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가 한미 FTA로 드러난 한국의 통상 시스템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 견제 받지 않는 경제 관료의 폐해 탓에 국난을 치렀던 우리는 지금 외교통상부의 '통상독재' 지배를 받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서둘러 한미 FTA 협상을 마무리하기 보다는 1년간의 협상을 통해 드러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특히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한미 FTA를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편집자>
고장 난 통상 시스템
한미 FTA를 찬성하는 국민이나 혹은 반대하는 국민이나,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수많은 불화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다. 업적 만들기에 급급한 대통령과 몇몇 통상 관료의 '폭주'로 경제를 개혁해야 할 소중한 1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미 FTA는 큰 손실을 한국 사회에 안겨줬다.
누가 여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한미 FTA 한국 측 협상 대표 김종훈 씨인가? 아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애초 그는 성실한 외교관이었지 협상가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순환보직에 의한 외교통상부의 인사 시스템에 의해서 한미 FTA 협상 대표를 맡게 됐고, 절반 가까이 되는 국민으로부터 '공공의 적'이 됐다.
진짜 책임을 질 사람은 바로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 씨다. 그가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그가 정치인도 관료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바로 한미 FTA의 문제점이 백일 하에 드러나더라도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노무현 대통령처럼 정치인이라면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심판하면 된다. 그가 관료라면 감사원을 정점으로 하는 감사 시스템을 통해 그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별정직 고위 공무원일 뿐이다. 통상교섭본부장에서 해임되는 순간 그는 떠나면 그만이다.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스템은 현재로서는 부재하다.
앞으로 한미 FTA가 김현종 본부장이 공언한 것처럼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면 김 본부장은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한미 FTA가 전 국민의 절반 가까이 우려하는 대로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고작 청문회에 나가서 "전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면 된다. 미국 변호사인 그가 대한민국의 청문회를 무서워할까?
사실 김현종 본부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같은 이른바 '4대 선결과제'를 FTA 협상 이전에 미국에 내놓고도 "그런 일 없다"고 시치미를 뚝 떼던 게 밝혀졌을 때다. 그러나 이때 노 대통령이 나서서 그를 보호했다. 대통령이 나서서 자신이 책임지겠다는데 어떻게 더 따질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고장 난 통상 시스템은 폐기돼야 한다. 앞으로도 언제든지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의 환심을 산 제2, 제3의 김현종이 등장해서 '통상 독재'라고 할 만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통상교섭본부가 청와대와 직거래하면서 마치 10년 전 외환위기 때 나라 살림을 탕진한 일부 경제 관료의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통상교섭본부, 무엇이 문제인가?
원래 한국의 통상 협상은 통상산업부(상공부)의 몫이었다. 한덕수 총리서리 역시 상공부 출신이다. 이렇게 상공부가 통상 협상에 나서면 장점이 있다. 자신이 실물 경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산업계에 지나치게 불리한 협상을 할 수 없다. 1990년대 자동차 협상이 한국의 양자 협상 역사에서 명협상으로 기억되는 데는 이런 배경도 있다.
미국은 국무부(Department of State)에서 총괄해서 통상 협상을 한다. 미국 국무부는 경제ㆍ국방ㆍ외교 등 사실상 미국을 운영하는 곳이다. 마치 악명 높던 한국 재벌의 비서실(구조조정본부)을 연상하면 된다. 한국의 외교부와는 위상이 다르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미국 국무부와 한국 외교부가 통상 협상을 하는 것이 왜 웃기는 구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의 통상 시스템이 변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외교부가 통상 협상을 전담하게 했다. (당시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이 바로 지금의 한덕수 총리지명자다. 이때 그가 했던 협상이 바로 한국 통상 협상 역사에 잘못된 협상으로 기록된 이른바 '마늘 협상'이다.)
외교부 경제통상본부가 경제 협상을 할 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외교부는 오로지 '협상 체결'만을 목표로 매진한다. 그들은 협상이 가져올 경제적 폐해를 고려할 이유가 없다. 뒤처리는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농림부와 같은 실무 부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한미 FTA의 꼴이 잘 이해된다. 외교부로서는 '퍼주기'를 하더라도 일단 협상 속도를 높이는 게 긍정적이다. 법무부, 재경부 할 것 없이 반대하던 투자자 국가 제소제가 버젓이 한국 측 제안으로 한미 FTA에 들어간 것도 이런 구조 탓이다. 노 대통령이 외교부의 '뒤'를 봐주다보니 다른 부처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한국의 외교부는 경제 협상을 할 만한 능력 있는 공무원을 육성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통상교섭본부에서 계속 특정 분야에 걸쳐 식견을 쌓고 협상 능력을 기르면 그는 언젠가는 전문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제 협상에 전념할 수 없다. 외국 주재 외교관으로 보직이 순환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김종훈 대표처럼 딱히 경제 협상에 전문성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이가 한미 FTA와 같은 중요한 협상에서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자, 생각해보자, 아무리 외무고시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한 1급 재목이라고 하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 협상가들을 어떻게 상대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벼락치기'로 안 되는 것도 많다.
당장 김종훈 대표와 비교되는 웬디 커틀러 미국 측 협상단 대표를 머리에 떠올려 보라. 오랜 관료 생활로 노회할 대로 노회한 김 대표이지만 커틀러 대표의 '협상의 기술'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지금의 외교부 통상교섭본부가 경제 협상을 총괄하는 한 한국은 모든 협상에서 100전 100패 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독자를 위해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정부는 한미 FTA 협상에서 공식 언어로 영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국제연합(UN)에 나오는 각국 대표들이 영어를 못해서 5개 공식 언어를 지정해놓고 비영어권을 배려하는 줄 아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협상에서도 이런 자국 언어를 고집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 대표는 연설하다가 기분 나쁘다는 표시를 할 때 갑자기 중국어로 말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갑자기 헤드폰을 껴야 한다. 캐나다 대표는 영어와 불어로 말하다가 미국에게 불만을 표시할 때 불어 비중을 높인다. 협상장 내부에서는 영어로 하더라도 공식 언어로 영어를 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실제 협상에는 100개 이상의 테크닉이 사용되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법이 다 동원된다. 꼭 FTA, WTO 협상이 아니더라도 환경협약, 군사협약, 문화협약 등 수백 가지의 국제 협상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지금의 외교부 산하의 통상 시스템으로 이런 전문가를 제대로 육성해서 정부가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국익'을 지킬 길이 없다.
통상독재, 이제 끝장내야
한미 FTA 협상은 2주 내에 타결이 될 수도 있고, 더 길게 '협상 제2기'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번 협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만든 통상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점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이런 통상 시스템의 문제는 한미 FTA가 체결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통상교섭본부를 해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강화시켜야 한다. 지금보다 더 많은 협상 전문가, 지역 전문가, 통역관, 분석관을 배치해야 한다.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가능하다면 미국 중앙정보국(CIA)보다 더 많은 수의 분석관과 미국 무역대표부(USTR)보다 더 세분화된 분과별 협상 시스템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통상교섭본부의 분야별 전문가들이 각 부처와 항상적으로 협조하며 큰 방향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미국처럼 기업을 비롯한 각종 이익단체와 일상적으로 교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지금처럼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에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통상 협상은 외교관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국제적인 상식이다.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의 대안은 여러 가지다. 10년 전처럼 산자부로 이관하는 방법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권한이 강화되는 총리실 산하로 이관하는 방법이 있다. 각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외교부가 통상 협상을 하는 현재의 시스템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한미 FTA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의다. 그러나 이미 노정된, 그래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은 지난 우리의 구조적 문제점을 보완하는,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한미 FTA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바로 '쇄국' 딱지를 붙이면서 이런 절박한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통상 시스템을 통해 선출되지 않은 또 책임도 지지 않을 '통상독재'로 온 국민을 1년 동안 바보로 만들었던 외교부의 손에서 통상교섭본부를 해방시키는 것이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국회를 바보로 만들었던 협상 체결 구조, 그것은 국회가 더 늦기 전에 지금 시정해야 할 일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책임 질 사람은 책임 지고,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보완해야 할 것은 보완하고, 그 기반 위에서 제대로 FTA 협상과 나머지 통상 협상들이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민주주의를 믿는가? 나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믿는다. 지금 이런 식의 한미 FTA는 전두환 대통령 이후로 한국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만난 구조적 위기다.
자, 이제 민주적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자. 그런 민주적 해법이야말로 국민 경제의 위기 탈출에도 도움이 된다.
('네가 이런 말할 자격이 있냐'고? '쇄국주의자'가 또 발목을 잡는다고?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프지만 몇 마디 덧붙이겠다. 나는 청와대에서 임명하는 '정부 대표단' 생활을 5년이나 하며, 1년에 몇 달씩 대통령 직인이 찍힌 훈령을 들고 협상장을 돌아다니던 직업 협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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