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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귀족'에서 '미국의 부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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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귀족'에서 '미국의 부호'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2)] 과거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사회의 상층부는 존재했으며, 그들이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도덕적 의무나 사회적 책무를 실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의 등장이 늦었을 뿐 그러한 철학의 존재는 역사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귀족들의 기부정치
  
  로마제국의 역사에는 로마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 같았기 때문에 평민들이 그들에게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일족이 모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파비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로마 귀족들의 강한 의무감을 실증하는 사례다.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공헌에도 일찍이 눈을 떴던 것 같다. 공공시설의 복구나 건축을 위해 개인재산을 희사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빈곤 퇴치나 차세대 육성을 위한 기부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놀랍기만 한 당시의 기부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오노 나나미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공공 건축물은 그 바로 북쪽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옥타비아 회랑'(포르티쿠스 옥타비아)과 카이사르가 건설한 '사이프타 율리아'였던 모양이다. 이런 공공 건축물을 복구하기 위해 티투스 황제가 먼저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 그러자 로마의 부유층도 다투어 돈을 기부했다. 공공 건축물 복구비는 모두 이런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공공사업에 돈을 기부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요즘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존경받는 사람의 의무)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 시절, 나폴리 근처의 작은 도시 아티나 출신인 엘비우스라는 인물은 고향의 진흥기금으로 4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했다. 시의회가 이 기금을 운용하여 얻은 수익금 중, 결혼하여 아티나에 정착한 젊은이들에게 1인당 1000세스테르티우스의 보조금을 주는 것이 기부조건이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부자에다 사회적 책무(이것을 후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부른다)에도 열심이었던 소 플리니우스는 북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코모 호숫가에 있는 고향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했고, 차세대 육성도 잊지 않았다. 그는 10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토지를 코모시 당국에 기증하면서, 1년에 3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예상되는 수익금을 시에 거주하는 빈곤 가정의 자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육영자금으로 쓰라는 조건을 달았다.
  
  황제가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는 수법의 달인은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어쩌면 트라야누스도 초대 황제를 본받았는지 모른다. 솔선수범하려면 왕성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점에서도 트라야누스는 충분하고도 남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트라야누스를 본받은 사람들 가운데 문헌이나 비석 등으로 그 업적이 후세에까지 남는 행운을 누린 몇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도 자금을 원조한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공공시설을 기증한 사람만 예로 들겠다.
  
  *소 플리니우스: 고향인 코모 시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
  *그의 장인인 칼푸르니우스 파바투스: 코모 시에 열주 회랑을 기증.
  *서기 113년도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고향인 코르피니오에 공중목욕탕을 기증.
  *페트로니우스 모데스투스(기사계급): 트리에스테의 반원형극장 개조 비용을 전액 부담.
  *트라야누스를 모신 해방노예 울피우스 베스비우스: 이탈리아 중부의 체르베테리 시에 학교를 기증.
  *에스파냐 출신 원로원 의원: 고향인 코르도바에 회당을 기증.
  *트라야누스의 측근 제1호인 리키니우스 술라: 고향에 이익을 주지 않는 황제를 대신하여 타라고나와 바르셀로나를 잇는 가도에 개선문을 건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원로원에 들어간 소아시아 출신 2명: 공동으로 에페수스에 도서관을 기증.
  
  도서관 기증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은, 당시의 책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야 하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서민층은 좀처럼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혜택 받은 자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후세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불리게 되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이것이 지도층인 원로원 계급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과거에 노예였다 해도, 출생지나 노후를 보낼 작정인 지방도시에 공공건물을 기증할 수 있었다. 요컨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트라야누스를 본받을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다."

  
  로마 지도층의 모범적 선행과 부의 사회 환원은 오늘날 기부문화가 최고로 발달한 미국의 기준으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그 옛날 로마 귀족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행동철학이 너무나 감동적이기 때문이며 사가(史家)가 아닌 필자로서는 그 실상을 전달하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이후 서구사회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도층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이 유럽 각국의 고유문화와 접합되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정착한 것이다. 유럽의 각 나라에는 각기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 사례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영국 왕자의 솔선수범
  
  영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영국 최대의 사립 중고등학교인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의 영웅적 사례다. 1440년 국왕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이튼 칼리지 내의 교회 건물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이 학교 졸업생 115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졸업생의 명단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이 학교는 학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튼 칼리지는 월폴(Sir. Robert Walpole), 웰링턴(Arthur Well- esley Wellington),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등 역대 영국 수상을 18명이나 배출했고 조지 오웰(George Orwell),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와 경제학자 케인즈(John M. Keynes) 같은 세계적인 인물들을 양성한 명문교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상당수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참전해 사회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했던 사례 또한 왕족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상징적인 일화다.
  
  당시 아르헨티나가 보유하였던 엑조세 미사일은 전파교란이 통하지 않는 첨단무기여서 영국 군함에 치명적이었다. 수면 위에 바짝 붙어 저공으로 날아오는 엑조세 미사일의 방향을 교란시키려면 헬기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직접 미사일의 진행 방향에 쇳가루를 뿌려 미사일이 군함으로 향하지 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유인하는 방법만이 가능했는데, 이 위험한 일을 왕실의 앤드류 왕자가 직접 담당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앤드류 왕자는 대잠수함전 같은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왕위계승 순위 4위의 왕자를 전장에서도 가장 치열하고도 위험한 곳에 배치하는 나라가 영국이고 그렇게 솔선수범하는 전통이 영국과 영국 왕실을 오랜 세월 지탱해온 힘이 아닐까.
  
  독일의 전쟁영웅
  
  독일의 귀족들 역시 전쟁터의 선봉에서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서 그 도덕적 책무를 다 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역사에는 유난히 추앙받는 귀족 출신 전쟁영웅이 많다.
  
  그 중에서도 1차대전의 영웅이었던 만프레드 폰 리흐토펜(Manfred von Richtofen)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자신이 탑승한 지휘관기가 적군의 눈에 가장 잘 띄도록 붉은색을 도색해 전투기 편대의 최선봉에서 싸우다가 적기 80대 격추라는 빛나는 전과를 남기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산화(散花)했다.
  
  가장 위대한 전투기 조종사로 알려져 있는 리흐토펜에 관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그가 이룩한 80기 격추기록은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을 통틀어 최고의 기록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이를 갱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존재는 단순히 최고의 격추기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공군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그리고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이룩한 업적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적에게는 두려운 조종사였으나, 잔인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리흐토펜은 적기가 추락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의 사격을 가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연합군 조종사들이 피격 후에도 살아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연합군 조종사들은 "모든 조종사들이 하늘에서 리흐토펜을 만나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리흐토펜이 포로로 잡혔더라면, 그와 악수 한 번 하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느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전 후 7년이 지난 1925년 리흐토펜의 유해가 기차에 실려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전 독일에는 조기가 게양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다시 애도했다. 사람들은 그를 '붉은 남작'이라 부르며 지금까지도 추모하고 있다 한다. 그의 행적은 당시 독일 정부의 필요에 의해 전쟁영웅으로 미화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귀족 출신으로서 젊은 나이임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한 공중전의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했다는 점에서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
  
  프랑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화에서 찾기보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음미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 그 자체이며 전통 속에 그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노블레스로 불릴 만한 귀족이 처음 출현한 것은 11세기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프랑크 왕국 말기에 카롤링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이 심화되며 중앙권력의 힘이 약해지자,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토지소유자들과 전사집단이 그 무렵에 귀족이라는 하나의 신분으로 통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 계기였던 989년의 샤루 종교회의는 이 새로운 지배집단에게 도덕적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다. 그에 따라 전개된 '하나님의 평화운동'을 통해 그들은 폭행과 약탈을 중지하고 싸움을 벌이지 않도록 권유 받았고, 그렇게 해서 남는 힘은 가난한 사람과 교회를 위해 쓰도록 유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리 잡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현대까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프랑스 상류층은 지금까지도 부의 일부를 사회봉사활동기금이나 자선기금, 시민운동단체의 기금 등으로 기부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는 오랜 기독교적 전통과 사회적 책무의식이 결합해 생긴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전통을 절대로 과시하지 않는다 한다. 선행을 한 사람들은 이름을 밝히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언론에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활의 일부로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기숙학교나 수녀원부속학교 등에 보내 엄격하게 검약과 절제, 성실의 미덕을 배우게 한다. 프랑스의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들은 정직하고 강한 책임감의 틀 안에서 행동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스스로 권한보다 의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찬란한 기부문화
  
  유럽에서 시작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신흥국가인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처음부터 봉건적 계급제도 없이 만인이 평등한 민주국가로 시작한 미국에는 유럽과 같은 귀족계급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정계급인 귀족의 책무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책무로 형성되었다. 또 미국에서 찬란한 자본주의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되면서 노블레스의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기업가들이 들어서게 된다.
  
  미국 기부문화의 정점에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있다. 카네기는 65세가 되던 1900년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던 자신의 철강회사를 5억 달러에 처분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막대한 자금으로 자선활동을 시작하여 여생을 '위대한 기부자'로 보내게 된다.
  
  미국에는 카네기 이후 록펠러(3억5000만 달러, 1913년), 포드(5억 달러, 1936년) 등이 부의 사회 환원을 위해 재단을 설립했고,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빌 게이츠나 테드 터너 등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현재는 5만6000여 개의 재단이 활동 중에 있다.
  
  미국의 부자들은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에 경쟁적이다. 지금까지 무려 300억 달러 가까운 돈을 기부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은 "부의 사회환원은 부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미국 부자들의 이러한 선행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이제 미국인들은 기부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체 미국인들의 98%가 어떤 형태로든지 기부에 참여하고 있고, 소액 기부자들의 기부가 총 기부액의 77%에 이르고 있으며, 그들의 연평균 기부액수가 140만 원을 상회한다는 최근의 통계가 그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카네기 이후 한 세기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기부의 전통이 부자들의 미덕이자 미국의 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이러한 나눔을 통해 과거 유럽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를 미국 사회에 새로운 형태로 정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부시 정부가 추진한 바 있는 상속세 폐지 시도에 대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데이비드 록펠러 같은 거부들이 "상속세 폐지는 혐오스러운 일"이고 "유산보다는 능력에 의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책임 있는 부자'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기부의 진정성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문화는 미국사회의 갈등을 봉합하고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는 미국을 지탱해 주는 힘은 4만2100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나 연간 4782억 달러 규모의 군사력이 아닌 기부와 봉사의 정신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조건 없이 자선사업에 내놓고 남은 인생을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이야말로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드는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현금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법인과 개인에게 모두 연방소득세를 공제해주는 미국의 세금제도도 기부문화 정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 세법은 교육과 의료, 종교, 자선기관 등에 기부금을 내는 이들에게 총소득의 50%까지 공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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