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왜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왜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초록 대안' 농업<11> 삶의 위기, 행복의 조건

"행복하세요!"

우리는 '행복'이란 단어를 인사말에 잘 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임에도.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삶의 목적인데도. 상대를 축복하는 인사도 그렇지만 나 자신을 축원하거나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표현하는데도 인색한 듯하다. 너무 소중하여 입 밖에 내기에 조심스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행복의 그 뿌듯함을 느낄 겨를이 없어서일까?

다가서면 저만치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인지 행복을 기원하기보다는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단과 경로를 인사말로 주고받는다. "건강하세요, 좋은 성과 있길 바랍니다, 부자 되세요" 등등. 하지만 건강과 성공과 돈도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세요?"라는 물음에 여러분은 어떤 대답과 반응을 보이실지….

얼마나 행복한가를 묻는 이런 저런 국가별 비교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는 중간을 밑돈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불평, 특히 시간이 없다는 불평이 많아진다는 지적도 있고, 국가의 행복지수가 소득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많이 있다.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왜 우리는 충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영국의 심리학자와 상담사가 창안했다는 이른바 '행복지수'는 인생관이나 적응력 등 개인 특성(P), 건강과 돈, 안전, 선택의 자유, 공동체 의식 등 생존 조건(E), 그리고 자존심이나 자아 실현, 기대감 등 고차원적 욕구(H)를 행복의 요소로 삼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조사와 점검을 하여 '행복=P+(5×E)+(3×H)' 라는 공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개인 특성에 비해 고차원적 욕구는 3배, 생존 조건은 5배 더 중요한 행복의 요인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행복을 측정하고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단순한 공식으로도 왠지 허전하고 충만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실상을 점검해 볼 수도 있겠다.

판화가 이철수님의 정갈한 그림이 새겨진 선물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제목이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삼인, 2004)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가까이 있는 행복, 일상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마음이 인다. 그런데 점심 때 식당에서 받아든 밥을 먹노라면 감사의 마음과 행복의 느낌보다는 이 밥이 어디서 자라나 어떻게 내 앞에까지 놓이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며 밥알이 뱃속으로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밥 한 그릇에 배부르고 등 따시면 절로 행복해야할 터인데 뱃속도 머릿속도 편치가 않은 것이다. 그럴 때는 식당 아주머니의 손길마저 정성으로 여겨지질 않으니 과도한 예민함 때문일까?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1월말 발표한 국가별 환경지속성지수(ESI)에서 우리나라는 146개 나라 가운데 122위로 밑바닥에 머물러있다. 국민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 지표에서는 124위, 국내총생산(GDP) 대비 에너지 소비량과 재생가능 에너지 비율로 구성되는 생태 효율성에서는 119위로 지속 불가능성을 공인 받았다. 우리나라의 1차 생산이 얼마나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146개국 환경지속성지수 평가에서 비료 사용량(138위), 농약 사용량(143위), 석탄 소비량(144위), 수산 자원 남획(110개국 중 77위)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에너지를 펑펑 쓰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행복의 토대와 무슨 관계냐고? 조금만 더 들어보시라. 이렇게 낭비하고 있는 에너지 가운데 이 땅에서 나는 것은 불과 3% 남짓할 뿐이다. 열심히 휴대전화 팔아 달러 벌어다가 에너지를 사와서 흥청망청하고 있는 꼴이다. 그나마 밖에서 사오는 에너지 자원도 우리 세대를 넘기면 바닥이 난다. 그런데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한 투자도 인색하다. 말 그대로 우리 세대가 이 땅의 마지막 세대인 양 우리는 살고 있다.

에너지는 그렇다 치고, 식량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이다. 조금 춥고 어둡게 살아갈 수는 있어도 배 곪으며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급 수준에 있는 쌀을 포함해도 우리의 식량 자급률은 26.9%에 머무르고 있다. 쌀을 빼면 5%. 함께 밥 지어 먹는 콩이니 잡곡을 포함해서 식탁에 놓인 대부분, 가공식품의 거의 전부가 바다 건너 온 것들이다. 아토피다 '웰빙'이다 해서 이제는 유기 농산물까지 수입하고 있는데 쌀마저 개방하겠단다. 왜? 휴대전화를 팔기 위해…. 식량안보니 초국적 곡물 메이저들의 농간이니 하는 말은 여기서 되풀이 할 필요는 없으리라.

식량과 에너지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휴대전화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먹지 않고 살 도리는 없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팔기 위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고 그걸 팔아 쌀과 석유를 사오고, 그걸 가져오고 나누느라 또 석유를 길에다 뿌리고……. 이것이 세계 10대 교역국의 실상이다.

외환위기 때 IMF의 구제금융 조건이 굴욕적이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석유의 거의 전부를, 식량의 4분의 3을 달러로 사와야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아무리 굴욕적이라 한들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에서 말레이시아가 IMF의 구제금융을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라크에 파병을 해야 하는 속내가 한미동맹 관계 때문만 일까? 권정생 선생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시지 않았는가?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고.

어찌 어찌하여 돈은 벌지 몰라도 기본 생존 조건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고, 안전은 외국 군대와 초국적 곡물 기업의 손에 맡겨 놓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 새마을 운동으로 넓어진 길만큼 멀어지고, 초가집 지붕만큼 사라진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관계. 내 목숨 줄을 내가 쥐고 있지 못하니 자존심이 충만할 수도 없고, 내일 우리 아이들의 삶이 그려지지 않으니 내가 행복을 느낀다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인가를 의심해봐야 할지도 모를 판이다. 시쳇말로 이 좁은 땅에서 몇 분, 몇 십분 더 빨리 가겠다고 고속도로로 고속철도로 뚫려 가는 산허리의 터널처럼 멍한 공허함이, 허전함이 어찌 들지 않겠는가?

행복으로 치장할 수 있는 일상의 생활은 얄팍하고, 우리 삶의 기초는 토대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행복하기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떡하지? 스스로 부족함을 메우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 같이, 생명은 스스로를 살려 지속하려는 의지와 실천력을 가지고 있다. 행복을 찾아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삶, 온전하게 나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생활을 그린다. 그것은 물질의 풍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삶,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 대한 성찰과 변화에 대한 간절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삶의 대안을 찾는 실천으로 이어지고, 대안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고 있다.

건강한 먹을거리의 공동구매에서부터 교육, 의료, 생산으로 넓어지고 있는 생활협동운동이나, 공동체적 가치의 재생산을 위한 대안교육, 지역·마을의 활성화와 생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생태마을·생태공동체, 재생가능 에너지와 대안기술, 자치와 자급의 풀뿌리 사회의 삶을 중요시하는 정치 활동에 이르기까지 대안적인 삶의 모습과 지향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의 존재가 밥과 가족과 사회와 바람과 물과 나무와 땅과 거미와 지렁이와 온갖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고, 온 세상 만물이 내 생명 아닌 것이 없다는 관계에 대한 인식이 이러한 삶을 이끈다. 이럴 때 나의 행복은 나 하나의 안위에 놓여있지 않다. 한 사람 한 사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물과 바람과 땅과 햇볕까지,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실현케 하는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진정 나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관계의 실상을 바로 보고, 순환의 이치를 따르며, 사회 유지·발전의 동력인 다양성의 가치를 옳게 실현하기 위해서 관계가 손에 잡히고, 순환의 고리를 유지하며, 그러면서도 풍부한 다양성이 온존하는 적정 규모의 지역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이다.

한편 이러한 삶이 도시보다 농촌에서 유리한 까닭은 지역 순환적인 삶의 방식이 도시에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원과 식량과 에너지를 들여오고 소비하여 내뿜는 폐기물을 내다버리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도시적 삶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복잡함과 익명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오히려 떨치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대다수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를 등한시할 수도 없다. 다음 세대가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면, 도시에서도 생태적이고 공동체성이 되살아날 수 있는 삶을 위해 지역공동체운동으로부터 도시농업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리라.

서로에게 만물의 행복을 기원하고, 내가 지금 행복한 느낌을 많이 나누시길 바라며.

"행복하세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