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생활**
펠릭스 누스바움은 1922년부터 함부르크에서, 그 이듬해부터는 베를린에서 화가수업을 했다. 1932년 10월 펠릭스는 독일 예술아카데미의 장학생이자 자기의 애인인 화가 페르카 프라틱과 함께 로마에서 유학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였다. 둘은 독일에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사실상 난민이 됐다.
두 사람이 프랑스를 거쳐 벨기에에 도착한 것은 1935년 2월이었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일에서 흘러나오는 유대인 난민에게 국경을 닫고 있었지만, 벨기에만은 아직은 체재허가를 받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체재허가의 기간이 언제나 한 번에 6개월로 제한됐고, 허가를 갱신받으려면 까다로운 수속을 밟아야 했다. 외국인 등록 증명서에는 "모든 고용노동에의 종사를 금지한다"고 명기돼 있었다. 벨기에 국민의 고용을 위협할 우려가 없는 자에게만 간신히 6개월 간의 체제허가가 주어졌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을 때 벨기에 당국은 국내에 있는 15세 이상의 독일 국적 남성들을 '인질'로 구속했다. 나치의 지지자인지 아닌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아메리나 누스바움과 같은 망명 유대인도 패스포트의 국적이 '독일'인 것만으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구속됐다. 누스바움을 비롯한 약 7000명의 '인질'은 남프랑스의 상 시프리앙에 있는 연합군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이윽고 누스바움은 수용소를 탈출해 펠카가 기다리는 브뤼셀로 돌아갔는데 이때 탈출하지 않았다면 비시 정권에 의해 독일에 송환되었을 것이다.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1940년 10월 유대인 등록령이 내려졌다. 1941년 1월에는 제3제국 법령에 따라 국외의 독일 국적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누스바움의 패스포트와 벨기에 외국인 등록증은 둘 다 무효가 되었다. 무국적자가 되고 진정한 난민이 된 것이었다.
***브렌동크의 '죽음의 벽'**
누스바움 자신은 브렌동크 요새에 구속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번 촬영에 꼭 브렌동크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것이 나치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공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의 글에도 경찰이 레지스탕스 용의자의 입을 열게 하려고 할 때 "자백하지 않으면 브렌동크 행이다. 브렌동크가 어떤 곳인지 알겠지?"라는 협박을 상투적으로 했다는 기술이 들어있다. '브렌동크'라는 단어가 누스바움의 뇌리에서도 불길한 반향을 일으켰을 게 틀림없다.
브렌동크의 처형장을 직접 보고 나는 너무나 놀랐다. 거기에 붇박힌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균열이 가거나 흰 얼룩이 떠 있는 그 벽의 모습이 누스바움의 작품 <유대인 증명서를 가진 자화상>에 그려진 벽과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불길한 징조에 대해 특별히 민감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쫓기는 정신상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환각증상과 같은 것이 누스바움에게 일어났는 지도 모른다. 누스바움은 실제로는 직접 본 적이 없는 브렌동크의 '죽음의 벽'을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브렌동크의 요새와 메헤렌 중계수용소 자리에 있는 유대 박물관의 촬영을 끝낸 우리는 아주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브뤼셀 시내의 아르시메드 가를 향했다. 아르시메드 가는 시의 중심부에 있는 슈만이라는 이름의 지하철역 로터리로부터 방사선처럼 뻗은 여러 거리들 가운데 하나다.
아르시메드 가와 프랑그랑 가의 모퉁이에 왕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의 1층에 카페가 있었다. 예전에는 식료품점이었다고 한다. 누스바움이 위조된 신분증명서를 지니고 들르곤 했건 가게다. 은신처가 있던 아르시메드 가 22번지에는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아르누보 양식의 손잡이가 특징인 이웃 건물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망명자 커플이 불안에 떨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두 사람이 여기서 구속되어 죽음의 수용소에 호송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시는 전혀 없었다.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 가야 하는 곳에 누스바움이 아틀리에로 사용했던 제2의 은신처가 있다. 야간통행 금지령을 어겨가며 누스바움은 밤길을 오고갔을 것이다. 관헌에게 들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브뤼셀이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기 불과 한 달 전인 1944년 7월 20일 누스바움은 누군가의 밀고로 아내 페르카 프라틱과 함께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두 사람은 벨기에로부터 출발한 최후의 호송열차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졌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누스바움과 페르카는 아우슈비츠의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8월 9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종전 후인 1946년 1월 29일 두 사람의 이름은 벨기에의 외국인 등록 기록에서 말소됐다.
2차 세계대전 종식 때까지 벨기에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은 2만5000명이며, 그 가운데 약 2만3000명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615명이었다. 쟝 아메리는 그 중 한 사람이다.
***망명자의 자화상**
펠릭스 누스바움 관의 최상층 가까운 구석 모퉁이 벽에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 걸려 있다. 밤거리에서 한 남자가 자기를 부르는 관헌을 돌아보는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외투의 가슴께에는 노란색 별표시가 꿰매 붙여져 있다. 왼손에 들려 있는 벨기에 왕국의 외국인 등록 증명서에는 '유대인'이라는 의미의 'JUIF-JOOD'라는 붉은 글자가 찍혀 있다. 몸을 감출 장소를 찾아 이국의 거리를 방황하던 남자는 끝내 벽에 둘러싸인 막다른 구석에 갇힌 것이다. 이제 그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다.
궁지에 몰린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자기를 그곳으로 몰아붙인 자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냐?"라고 심문하는 자를 향해 그는 "너야말로 누구냐?"고 조용히 되묻고 있다. 한때는 '같은 국민으로서의 평등'이라는 구호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동화하기를 권하더니, 다음 순간 그 기대감을 무질러버리고 '유대인'이라는 틀 속에 집어 넣으려는 폭력, 그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폭력의 표징을 그는 여기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체절명의 벽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마지막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인'의 자화상이 아니다. 망명자의 자화상이며, 디아스포라의 자화상이다.
나는 그림의 한 옆에 서서 나를 찍고 있는 TV 카메라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말하는 내용이 일본의 시청자에게 전달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찍고 있는 제작팀의 멤버들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었다.
나는 지갑에서 나 자신의 외국인 등록증을 꺼냈다. 일본 법무성이 발행한 증명서다. 14살 때부터 어디를 가든지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갖고 다니도록 강제되고 있는 증명서다. 재일 조선인 1세들이 '수첩'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전에는 수첩 모양의 작은 책자였다. 거기에는 왼손 검지손가락의 검은 지문이 찍혀 있었다. 지금은 현금인출 카드와 같은 모양이고, 나 같은 '특별 영주자'들의 지문날인 제도는 없어졌다. 하지만 항시 휴대해야 한다는 의무는 변함이 없다. 이는 과거 조선민족을 대일본 제국 신민의 틀 속에 끌어들여 놓고 나중에 상의도 없이 다시 '국민'의 틀 안에서 밖으로 내쫓은 자들이 지금도 우리 재일 조선인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의무다.
나는 내 외국인 등록증을 왼손에 쥐고, 누스바움의 자화상과 같은 포즈로 그것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찍으라고 디렉터에게 재촉했다. 그 장면은 촬영은 됐지만, 결국 편집 단계에서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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