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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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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화제의 책]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관술 1902-1950>

2005년 1월 어느 날, 부평 역 광장에서는 때아닌 울음바다가 행인들의 시선을 모았다. 소설가 안재성이 1930년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를 낸 지 6개월 정도 후의 일이었다. 안재성을 손을 잡고 연신 눈물을 흘리는 이는 칠순의 할머니 이경환. 바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막내딸였다. 이관술,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해방 직후 우익 성향의 단체 '선구회'가 벌인 여론조사에서 국민이 뽑은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여운형(33%), 이승만(20%), 김구(17%), 박헌영(15%), 이관술(13%) 순이었다. 지지율로만 보면 김구, 박헌영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해방 후 가장 유명한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완전히 잊혔다. 한 칠순 할머니의 눈물은 바로 이 '망각'에 대한 '한' 때문이었다.

안재성은 그때부터 이관술의 삶을 추적했다. 안재성은 이미 이재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삶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자신이 아는 것 중 일부를 <경성 트로이카>라는 전작을 통해 복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족의 증언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대의에 헌신한 한 인간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펴냄)은 바로 그 기록이다.

부농의 장손,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이관술은 부농의 장손으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동덕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 침공이 그 계기가 됐다. 일본인 사회주의자 와다 노리히토와 함께 경성(서울)을 근거지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제동맹'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던 그는 결국 검거돼 4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간다. 50년 평생 그를 가둘 감옥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가석방된 이관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핵심인 이재유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미 김삼룡, 이현상 등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경성 트로이카'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다 붙잡힌 이재유는 당대 사회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던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다. 이관술은 해방 후 쓴 짧은 회상기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1934년 옥문을 나오니 (…)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 동지가 그립고 일본 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가장 엄혹한 10년, 빛으로 남다

이관술은 '경성 트로이카'의 핵심 활동가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이순금의 도움으로 이재유와 만난다. 경성 트로이카(1933~1934)에 이어 이른바 경성재건그룹(1934~1935), 경성준비그룹(1935~1937), 경성콤그룹(1939~1941)으로 이어지는 8년여의 눈물겨운 투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관술은 이재유가 1937년에 잡혀간 뒤에도 '오뚝이'처럼 조직을 재건해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명맥을 잇는 역할을 한다.

이 수년 간의 기록은 사실상 국내외 독립운동이 고사 상태에 빠진 당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유일했던 저항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값지다. 약 100쪽 가까이 묘사된 이관술을 포함한 이들의 저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투쟁의 맨 앞에 섰던 그는 1941년 1월 7일 결국 두 번째로 경찰에 잡힌다. 10년 가까이 계속된 조건공산당 재건운동, 즉 '경성 트로이카'는 그의 구속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의 핵심 활동가였던 이순금은 당시의 그에 대해 <현대일보> 1946년 7월 15일자에 이렇게 썼다.

"그는 항상 말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은 가장 옳은 죽음이며 사(死)를 각오한 때에는 고난도 쓰라림도 무서운 총칼도 다 극복되는 것이며 용감한 행동을 행할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투쟁하였으며 그 행동은 말과 조금치도 틀림없이 일치하였다. (…) 이 당시 오빠는 (…) 고물 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누울 땅은 없었다
▲ <이관술 1902-1950>(안재성 지음, 사회평론, 2006). ⓒ프레시안

고문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이관술은 감옥에 간 지 3년 만인 1943년 12월 가석방된다. 석 달 만에 고향에서 탈출한 그는 도피생활 16개월 만에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당시 경성콤그룹을 같이 했던 박헌영은 광주에서 이순금과 함께 도피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경성준비그룹 활동을 하다 잡힌 이재유는 결국 해방을 10개월 정도 앞둔 1944년 10월 청주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관술이 해방된 조국에서 맞은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서 이관술은 박헌영의 2인자로 불리며 당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는다. 그의 가회동 기와집은 이틀 만에 한 번씩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비밀회합 장소이자 수년간 생사도 모른 채 외롭게 싸워 왔던 과거의 동지들이 회포를 푸는 장소였다. 대중이 그를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꼽게 된 데는 해방 후 그가 이렇게 공산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관술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다시 반전된다. 아직도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지고, 그가 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1946년 5월 발생한 이 사건은 공산당이 해방 직후 총 1200만 원의 위폐를 만들어 활동자금으로 이용했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해방 후 국민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정당 공산당은 큰 위기에 빠져들고 결국 남한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다 지하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이관술이 있었다.

이 책은 3분의 1을 이 사건에 할애하면서 당시의 수사기록, 재판기록, 언론보도 등을 재구성해 사건의 진실을 좇는다. 결론은 공산당을 흔들기 위한 미국 군정과 우익 세력이 주도한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는 무관하게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대전 교도소에 갇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결국 대전의 한 골짜기에서 1순위로 총살당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장남으로 탄탄하게 열렸던 미래를 접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들었던, 바위 위의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한 이상주의자는 그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당신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관술이 살아남았더라도 그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북으로 건너간 이현상은 다시 남하해 지리산에서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국군에 의해 사살당한다. 이미 남로당의 몰락과 함께 지휘관직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박헌영이 1956년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가장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관술은 총살당하지 않았더라도 전쟁 통에 죽었거나 이현상의 운명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이관술이 잊히는 동안 그의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남한 내 유일한 혈육인 이경환은 그가 전쟁 발발 직후에 처형당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그의 정확한 기일도 모르는 채 생일인 4월 26일을 제삿날로 삼아 혼자 제사를 지내야 했다. 이경환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90년대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라도 고향 울산에 세우고자 했으나, 지역 보수단체의 반대로 비석이 뿌리째 뽑혀 땅에 묻히는 것으로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관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지켜진 이 땅에서 지금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세상일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자기 자신에만 빠져 있는 듯, 온화한 빛이라곤 느낄 수 없는 눈빛들이다.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얼굴들도 지나간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는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기분이다. 70년 전 그들도 이렇게 외로웠을까?" 저자 안재성의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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