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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팔레스타인, 체첸 다음은 한반도?"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23ㆍ끝> 코리언 디아스포라 아트

***에필로그 : 코리언 디아스포라 아트**

파울 첼란이 태어나 자란 부코비나라는 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제국의 붕괴와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격랑에 몇 번이나 휩쓸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과 루마니아로 분할되고, 소련이 붕괴한 뒤에는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로 양분된 상태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신흥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계분할 전쟁에 합스부르크, 오스만터키, 러시아, 중국(청)과 같은 전근대 대제국들이 잇달아 몰락했다. 두 번이나 파국적인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국가들의 경계는 크게 변해 그때마다 주변의 인간들은 국가의 틀 안에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거듭했다. 경계란 그저 지리상의 국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 국민국가가 국어 이데올로기와 불가가분의 것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여러 언어의 경계에서 우왕좌왕하게 되었으며, 여러 언어의 균열을 개인의 내면에까지 끌어안아야 했던 것이다.

일본이 과거에 행한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의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강요당했다. 일본은 조선 식민지 지배에 있어 교육칙어에 따라 조선 사람을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아, 그 중심에 국민교육, 즉 일본어 교육을 놓았다. 조선어를 모어로 하는 약 2000만의 사람들의 국어가 하룻밤 사이에 일본어가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교육목표를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의 육성으로 정해 조선어 교육의 전면적 금지, '황국신민의 서시(誓詞)' 암송, 궁성요배ㆍ신사참배의 엄수, 창씨개명 등의 '황민화 정책'을 강행했다.

이 시대에 학교교육을 받은 세대의 많은 조선 사람들은 모어인 조선어와 국어인 일본어에 몸이 분열되어 살았던 것이다. 한편 재일 조선인 2세인 나는 자신의 모어가 과거의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본래 모어여야 할 조선어를 빼앗긴 상태라는 것을 늘 거북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 *

2000년 11월 27일과 28일 내가 재직하고 있는 도쿄게이자이 대학에서 '디아스포라 아트의 현재'라는 국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목적은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에서의 '문화'의 단절, 계승, 변용, 발전의 양태를 '디아스포라'와 '아트'라는 측면이 교차하는 장으로서 고찰한다"는 것이었다.

심포지엄의 시선은 주로 코리언 디아스포라에게 집중되었다. 과거 한 세기 동안에 조선반도에서 세계 각지로 이산하게 된 조선인들, 재일 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보내진 구소련의 '고려인=카레이스키', 현재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재미 코리언, 1960년대에 당시의 서독 정부가 정책적으로 받아들인 이주노동자의 자손으로 현재 독일에 사는 수만 명의 코리언,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국제입양의 결과 현재 20만 명 이상에 이르는 재외 코리안 입양자들. 이 전부를 합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총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에 간호사로 독일에 가 그곳에서 미술을 배워 아티스트가 된 송현숙, 재일 조선인 여성인 오하지, 황보강자,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 미술과 연구생 세 명, 이 글의 2장에서 언급한 다카야마 노보루, 그리고 본 심포지엄의 아트디렉터 시마다 요시코 등. 심포지엄에 참가한 다채로운 아티스트들 각각의 작품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많지만 지면사정상 그건 어려운 것 같다.

그 중 한 사람인 미희 나탈리 르므완느는 태어난 지 얼마 후 벨기에에 양자로 가 프랑스어를 모어로 해 자랐다. 백인사회에서 성장한 많은 코리언 양자들은 양부모나 지역사회의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차별에 시달린다. 자신들의 노란 얼굴은 "부모로부터도 나라로부터도 버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낙인"이라고 하는 양자가 있었다. 미희도 역시 자신의 출신을 앎으로써 존엄을 회복하고 싶다고 갈망해 16세 때 양부모의 가정을 나왔다. 자립해 생활을 하면서 예술을 배워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 작품에는 코리언 양자가 베트남 풍의 밀짚모자를 들고 등장한다. 그것은 조크나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 자신이 그 시점에서는 조선 문화와 베트남 문화의 차이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93년 이후 서울을 거점으로 한국에서도 단순히 '외국인'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국제입양자들의 권리 획득 운동을 계속해왔다. 그녀는 자신의 이와 같은 경험을 '국가', '인종', '문화'라는 세 국면의 인종차별과 벌이는 싸움이라고 규정한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코리언 디아스포라전의 큐레이터였던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교 교수 민영순. 그녀의 대표작은 자신의 몸에 1950년의 '조선전쟁(6ㆍ25)', 1960년의 '4월혁명(4.19)', 1980년의 '광주항쟁', 1992년의 이른바 'LA폭동'과 같은 '결정적 순간'의 영상을 투영한 것이다.

강한 인상을 남긴 작가를 한 사람 더 들면 캐나다 거주의 데이빗 강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이민을 간 강은 이주한 캐나다에서 심리학, 신학, 건축, 치과학을, 그 후 한국에 와 서도와 미술을 배웠다. 그의 퍼포먼스는 소의 혀를 입에 물고 그것을 붓과 같이 사용해 지면을 손과 발로 기어가면서 긴 흔적을 그리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이 퍼포먼스에 붙인 한 마디는 지극히 간단하다. "아트, 언어, 문화의 관계와 그들의 관계의 역사적이며 정치적 의미를 파헤치고 싶다."

11월 27일 오후 3시, 50명 정도의 관중이 주시하는 가운데 상반신을 드러낸 데이빗 강은 자신의 입 가득 소의 혀를 넣어 단단히 물었다. 소 혀라고 해도 날 것으로, 무게는 2, 3㎏는 족히 된다. 그 혀에 먹, 모터오일, 케첩을 섞은 액체를 가득 묻혀 캠퍼스의 중정에 길게 깔린 종이 위를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입이 막혀 있는 만큼 호흡도 힘들다. 전신에서 땀에 솟는다. 퍼포먼스는 금세 고행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혐오감을 나타내거나 웃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보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삼키고 주시하고 있다.

사실 데이빗 강을 심포지엄에 초청하는 것에 대해 "단지 별난 악취미가 아닌가"라고 의구심을 표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부르고 싶다는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하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김하일은 재일 조선인 1세의 시인이다. 1926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나 먼저 일본에 가 있던 아버지를 찾아 39년에 일본에 왔다. 과자공장에서 일하면서 야학에 다녔는데 1941년에 한센병이 발병해 국립요양소에 수용되었다. 해군 군속으로 소집된 큰 형은 전사했다. 해방 후 가족과 친척 가운데는 한국에 귀환하는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군마현의 구리오 요양원에서 고독한 격리생활을 보냈다.

"지문 찍을 손가락이 없어 외국인 등록증에 나의 지문이 없어"

김하일의 이야기다. 1947년 외국인 등록증이 발급되어 재일 조선인과 타이완 사람 등 구식민지 출신자는 아직 일본 국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외국인으로 간주'되었다. 그에 따라 등록증에 지문날인을 하는 것이 의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김하일의 경우 병으로 손가락을 잃어버려 지문을 찍으려고 해도 찍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외국인'으로 간주된 결과 재일 조선인은 국민연금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일본 복지정책의 틀 밖으로 밀려났다. 그 때문에 일본인과 김하일과 같은 재일 외국인 사이에 부당한 대우상의 격차가 생겨났다. 같은 요양소의 환자이면서 한편은 부식에 계란과 설탕을 먹을 수 있는데 다른 한편은 못 먹는 것이다.

김하일은 1949년에 양쪽 눈을 실명했다. 1952년에 점자를 혀로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센병 환자의 대다수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잃어버리며, 악화되면 그 손가락조차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점자도 손가락으로는 읽을 수 없어 아직 감각이 남아있는 혀끝으로 읽는 것이다. 그 처절한 연습의 모습을 김하일 자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어의) 50음을 점자로 쳐달라고 해 혀로 핥아보았지만 어쨌든 처음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계속 하고 있으면 어깨는 결리지, 눈은 빨갛게 충혈되지, 눈물은 뚝뚝 떨어지지, 침은 나오지, 종이는 금세 끈적끈적해져요. 그래서 젖어도 점자의 점이 지워지지 않는 종이인 거지요. 예를 들자면 그림엽서라든가, 달력의 표지라든가 말이지요, 그런 종이에 점자를 쳐주면 처음엔 매끌매끌하던 게 조금 있으면 딱딱해져 구멍이 난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 (혀를 내밀고 고개를 흔들며) 젖어서 미끈미끈해져요. 언제나처럼 침이겠지 하고 핥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 사람이 보고, 어어 이 봐, 피가 나와 하는 거예요. 혀끝에서 피가 나오는 거지요."

혀를 피투성이로 만들면서 김하일이 익힌 것은 일본 점자뿐만이 아니었다. 그 후 그는 조선어 점자도 같은 방법으로 배웠다.

"점자역의 내 나라 조선의 민족사 오늘도 혀끝이 뜨거워질 때까지 읽었노라."

재일 조선인이라는 것, 그리고 한센병 환자라는 것 때문에 이중의 차별을 받아왔다. 국가에 의해 이유 없는 강제격리까지 당했다. 가족과 형제를 빼앗기고, 조선말을 빼앗기고, 시력을 잃고, 손가락까지 잃었다. 그 당사자가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피나는 노력으로 문자를 습득해 스스로의 역사를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언어를 획득한 것이다.

모어의 공동체로부터 떼어져 다른 언어 공동체로 유랑해 간 디아스포라들. 그들은 새롭게 도착한 공동체에서 항상 소수자(마이너리티)의 지위에 놓여져, 거의가 지식과 교양을 익힐 기회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곤란을 극복하고 언어를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소비하는 권력은 언제나 다수자(머조리티)가 쥐고 있다. 그 호소가 머조리티에게 편안한 것이라면 상대해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차갑게 묵살당하는 것이다.

김하일의 아직 끝나지 않은 고난의 나날들. 유랑하는 디아스포라들의 고난의 나그네 길을 나는 데이빗 강의 퍼포먼스를 보며 연상했다. 데이빗 강이 기어 앞으로 간 거리가 40~50m쯤에 이르렀을 때 누구나 거기서 퍼포먼스가 끝난다고 생각했다. 보고 있는 쪽이 긴장에서 풀려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방향을 바꾸어 긴 거리를 기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깨와 배가 고통으로 파도치는 움직인다. 기어 지나간 뒤에는 피로 그린 것 같은 흔적이 중간중간 끊어진 듯이 남아간다. 보고 있던 한 사람의 여성이 눈물어린 눈으로 작게 말했다. "아 이제 그만해요……."

이라크, 팔레스타인, 체첸, 수단 등 세계의 여러 곳에서 불합리한 파괴와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쟁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또 새로운 디아스포라가 태어날 것인가.

울면서 황야를 가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환상처럼, 내 시야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번역 : 김혜신(가쿠슈인대 강사, 미술사)

(지난 7월 시작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의 연재를 종료한다. 일본 이와나미에서 나온 같은 제목의 책을 번역ㆍ전재해온 이 연재는 내용과 사진 등이 보강돼 돌베개에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가제)에서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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