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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자기배반의 비극이란 말인가"

[기고] 서울대병원의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에 묻는다

서울대병원이 13억75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광혜원) 122주년' 기념사업이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목적으로 세운 대한의원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역사인식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국 의학의 미래상에 건설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논란의 요체다.

지난 6월 연세대 의대 여인석 교수(의사학·醫史學)가 최초로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한 후 서울대병원은 <신동아> 9월호를 통해 "식민지 역사가 부담스럽다고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비판을 일축하는 반박문을 공개했다. 연세대 의대에서 의사학을 연구하는 박형우, 여인석 교수는 7일 이에 대한 재반박문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편집자>

"서울대학교병원의 역사가 한국 의학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지난 3월, 서울대병원에서 내외에 배포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 안내책자의 첫머리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혀 있는 문장이다. 서울대병원과 무관하게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한 모든 주체들의 노력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 표현에 나타난 오만함에 대해 비판하지는 않겠다. 다만 여기서 서울대병원이라는 한 개별 기관의 범주와 한국 의학이라는 전체적 범주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는 논리적 오류에서 초래되는 불행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조선총독부 100주년 기념사업'
▲ 사적 248호로 지정된 대한의원. 이 건물은 1907년 대한의원으로 지어진 후 조선총독부 의원,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병원 본관 건물로 쓰였다. 현재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프레시안

사실 서울대병원 측이 가지는 역사 인식의 모든 문제는 상이한 범주를 혼동하여 자신들 기관의 역사를 한국의 국가 의료, 나아가서는 한국 의료 전체의 역사와 동일한 차원에서 놓고 보는 데서 유래한다. 이러한 오류는 한 시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과 한 기관의 역사를 기념하는 일이 별개의 사안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념할 수 없는 대상을 기념하면서 한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한 글에 대해 서울대병원 측에서는 필자가 '기념'의 의미를 너무 좁게 새기고 있다며 기념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새긴다면 현재 서울대 병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필자가 기념사업의 의도를 곡해하여 편협하게 한 기관의 역사와 한 시대의 의료를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한의원의 한 측면만을 부각한 것은 서울대병원이었다. 서울대 병원 측은 대한의원 기념사업을 홍보하며 대한의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의해 설립되었고 일본 군의총감이 설립의 실무를 맡았으며 '대한의원'이란 명칭 자체도 이토 히로부미가 지어준 이름이란 중요한 사실을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우리들은 식민유산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일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작업을 식민기관 설립을 기념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자처럼 식민 지배의 긍정적 측면을 학문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제식민 지배의 복합적 측면을 조명하는 일과 조선총독부 설치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골수 식민지 근대화론자라 할지라도 '조선총독부 설치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각계 인사가 참석하는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기념조형물을 만들고, 기념음악회와 기념축제(이상은 서울대학병원이 계획하고 있는 기념사업의 내용이다)를 개최할 생각은 차마, 혹은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기념'의 의미를 폭넓게 새기고자 노력하더라도 필자가 가진 언어 감각의 한계 내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가 용인하는 상식의 테두리 내에서 그런 식의 '기념'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식민유산 '반성적 성찰' 한다며 '100주년 기념'이라니

마찬가지로 우리는 식민의료에 대해 다양한 학문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서울대병원의 주장처럼 대한제국이 추진해 온 의료 분야의 근대화 의지가 왜곡된 형태로나마 실현된 것이 대한의원이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고, 식민의료를 "반성적으로 공유할 경험적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식민지 의료기관 설립을 기념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용납될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13억 원이란 거액의 국고를 들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 조형물을 만들고 기념 음악회와 한마음축제(축제가 반성의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를 여는 것이 식민유산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

대한의원에서 대한제국의 희미한 그림자나마 찾으려는 노력은 가상한 일이나 대한의원이 이미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정책의지를 '실현한'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한지, 아니면 한국병탄을 코앞에 둔 일제의 식민의료 구상을 '실현할'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한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 내에서 통감부나 총독부 설치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는 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통감부 정치의 산물인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업은 현재 "서울대병원의 역사가 한국의학의 역사입니다"라는 비뚤어진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대표적 국립병원임을 자처하는 기관에서 현실로 진행되고 있으니 이 무슨 자기배반의 비극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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