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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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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 없어야"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4)] 경주 최부자 집안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는 분명히 있다.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 곳곳에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노블레스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의 애국심과 용기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설명하는 서구 노블레스들의 강력한 도덕적 권위의 원천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선조들의 위대한 족적을 되새겨 오늘날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과거의 많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 중에서도 유독 근대 일제강점기의 의인들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그 분들의 행적이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임에도 상당수 후손들의 관심 밖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공헌한 부자의 전범, 경주 최부자 가문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으며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씨 집안은 권력을 멀리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자선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바치는 것으로 기나긴 부의 세습을 마무리했다. 참된 부자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만든 경주 최부자 가문은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19세손인 최국선(崔國璿, 1635~1682)으로부터 28세손인 한말의 최준(崔浚, 1884~1970)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그 부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자선 활동과 사회공헌으로 지도층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최부자 집안의 모범은 한, 두 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전통으로 전해내려 온다는 점에서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육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처신함에는 초연하게 행동하라), 둘째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대하라), 셋째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넷째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다섯째 득이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처신하라), 여섯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등이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도 되겠다. 요즘 식으로 해석하자면 정경유착은 피하라는 교훈도 될 것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지식과 최소한의 신분유지로 부는 지키되 권력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가들에게도 금과옥조 같은 교훈이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부잣집의 가훈이라면 재산을 늘리라고 가르칠 것 같은데 최부자집의 유훈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어서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수확물의 절반을 지대(地貸)로 주는 병작반수제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키웠던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윈-윈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다고나 할까.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손님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하는 수단도 되었다. 최부자집에서는 1년 소작 수입의 3분의 1인 쌀 1천 석을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손님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들이 베푼 적선의 규모를 알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소작수입의 3분의 1을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자신들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생활태도는 요즈음 졸부들의 천민자본주의적 돈 쓰기나 생활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사학자 조용헌은 그의 저작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최부자집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이러한 최부자집의 가훈을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지칭하였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의 영남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나라 일을 걱정하던 최준은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한 백산 안희제를 만나게 된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무역회사였으나 내용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 최준은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백산무역은 서울, 대구, 원산, 만주, 봉천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나,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계속 지원하다보니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최준이 상해임정에 자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경은 그를 경찰서에 수감하고 수시로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로 백산무역의 자금난은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최준은 1927년 110만 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광복 후 최준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은 물론,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과 장서류 8000 권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최준과 그의 둘째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최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윤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죄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윤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집안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치하에 국내에 있었던 자본가 집안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 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일제치하에 대지주 집안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사업을 했다는 것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재벌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준의 증손자는 현재 창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최성길(崔成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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