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프레시앙'이다.
지인들은 의아해 한다. 내가 왜 <프레시안>에 줄곧 기고를 하는지. 하긴, 독자들도 같은 의문을 갖는단다. <프레시안>에서 내게 연재면까지 마련해 주는 이유에 대해. <프레시안> 관계자의 귀띔이다. "글이 올라가면 전화 많이 받아요. 정부, 진보적 시민단체 등에서 항의를 하는 거죠."
사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대신 시장의 기능을 중시해야 한다고 믿는 보수적 자유주의자인 내게 <프레시안>의 진보 논조는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연재 요청을 받고도 약 1년 반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프레시안>이 이념적으로는 진보 성향을 띠지만 현존하는 정파 구도 속에서는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열린 광장'으로서 논의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반복적 요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연재를 시작한 것이 벌써 6개월 째다.
나와 <프레시안>을 맺어 준 것은 황우석 사태였다. 피츠버그의대에 적을 두었을 때다. 섀튼 교수가 황우석 박사와의 공동 연구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유를 알아 봐 달라는 <YTN> K 기자의 이메일이 시발점이었다. 나는 곧 섀튼 교수에게 추가 정보를 요청했고, 결국 피츠버그의대의 공보 담당자가 보내 준 보도자료의 행간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읽었다. 그래서, 급히 기고문을 작성해 메이저 언론사의 의학담당 기자와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에게 보냈다.
강양구 기자가 수신자 명단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우연. 황우석 사태가 발생하기 몇 달 전, 나는 바이러스 오염 혈액 제제의 문제점을 규제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적이 있다. 강양구 기자도 내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해 기사를 썼고, 그 이유로 나는 강 기자의 이메일 주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프레시안>만이 내 기고문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현저히 지명도가 떨어지는 내게 메이저 언론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이들에게는 본래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꿰뚫어 볼 만한, 원칙에 근거한 '관점'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황우석 사태 내내 나는 <프레시안>에 기고했고, 그 다음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강양구 기자도, <프레시안>도, 나도 모두 황우석 사태 때문에 고생깨나 했다.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 낸 사람들 사이에는 유대감이 싹트는 법이다. 사태가 발생한 지 2년 동안 강 기자를 포함한 <프레시안> 관계자들을 직접 만난 것이 단 두 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사이에 형성된 친밀감은 확실히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프레시앙이 됐다. 그러나, 내 결정이 단순히 유대감 또는 친밀감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보수를 정의하는 방법이 여럿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돈 열심히 벌어 세금 제대로 내고, 군대 갔다 오고, 법 정확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사회의 물적 토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라는 것.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위 보수를 표방하는 인사들의 면면은 어떠한가?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모르나 세금 제대로 내는 일은 드물다. 정식으로 군 복무를 마친 경우도 흔하지 않다. 법 준수라…, 여기에 대해서는 얼굴이 화끈거려 더 말을 못하겠다. 한 마디로 '탐욕스러움' 그 자체라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보수의 올곧고 정대한 가치를 훼손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이런 문제에 애써 눈을 감는 보수 메이저 언론의 후안(厚顔)이 역겹다. 사람들의 반응은 더 절망적이다. 잘 살게 해준다니까 또는 가슴 펴고 살게 해준다니까 잘못도 부정직한 과거도 모두 없던 일이 된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겠지만, 내가 볼 때 현 집권 세력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장밋빛 미래만을 외치는 소리에 올인하도록 상황을 만든 것이다. "있을 때 좀 잘하지…"
진보와 보수라는 표피적 편가름에서 탈피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대신, 어떤 가치를 소중하게 지켜나갈지 고민하고,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적 지향에 관계없이 원칙과 정직을 체현(體現)하는 정도 언론이 필요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프레시안>은 어느 언론사보다 이 목표에 근접해 있고, 무엇보다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보수임에도 불구하고, 진보를 표방하는 <프레시안>의 후원자, 즉 프레시앙이 된 진짜 이유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내가 옳다고 믿는 원칙에 따라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의견을 밝힐 것이다.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은가? 진보를 내세우는 매체에서 발견하는 보수주의자의 글이 일으킬 묘한 자충성이.
이는 마치 협화음만으로는 음악이 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나는 기꺼이 불협화음이 초래할 긴장 역할을 자임하고 싶다. 하지만, 독자들은 불협화음이 협화음으로 해결되는 과정을 지켜 보며 즐거움 또는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프레시앙이 돼 <프레시안>을 후원할 이유가 충분하다. 독자들의 참여와 성원을 요청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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