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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 체제든 상관 없었던 한 음악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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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 체제든 상관 없었던 한 음악가의 초상"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8>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나에의 사랑**

한 5년 전부터 나는 여름이면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찾는다. 구시가의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호텔에 한 주일 정도 머물면서, 오페라 두세 작품,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그 외의 가곡 리사이틀 등을 각각 한두 공연씩 즐기는 것이 언제나의 일정이다.

2002년 여름에 본 공연 중에서 여기서 언급할 만한 것은 역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다나에의 사랑>이다. <다나에의 사랑>은 1952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초연되었다. 이번 음악제에서의 상연은 그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여름에 초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력전'의 구호에 눌려 그 해의 음악제는 <다나에의 사랑> 초연과 함께 나치 당국에 의해 실시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 80세의 작곡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선전상 괴벨스의 묵인을 얻어 겨우 실현된, 의상을 입고 실시한 전막 리허설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단순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치 지배의 희생자였다거나, 설마 자각적인 저항자였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슈트라우스는 반유대적 편견의 소유자였다. 나치가 정권을 잡자, 곧 제3제국 음악원 총재에 취임했다. 설령 '예술'을 비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변명이 있을지라도, 슈트라우스가 자발적인 나치 협력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슈트라우스가 나치 권력에 반골의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제3제국 음악원 총재의 지위에 있던 193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유대인이 관계한 작품에 대한 나치의 상연 금지령을 무시하고, 슈테판 츠바이크 각본에 의한 오페라 <말 없는 여자>를 작곡한 것이다. 나치 당국은 이 일의 처리를 놓고 곤란한 입장에 빠졌지만 결국 히틀러 자신이 슈트라우스에게 예외적으로 상연을 허가한다는 뜻을 전했다. 상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더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는 1935년 7월에 제3제국 음악원 총재 직에서 해임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제3제국 음악원 총재의 역을 연기하고 있다고 썼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해임 후에도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올림픽 때에는 <올림픽찬가>를 작곡했으며, 일본 황기(皇紀) 2600년제를 위한 축전음악을 제작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만년은 나치 당국과의 긴박한 대결의 나날이었다. 그의 아들 프란츠는 열성적인 나치당원이었지만, 프란츠의 아내인 아리스는 유대계였다. 나치는 이 약점을 구실로 슈트라우스와 그 '비(非)아리아계'가족에게 집요한 압박을 계속했다. 아리스는 자택에 연금되었으며 프라하에 살던 아리스의 할머니 파울라 노이만를 비롯한 많은 친척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결국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지위와 연줄을 이용해 친척들은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거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슈트라우스라는 인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가 언제나 공공연하고 냉정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적 에고이즘의 견지에서 보면 그에게는 어떤 정치체제든 상관없었던 셈이다. 그는 독일 황제 밑에서는 악장으로서 군대 행진곡을 작곡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황제 밑에서는 비인의 궁정악장이었으니, 오스트리아와 독일 공화국 하에서 똑같이 총아였던 것이다."

츠바이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며느리가 유대계라는 것, 오페라 대표작이 '순수 아리아인'이 아닌 휴고 폰 호프만슈탈의 대본에 의한 것이라는 것, 악보 출판사의 경영자가 유대계라는 것 등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나치 정권에 접근하려 했던 것이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직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음악가의 한 사람이던 슈트라우스가 자진해서 나치 권력에의 협력을 표명한 것은 괴벨스나 히틀러에게는 순수하게 장식적 의미에서 수치로는 가늠할 수 없는 이득을 의미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은 오늘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이념 및 존재 이유와 맞물리는 중대한 문제다. 그가 평범한 음악가고 작품도 범용한 것이었다면 평가도 간단히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게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내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맞먹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며 그런 만큼 흥미 깊은 것이다.

슈트라우스라는 인물 속에는 나치에 의한 예술 지배 정책의 피해자라는 측면과 대(對)나치 협력자라는 측면이 모순된 채 존재한다. 2002년의 <다나에의 사랑> 상연은 물론 전자의 측면을 부각하려고 한 것이었다. 또한 그러지 않고는 상연이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하기 어려운 후자의 측면, 마음에 가책을 느끼게 하고 편치 않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 양자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치 권력에의 접근에 있어서나, 가끔 보여준 반골의 행동에 있어서나, 슈트라우스의 행동을 관통하고 있던 원리는 어디까지나 그가 믿고 있는 '예술'이었다. '예술에 있어서의 에고이즘'이라는 츠바이크의 표현은 정곡일 찌르고 있다.

덧붙이자면 내가 본 <다나에의 사랑>은 뛰어난 공연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는 무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열창했지만,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번역 : 김혜신(가쿠슈인대 강사,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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