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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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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기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읽고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펴냄)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제대로 읽는 데만 족히 반년이 걸릴 거리이다. 언론 편집인의 시간관념이 그런 '긴 시간'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 소개'를 겸한 개인적 '단상'이다.

경제사상사에 대한 고급 읽을거리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 번째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간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정성진 지음, 한울출판사, 2007). ⓒ프레시안

영국 SWP 당원에게 트로츠키가 갖는 오늘날의 의미는 한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간 이렇게 영국 SWP 당원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를 소개받아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정성진의 책은 그간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따로 해야 했던 독자의 수고를 덜어 준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또 다른 장점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다르게) 트로츠키에 시선을 온전히 고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이 책(1~3부)은 경제사상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해석을 종횡무진 다루고 있다. 리카도, 마르크스, 제2인터내셔널, 레닌, 월러스틴, 브레너, 네그리는 물론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병천(강원대 교수), 신정완(성공회대 교수)도 언급된다.

19세기 이래 정치·사회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비판적으로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이 책을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 또는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 권하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책 제목만 보고 한국 경제에 대한 정치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을 기대했던 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의 방법 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펴냄)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가 계승할 트로츠키주의?

총 4부로 구성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본격적으로 트로츠키가 언급되는 것은 맨 마지막 제4부의 네 장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트로츠키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는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영국 SWP의 창당을 주도한 클리프는 20세기 트로츠키 추종자의 투쟁과 분열의 핵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정성진은 클리프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이론과 실천을 일별함으로써 이른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마지막 장(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이렇게 도출된 트로츠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이 '참여계획경제'는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등의 논의에서 따온 것이다(☞관련 기사 보기).

정성진은 이 15장에서 최근의 참여계획경제의 논의에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 비전이 아닌)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엿보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책 전체에 걸쳐서 한결같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과장이 적지 않아 눈에 거슬리곤 한다. 그 중 몇 개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이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언급은 영국 SWP와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사회주의자들 안에서나 그렇지 세계 진보 운동의 최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 파악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또 어떤가?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인식도 자의적이다.

바로 정성진이 그렇게 적대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비판을 받는 대상이 이미 '~주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온갖 흐름에 대해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 식의 비판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도 의심스럽다.

'계획경제' 집착한 스탈린의 재탕?

물론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 장상환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장상환의 '솔직한' 고백에는 사회주의를 일종의 경제학적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하려는 욕망이 보인다. 즉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제거된 계획경제만 가능하다면 사회주의가 가능할 텐데, 하는 식의 아쉬움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정성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보자.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이를 수집 분석해 전국적 및 전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

이런 정성진의 언급은 무척 당혹스럽다. 그가 되살리려고 하는 트로츠키뿐만 아니라 역사 속 대다수 사회주의자는 계산 가능성과 같은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배경, 그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주체의 역동적 형성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역동적인 흐름을 계산을 통한 계획경제의 실현과 같은 식으로 곡해한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가 아닌가? 사실 이것은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트로츠키 역시 정성진이 '경제주의'로 후퇴했다며 비판한 레닌의 신경제정책(1921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라며 과도 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세기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측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신경제정책은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할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성진이 얘기하는 '트로츠키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정성진의 책 곳곳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스탈린주의'적 문법이 보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의 경제 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한 번 바꿔보라. 스탈린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가사회주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정도로는 21세기 한국 사회 진보 이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정성진은 이 책의 원고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IS 경향의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다함께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다. 나는 한국에서 이들이 과연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정치 일정 때마다 트로츠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비판을 넘어 혐오해 마지않았을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닌,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를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정성진의 이 노작을 끙끙대며 읽은 후, 마음 한 칸이 개운치 않은 것은 과연 나 혼자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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