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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황우석 스캔들'에서 '신뢰회복책'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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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황우석 스캔들'에서 '신뢰회복책'을 배운다"

[제언]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면…

어제 노성일 이사장의 폭탄발언을 계기로 황우석 교수의 논문 진실성을 둘러싼 우려가 사실상 현실로 드러났다.

그간의 논란 과정을 쭉 되짚어 보면, 크게 보아 〈사이언스〉가 검증했으니 문제 없다는 입장과 〈사이언스〉 같은 학술지는 연구자의 정직성을 전제로 해서 제출된 자료만을 심사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모양새를 띄어 왔다. 이 중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2002년 가을에 드러난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기만행위 사례를 들어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저명한 저널도 종종 '실수'를 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관련 기사 바로보기)

다소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공방을 계기로 쇤 사건과 같은 과학에서의 기만행위 사례에 관심이 커진 것은 앞으로의 연구윤리 논의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쇤 사건은 기만행위에 대처하는 제도적 장치가 이미 잘 갖춰져 있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던 한국의 상황에는 사실 썩 잘 들어맞지 않는다.

***헤르만-브라흐 사건 : 과학 선진국 독일의 '황우석 스캔들'**

필자가 생각하기에 황 교수 사건으로부터 한국 과학계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쇤 사건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에 독일에서 있었던 일명 '헤르만-브라흐 사건'이다. 이는 유전자 치료와 암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두 명의 분자생물학자 프리드헬름 헤르만(Friedhelm Herrmann)과 마리온 브라흐(Marion Brach)가 공저한 수십 편의 논문에서 기만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독일 과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다.

헤르만-브라흐 사건의 발단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르만은 독일 통일 후 동베를린에 세워진 국가연구센터인 막스 델브뤽 분자의학센터(MDC)에 실험실 공간을 얻어 20여 명의 과학자들로 연구팀을 조직했는데 브라흐는 팀에서 네 명의 그룹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줄곧 공동 연구를 하다가 1996년 초에 헤르만이 울름대학에, 브라흐가 뤼벡대학에 각각 정교수 자리를 얻어 베를린을 떠났다.

두 사람의 기만행위가 드러나게 된 것은 1997년 초, 그들의 연구 데이터 중 일부가 조작됐다는 의심을 품은 베를린 연구팀의 한 박사후 연구원이 이 사실을 멀리 뮌헨에 있던 자신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에게 상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도교수는 이 사실을 막스 델브뤽 센터, 울름대학, 뤼벡대학에 각각 알렸고, 고발 내용을 추궁당한 브라흐는 자신이 헤르만과 공저한 4편의 논문에서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실토했다.

그녀는 서로 연관이 없는 방법론을 사용한 서로 무관한 실험들에서 나온 이미지 파일들을 "뒤섞고 잘라 붙여" 새로운 실험 데이터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헤르만 역시 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헤르만은 베를린에 있을 당시의 연구 프로젝트는 네 명의 그룹 책임자들에게 일임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조작의 모든 책임을 브라흐에게 돌렸다.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막스 델브뤽 센터, 울름대, 뤼벡대는 각각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각각의 대표들이 모이는 국가 차원의 조사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헤르만과 브라흐의 실험실로 들어가던 연구비 지급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즉각 중단되었다. 이들 위원회는 헤르만과 브라흐가 쓴 다른 논문들의 조작 여부를 조사했고, 결국 두 사람이 공저한 37편의 논문들에서 데이터가 조작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most probably)"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브라흐는 1997년 9월 뤼벡대에서 파면되었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던 헤르만은 다음해 9월 스스로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998년 4월 독일연구재단(DFG, 미국의 국립과학재단 NSF에 해당하는 연구비 지원기구)은 이 사건의 파장을 좀 더 완전하게 평가하기 위해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다. 이 팀은 조사 대상을 넓혀 1985년부터 1996년 사이에 헤르만이 저자로 들어간 347편의 논문을 조사한 후, 2000년 6월에 이 중 94편의 논문(브라흐와 공저한 53편 포함)이 조작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문제제기 못한 독일 젊은 연구자들이 사태 악화 '원인'**

이 사건은 독일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독일 과학자들은 기만행위의 엄청난 규모에 경악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사실이 너무나 늦게 밝혀졌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이 사건에서 베를린 팀의 젊은 연구자들은 헤르만과 브라흐의 데이터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상당기간 동안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앞날이 위협받을까 두려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이 사건 이전에는 독일의 연구기관이나 지원기관 중 과학에서의 부정행위 고발 처리에 관한 공식 지침을 갖추고 있는 곳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젊은 연구자들이 자신의 신원을 보장받으면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적절한 창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독일에서 기만행위와 연구윤리 문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가 정비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먼저 독일 내 73개 기초연구기관을 관할하는 막스플랑크연구회(MPS)는 1997년 12월, 부정행위로 의심되는 사건이 생겼을 때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내부 규정을 승인했다. 이에 따르면 MPS 산하 연구기관에서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을 때, 해당 기관의 소장은 내부고발자의 신원을 보호하면서 즉각 기관 내에서 비공식 조사를 실시하고 MPS의 연구담당 부회장에게 이 사실을 비밀리에 알려야 한다.

부정행위 고발을 당한 사람은 2주간 소명의 기회가 주어지며, 이로부터 다시 2주 내에 공식 조사가 발족될지 여부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 공식 조사가 발족되는 경우 이는 새로운 상임위원회가 담당하게 되는데 MPS 이사회에서 선출되는 조사위원장은 MPS나 그 산하기관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조사위원회는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처벌에 대한 권고안을 낼 수 있고, 가능한 처벌 방법은 단순 경고, 연구비 환수, 파면,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검찰에 대한 고발 등이 포함된다. MPS 회장은 이 중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기회'를 '위기'로…연구윤리 프로그램 마련돼**

아울러 MPS 이사회는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연구윤리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소수의 과학자를 잡아내는 것보다 부정행위의 예방이 더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믿음을 반영하여, 실험 노트를 정리하는 올바른 방법, 논문의 저자를 결정하는 기준, 논문에 대한 기술적 기여를 인정하는 기준 등의 쟁점들과 연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교육하게 했다.

2000년 12월에 MPS는 산하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들에 대해,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지침을 지키겠다는 동의서에 대한 서명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규정은 연구자들이 10년간 실험 자료를 접근 가능한 형태로 보관해야 하고 논문에 쓰인 실험 프로토콜이 복제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또한 논문에서 명예 저자표시(honorary authorship)를 불허하고 젊은 과학자들이 적절한 지원과 감독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한편 대학연구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DFG 역시 위원회를 구성해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지침을 마련했다. 대학은 좋은 과학 실천의 규칙들을 교육해야 하며, 대학마다 옴부즈맨(민원조사관)을 두어 의심이 가는 과학 실천이 있을 때 젊은 과학자들이 상담할 수 있는 독립적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DFG는 이러한 지침의 강제를 위해 2002년까지 규정을 갖추지 못한 기관에게는 DFG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엄포를 놓았고 이는 실효를 거두었다. 아울러 DFG는 각 대학의 옴부즈맨 외에 자체적으로 세 명의 상임 옴부즈맨을 따로 두어 지방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담당하게 했다.

***과학계 자정 능력 상승의 기회로 삼자**

헤르만-브라흐 사건에 대한 독일 과학계의 대응과정과 이로부터 촉발된 제도적 변화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독일에서는 내부고발 이후 관련 연구기관들 모두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국제 과학계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서울대가 황우석 교수의 요청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을 뿐, 미즈메디병원이나 한양대병원 등의 여타 기관들은 그런 움직임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 과학계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며, 지금부터라도 즉각 모든 관련 기관들에서 사건의 경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또한 독일의 전례에서 볼 수 있듯, 황우석 교수의 논문 진실성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를 다루고 젊은 연구자들에게 연구윤리를 교육할 과학계 내부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문제 역시 중요하다. 지난 한 달여 동안의 사건 진행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는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면서 기만행위의 고발을 접수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대학이나 연구소, 지원기관, 정부부처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국의 전례들을 참고해 과학에서의 부정행위를 조사하는 표준적 절차와 담당기구를 대학 등의 연구기관이나 지원기관에 만들 것이 요구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행정관청(미국 보건복지부 산하의 연구윤리국 ORI가 그런 예다)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아울러 대학(원)에서는 훌륭한 과학 실천을 구성하는 주요 내용을 지침으로 만들어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에게 교육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들 제도의 마련은 이번 사건을 통해 크게 흔들리고 의심받은 한국 과학계의 자정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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