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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누구의 위임을 받고 협상에 나섰는가?"

김종훈, 원정투쟁단의 항의에 묵묵부답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본협상의 첫날인 5일 김종훈 한국측 수석대표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미 FTA 반대 반대 원정투쟁단'이 이날 오전협상을 마치고 미국 무역대표부 건물을 나서던 김 대표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원정투쟁단은 그에게 소나기 같은 질문공세를 해댔다.

"당신은 누구의 위임을 받고 협상에 나섰는가?", "노동자, 농민을 팔아먹는 한미 FTA 협상을 왜 하는가?", "한미 FTA 협상이 정말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협상 내용은 무엇인가?"

원정투쟁단의 질문은 김 대표가 차량에 탑승한 뒤에도 이어졌다. 원정투쟁단의 주제준 상황실장은 마이크를 통해 김 대표에게 입장을 표명할 것을 촉구했고, 원정투쟁단의 일부 단원들은 김 대표의 차량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나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 원정투쟁단이 5일 오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건물 앞에 집결해 FTA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 프레시안

김종훈 대표의 입은 시종일관 굳게 닫혀 있었다. 원정투쟁단은 "우리도 국민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 아닌가?", "우리의 목숨 줄이 달린 한미 FTA 협상이다. 오늘 이야기한 내용은 뭔가?"라고 외쳤지만 차량에 탑승한 김종훈 대표는 내내 앞만 주시했다.

'신자유주의 반대, 한미 FTA 저지 재미위원회'의 김동균 목사는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어떻게 한 마디도 없느냐"고 김 대표를 추궁했다. 오종렬 원정투쟁단 단장도 "일부러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협상 내용이 궁금할 뿐이다. 잠시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협상 내용을) 이야기해 달라"고 다그쳤다.

20여 분간의 실랑이 끝에 원정투쟁단은 결국 길을 열
어 김종훈 대표를 보내주기로 했다. 주제준 상황실장은 "우리는 평화시위를 하러 왔다"며 김 대표의 차량을 막고 있던 일부 원정투쟁단 단원들에게 자제를 요청했다. 김 대표가 탄 차량은 원정투쟁단이 열어준 길로 휭 하니 가버렸다.

이에 앞서 김 대표는 오전협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의 즉석 질문에 간단한 답변을 했다. 한미 FTA 1차 본협상을 위해 미국에 온 한국측 협상대표가 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불과 2시간밖에 하지 않았다. 깊은 이야기가 오갔겠느냐. 12개 분과로 나뉘어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아직 전반적 진행상황을 말하기 힘들다."
▲ 한국측 협상대표단이 미 무역대표부 건물로 들어가면서 원정투쟁단이 있는 곳을 건너다보고 있다.

그는 원정투쟁단의 활동에 대해서는 "협상장까지 매우 시끄러웠다"면서도 더 이상의 말은 아끼는 태도를 취했다. 원정투쟁단이 협상장소인 미 무역대표부 건물 바로 앞에서 2시간 여 동안 목이 터져라 외친
'다운 다운 에프티에이 (Down Down FTA)', '다운 다운 유에스티아르 (Down Down USTR)' 등의 구호가 협상장까지 들렸다는 얘기였다.

한 기자가 '미국측 초안이 강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협상장 분위기는 어땠냐'고 묻자 김 대표는 "우리의 협상초안 역시 강경하긴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그는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원정투쟁단까지 여기 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한미 FTA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있다"라며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원정투쟁단은 이날 오전 내내 미 무역대표부 주변을 오가며 한미 FTA에 반대하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 구호를 외치다가 힘이 부치면 풍물패가 등장해 흥을 돋웠다. 한 원정투쟁단 단원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형상화한 가면을 쓴 원정투쟁단 단원이 춤을 추기도 했다. 이에 광우병 소를 상징하는 탈을 쓴 보건의료노동조합 조합원도 함께 춤을 췄다.
▲ 오전협상을 마치고 나온 김종훈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프레시안

이날 시위에는 50여 명의 원정투쟁단이 참여했다. 전날 거리행진을 함께한 국제단체 회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본협상이 시작된 날인 민큼 원정투쟁단은 전날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시위를 진행했다.

이날은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이어서 거리에 행인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원정투쟁단이 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피켓과 이들이 거리에서 펼치는 퍼포먼스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몇 미국인들은 원정투쟁단의 시위를 바라보며 한미 FTA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날도 워싱턴 경찰은 시위에 간섭하지 않았다. 원정투쟁단이 미 무역대표부 건물 앞에서 2~3시간 동안 내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경찰로부터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관공서 앞에서 조금만 높은 목소리가 나도 전투경찰이 곧장 배치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원정투쟁단이 김종훈 한국측 수석대표의 차량을 한때 막아서면서 경찰이 간섭할까 우려되기도 했지만, 이런 행동에 대해서도 이곳 경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김종훈 대표가 탄 차가 원정투쟁단이 터준 길로 달려가고 있다. ⓒ 프레시안

다음은 이날 오전 미 무역대표부 건물 앞에서 원정투쟁단이 거리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인 또는 비한국인 시위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한 발언들이다.

"어제(4일) 여러분들이 기막힌 행진을 할 때 한 미국인이 나에게 물었다. '한국인들의 시위에 당신은 왜 참여하는가?'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여기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내가 일하는 단체는 반전에 동의하는 미국 여성들의 모임이다. 폭력을 추방하고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처음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나는 믿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을 믿는 게 아니고, 의회를 믿는 것도 아니다. 민중이 일어서야만 전 세계의 군사화와 식민화를 막을 수 있다. 우리의 힘을 믿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 어머니들의 모임인 반전어머니회(Code Pink)의 한 회원)

"우리는 악의 중심에 서 있다. 둘러보라. IMF, USTR, 백악관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한국이 약값을 조정할 수 없다고 들었다. 이 점만 봐도 미국 정부가 한미 FTA를 통해 뭘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은 가장 부유한 국가다. 하지만 460만 명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모든 보건의료 서비스가 상품화됐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보건의료 서비스는 국민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거대 제약회사와 사립 병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 원정투쟁단의 한 단원이 차에 탄 김종훈 대표에게 "왜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느냐. 당장 서울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있다. ⓒ 프레시안

민중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는 나라는 비양심적이다. 그 연장선에 있는 FTA는 땅에 묻어야 한다. 한국 민중은 자결권을 가져야 한다." (반전 평화운동 조직인 앤서(ANSWER)의 베커 대표)

"내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10여 년 전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간에 체결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의 피해를 고스란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미 무역대표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가난한 사람을 더 빈곤하게 하고, 부유한 사람을 더 부자로 만드는 것밖에 없다. 라틴계 아메리카인들은 FTA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잘 안다." (이모칼리 노동자연합(Coalition of Immokalee Workers)의 회원인 프랜시스 콜테즈)

"100년 전에 을사늑약이 있었다. 100년 전 일이 오늘 재연되고 있다. 100년 전 우리 선조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후손들에게 비판받는 선조가 되고 싶지 않다. 을사늑약이 재연돼서는 안 된다. 끝까지 투쟁하겠다. 다짐한다." (재미위원회의 김동균 목사)
▲ 투자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미국인 2명이 원정투쟁단이 들고 있는 론스타 비판 피켓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프레시안

"2일부터 지금까지 원정투쟁단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
을 말하겠다. 나는 항상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한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주인의 말도 안 듣고 나라를 팔아먹는 저들(한미 FTA 한국측 협상단)은 나쁜 놈들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많은 민중이 핍박받았다. 그것을 회복하는 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고, 이봉창 의사는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했다. 보는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그들이 독립운동가였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 선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찾는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선조 독강화수 수석부위원장(민주노총 IT 연맹)립운동가들과 비슷하다. 나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원정투쟁단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IT연맹 수석부위원장 강화수)
▲ 원정투쟁단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한국에 강요하는 부시 미 대통령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프레시안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정이 많고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농민들은 더욱 그렇다. 여기서 시위하는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농민들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에게 6월은 무척 바쁘다. 그런데 왜 농민이 이 자리에서 목이 터져라 '한미 FTA 반대'를 외쳐야 하는가? 나는 나락 하나를 생산한다는 심정으로 원정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충실히 농사를 지으면 나락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성실히 원정시위를 하면 뭔가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먹거리를 빼앗기고는 누구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 경기지부의 강우현 회장)

한편 원정투쟁단은 이날 오후에는 워싱턴 DC 일대를 돌면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선전물을 돌렸고, 저녁 8시부터는 라파예트 공원에서 촛불집회를 가졌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던 현지인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원정투쟁단 단원들이 둥글게 서서 서로 촛불을 나눈 뒤 그 촛불을 들고 집회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부 현지인들은 디지털 카메라로 촛불시위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고 밝힌 한 현지 시민은 "이런 시위는 처음 봤다"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촛불을 밝히고 있느냐"라고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원정투쟁단은 촛불을 들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광야에서' 등 민중가요를 불렀다. 국제 반전·반세계화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은 민중가요를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함께 어울리는 데는 어색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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