와 맞먹는다. 그런데도 아프간과 언어가 같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리 이란에서도 팔레스타인이나 보스니아에 보내는 동정의 10%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프간 국경의 독하룬 세관을 지나면서 이상하게 보이는 물건과 함께 방문객에 대한 경고판을 보았다. 그것은 지뢰였다. 경고판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프간에는 24시간마다 7명이 지뢰를 밟습니다. 그들중의 하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후 나는 한 적십자 캠프에서 보다 구체적인 실상을 알 수 있었다. 지뢰 제거를 위해 아프간에 왔던 캐나다 그룹들은 그 어마어마한 실상에 실망한 나머지 곧 귀국하고 말았다. 앞으로 50년간 아프간 국토가 안전하고 살 만한 땅이 될 때까지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지뢰를 밟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토록 절망적으로 된 이유는 여러 세력과 분파들이 상대방을 견제하기 위해 지도라든가 향후 수거계획도 세워놓지도 않은 채 마구잡이로 지뢰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지뢰는 평화시의 수거를 염두에 두고 매설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아프간인들은 제 목숨을 앗아갈 폭탄을 아무데나 뿌려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큰 비가 내리면 지뢰는 원래 위치를 벗어나 이전에는 안전했던 길이 지뢰밭으로 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통계 수치는 아프간의 안전하지 못한 삶의 환경을 말해주며 바로 이 때문에 끊임없는 난민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인들도 이러한 상황을 위험으로 느끼고 있다. 언제나 기아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국외 탈출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국외 망명률이 30%라는 것은 그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남아 있는 70%중 10%는 죽임을 당했거나 죽었으며 나머지 60%는 국경을 넘을 힘이 없거나 넘었다 하더라도 주변국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된 사람들이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 때문에 외국인은 아프간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마약상이 아닌 한, 아프간에 투자하려는 사업가가 있을 리 만무하다. 정치전문가라면 아프간보다는 서방 국가를 택할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아프간의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이미 엄청난 비극을 안고 있는 이 나라의 장래에 불확실성을 더해 주고 세계의 무관심을 지속시키고 있다.

나는 헤랏 부근에서 남자, 여자, 어린이 등 2천여명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걸을 힘조차 없어 여기저기 누워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시작된 기아의 결과였다. 바로 그날 오가타 사다코가 이 현장을 방문, 세계는 당신들을 굶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3개월후 나는 이란 라디오방송에서 사다코가 아프간 전체에서 아사 위기에 있는 사람이 1백만명에 달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 불상은 누군가가 파괴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프간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이 너무도 수치스러워 스스로 망가진 것이다. '부처의 위대함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탄하며 부서진 것이다라고.

타지스탄의 두샨베에서 나는 1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남에서 북으로 뛰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마치 최후의 심판일 같았다. 세계 어느 곳의 언론 매체에서도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전쟁에 찌들고 굶주린 어린이들도 맨발로 몇십리 길을 뛰고 또 뛰었다.

나중에 이 탈주 군중들은 아프간내 적대세력에게 공격을 받았고 타지스탄으로부터도 망명을 거부당했다. 수천명씩, 아프간과 타지스탄 사이의 허허벌판에서,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그런 곳에서 그들은 죽어갔다.

***이미지를 갖지 못한 나라**

아프간은 이미지를 갖지 못한 나라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프간 여성들은 얼굴이 없다. 다시 말해 2천만명의 국민중 1천만명이 외부에 그의 얼굴을 보일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얘기다. 국민의 절반이, 그것도 같은 여성끼리도 얼굴을 보일 수 없는 나라는 이미지가 없는 나라일 수밖에 없다.

지난 수년간 아프간에서는 일체의 TV 방송이 없었다. 샤리아, 히바드,아니세 등 2쪽짜리 신문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글자만 있을 뿐, 사진은 일체 없다. 이것이 아프간의 언론매체 전부다. 회화와 사진 역시 종교의 이름으로 일체 금지됐다. 또 외부의 언론인은 일체 입국이 불허된다.

21세기 벽두의 이 시대에 아프간에는 영화제작사도 없고 극장도 없다. 예전에는 주로 인도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14개가 있었다. 또 인도 영화를 모방해 만드는 조그만 영화 제작사도 몇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매년 영화 수천편이 만들어지는 이 영화의 시대에 아프간에서는 '개봉 박두'란 말조차 사라져 버렸다. 하긴 할리우드가 아프간전쟁을 소재로 람보를 만든 적이 있었다. 영화 전체는 할리우드에서 촬영됐고 아프간인은 단 한명도 출연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외부의 장면으로 유일한 것은 람보가 출현한 파키스탄 페샤와르 장면이었는데 이나마 백 프로젝션(back projection) 기술 덕택이었다.

그것은 단지 장면의 연속성을 위해, 그리고 관객을 흥분을 자아내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국민의 10%가 절멸당하고 30%가 국외로 망명했으며 지금도 1백만명이 아사 위기에 놓여 있는 나라에 대한 할리우드의 이미지란 말인가?

러시아인들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병사의 회상기였다. 소련이 물러간 후 무자헤딘도 몇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선전용 영화였으며 오늘이나 어제의 아프간 상황에 대한 리얼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사막에서 싸우는 아프간 전사의 영웅적 모습을 담은 영화였다.

이란에서는 아프간 망명자들에 관한 영화 두 편이 제작됐다. '금요일'과 '비'가 그것이다. 나 자신도 '사이클리스트'와 '칸다하르' 등 두 편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란을 포함한 전세계 대중매체에 나타난 아프간에 관한 이미지 목록의 전부이다. TV에서도 아프간에 관한 다큐멘타리는 찾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아프간을 영원히 이미지 없는 나라로 남겨 놓기 위한 전세계적인 음모, 아니면 고의적 무관심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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