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청와대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초기에 내세웠던 근거는 협정 체결 결과로 예상되는 무역수지의 흑자 규모였다. 청와대 측이 제시한 예상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매각했다가 재매각하려는 론스타의 부당수익 금액과 얼추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일단 논외로 하자.
정부의 의뢰로 한미 FTA 체결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추정하는 연구를 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사용된 연구방법과 모델, 추정할 때 투입된 계수들의 근거를 제시하라는 민주노동당의 요구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황우석 사태와 다르지 않다
사실 문제는 무역수지 흑자 추정액 산정에 오류가 있었는지 여부가 아니다. 어차피 KIEP가 추정에 사용한 CGE(연산가능균형) 모델 자체가 어차피 정확한 수량적 계산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판단의 출발점 혹은 기준점 정도만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이보다는 예상되는 무역수지 흑자 규모를 추정한 근거와 과정을 밝혀달라는 민주노동당과 국민 다수의 요구를 KIEP는 물론 정부와 청와대도 철저하게 무시했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청와대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무역수지 흑자 전망을 거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했던 점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황우석 사태 당시 정부가 나서서 줄기세포 연구의 경제적 기대효과가 500억 달러 이상이라고 외쳐놓고는, 정작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미 FTA는 한 번 체결되면 되돌릴 수도 없고, 어쩌면 한국경제의 미래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국제협정이다. 이런 중차대한 국제협정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부정하고 있는 현 정부가 과연 '참여정부'라는 이름표를 계속 유지할 자격이 있는가?
무역흑자 규모를 추정하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청와대가 보여 온 떳떳치 못한 태도,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현 정권의 오만한 자세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가진 자들과 주류 언론들이 한미 FTA에 대해 찬성하는 한,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저항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청와대의 태도는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으니, 더 말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일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간과할 수 없고 계속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미 FTA 체결로 인해 초래될 장기적, 구조적 효과다. 이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제기하는 비판의 초점이기도 하다. 정부는 한미 FTA의 장기적, 구조적 결과에 대해 대비하고 있는가?
청와대도 인과적, 구조적 분석의 중요성을 깨달았던지 1차 협상 직전에야 부랴부랴 관련 정부부처와 국책연구소들을 동원해서 한미 FTA가 우리나라의 교역구조와 국내 산업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은 분석보고서들은 핵심 명제가 모두 동일하다. 정부가 근거도 불분명한 예상 무역수지 흑자 규모 대신으로 이번에 내건 슬로건은 "개방을 통해 미래 전략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종 국책연구소에서 한미 FTA의 효과에 대한 구조분석의 결과로 내놓은 자료들은 미사여구와 희망사항을 나열해 놓았을 뿐 국내산업의 현황과 발전방향, 미래산업 육성을 위한 필요조건, 한미 FTA 체결에 따른 자원배분의 변화와 그 활용 및 개선 방안 등 국내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로드맵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논점회피에 사실왜곡에…
아마도 유일한 예외라고 한다면 정부가 말해온 '아시아 금융허브' 계획을 고려하고 한미 FTA 체결을 예상하면서 내놓은 '자본시장 통합법안'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국내 금융시장의 제도 및 규제에 대한 개선안이다. 하지만 정부와 청와대가 자본시장 통합법안의 입법을 통해 국내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을 몽땅 내놓고라도 추진하겠다는 '아시아 금융허브' 계획은 일방적인 희망사항이다. 이 계획의 긍정적인 효과는 고려되고 있으나, 그 부정적인 효과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아시아 금융허브' 계획은 외국의 메이저급 금융투자회사들을 국내에 유치할 수 있느냐 여부에 목을 매달고 있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는 월마트와 까르푸가 국내에 진출했다가 철수했다는 점,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올해 수익률이 국내 금융회사들보다 낮다는 점 등을 들어 금융시장 개방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리적 정당성을 강변한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분석에 근거해도 부족할 판에 정부는 맥락도 없이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이야기하는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해 국내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은 말 그대로 그 '기반'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기반 서비스 분야의 외국자본이 국내에 진출하게 된다면, 국내 관련 산업의 경쟁력 육성은 고사하고 관련 시장을 통째로 내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정부 측의 보고서들은 국내 지식기반 산업에 대한 정확한 현황 파악도 없이 근거도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최소한의 기반은 마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미 FTA의 효과가 장기에 걸쳐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중요 부문들 각각의 영역에서 진행될 국내 산업구조의 변화, 경쟁의 형태 변화, 그에 따른 자원배분의 구조적 효과를 모두 분석해야 한다. 즉 한미 FTA가 우리나라 경제에 끼칠 장기적인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교역구조의 변화, 자원배분의 변화, 산업구조의 변화, 분배 및 재생산 조건의 변화를 모두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핵심 변수가 되는 것 중 하나는 관련 국가들의 중장기 산업정책(과학기술정책 포함)의 방향이다. 항간의 오해와 달리 미국은 기술정책, 환경정책, 경쟁정책 등의 형태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산업정책을 구사하는 나라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공산당 지배 체제가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중국은 물론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21세기형 산업정책을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따라서 길게 보아 미국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나라가 FTA를 맺게 될 모든 나라들의 중장기 산업정책 방향도 한미 FTA의 장기적 효과에 대한 구조적, 인과적 분석을 할 때 핵심 변수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강변하면서도 이러한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인과적, 구조적 분석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부나 청와대가 이런 분석에 관심을 갖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논점회피 혹은 사실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 워싱턴에 가서 한미 FTA 1차 본협상을 하고 돌아온 협상대표단은 의료서비스 분야와 관련해 "미국이 원하는 것은 약가 문제일 뿐 의료시장 전반의 개방이 아니니 지나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의도적인 기만이다. 약가 결정 문제는 우리나라 의료보험 체계의 근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오 신약 기업들이 약가 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내 의료보험 재정이 파탄날 수도 있고(약가가 높을 경우), 국내 바이오 신약 기업들이 고사할 수도 있다(약가가 낮을 경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빈 공간에 미국이나 국내의 민간 의료기업들이 진입할 것이고, 이들은 결국 의료보험 시장은 물론이고 보건의료서비스 시장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정부의 협상대표단은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약가 산정의 문제가 우리나라 의료보험 체계의 근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쟁점을 호도하려 한 것이다.
한미 FTA 체결을 통해 얻어질 직접적인 효과가 지금 당장은 마이너스여도 좋다. 문제는 장기적, 구조적 차원에서 한미 FTA의 장점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 경제체제가 지속가능한 성장모델인가 여부다. 한미 FTA 1차 협상이 완료된 지금까지 청와대와 정부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질문해본다.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는 국민의 운명과 우리나라 경제의 앞날이 걸려 있는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할 자격이 있는가?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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