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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을 선택한 '재일 조선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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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조선을 선택한 '재일 조선인' 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1> 다카야마 노보루와 조양규

***침목**

광주 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을 나오니 인접한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재일(在日)의 인권>전을 개최 중이었다. 1945년 이후의 재일 조선인 미술가의 작품을 한국 최초로 집중 전시하는 시도이다.

그 전람회를 보기 위해 긴 돌계단을 올라가 시립 미술관의 정면 현관에 다가가 보니 넓은 앞뜰에 여러 개의 침목을 쌓아올린 대형 입체 작품이 있었다. 구조가 크고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작가명의 패널을 보니 '다카야카 노보루(高山登)'라고 쓰여 있다.

평소에 일본의 현대 미술에는 파워와 에너지가 너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점을 불만스러우면서 불가해하다고 생각해온 나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허우대가 크고 힘이 넘친다. 어딘가 그리운 느낌도 든다. 반시대적이라고 해도 좋다.

다카야마 노보루는 196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약 40년간, 일관해서 '침목'을 사용한 작품을 제작해왔다 스무 살 되던 해 여름, 도쿄 예술대 학생이었던 그는 탄광노동조합의 소개장을 들고 홋카이도의 탄광을 도는 여행을 나섰다. 이하는 그의 에세이에서 인용한다. (『다카야마 노보루 전 도록』, 리아스아크 미술관, 2000)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광부의 새까만 얼굴, 거대한 기계가 광맥을 물어뜯듯이 석탄을 삼키고 갱도의 기둥을 만들어 가는 대규모 해저 탄광 (…) 그리고 운반용의 철도 선로의 아래에 깔린 '침목'에 눈이 갔다. 이 침목이 지하의 세계로부터 지상의 세계까지 종횡으로 깔려있다는 것에. 이 암흑의 세계, 시커먼 침목은, 나를 각성시키고도 남았다. 근대화란, 국가란, 물질과 인간의 관계란, 아시아란, 민족이란, 전쟁이란, 머릿속에서 잇따른 말이 돌아다니며 나의 피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앞뜰에서 다카야마 노보루의 작품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이름을 보고 속단해 그를 일본인 작가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일본에 아직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가 나와 같은 조선 민족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카야마 노보루의 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온 야금 기술자였다는 걸 작가 자신에게서 직접 들었다.

'침목'이라는 소재에의 독특한 집착과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연상시키는 그 작풍을, 그의 민족적 태생과 단락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인간이 행하는 행위인 이상, 작품은 작가의 출신과 무관하다고 말해버릴 수는 없다.

내 입장에서 보면, 다카야바 노보루도 또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재일의 인권'전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전시되어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매우 상징적인 광경으로 비친다. 다카야마 노보루는 일본 미술사에서 '모노파'의 한 사람으로 자리 매겨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본의 작가'로 취급된다. 미술사나 미술 비평의 담론 역시 '민족'이나 '국가'라고 하는 관념상의 틀을 만드는 것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화된 그 틀에 담아지지 않는 존재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리하게 정의되거나 혹은 쳐내버려지는 것이다.

***맨홀**

'재일의 인권'전에는 23명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재일 조선인 실업가인 하정웅이 기증한 컬렉션이 전시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양규, 이우환, 곽덕준 등 내가 잘 아는 이름도 있었다.

조양규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다. 1980년 중반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센다이시를 방문했다. 형들이 옥중에 있던 그 시절, 나는 가끔 지방으로부터 강연 의뢰를 받았다. 어두운 심정으로 무거운 테마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청중은 자주 나의 말에서 무엇인가 희망의 징조를 얻고 싶어 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희망 비슷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늘 최악의 사태를 마음 속에 그리고 가장 무참한 상황에 대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강연은 하나의 고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그 고역을 치르러 가는 고장에서 강연을 앞둔 빈 시간에 미술관을 찾아 혼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습관이 되었다.

센다이에서는 미야기현립미술관을 찾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조양규의 <맨홀 B>를 보았다. 인물도 하늘도 없다. 이 화가는 왜 지면과 맨홀만을 그린 것 일까. 꿈틀거리는 호스는 화가 자신의 몸부림일까. 화가가 그린 어두운 구멍을 계속 들여다보며 조금도 질리지 않았다.

조양규는 1926년 일본 식민지 하의 조선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당해 마침내 남쪽에 친미 반공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단독 선거가 강행되었고, 그는 그것에 저항하는 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성립, 좌익운동과 통일운동에는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 때문에 조양규는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의 에다가와에 있던 재일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몸을 의지했다.

이듬해에는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해 미술을 배웠다. 재일 조선인 조직에서 기관지의 표지나 삽화를 그렸다. 그 후 일본의 미술계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재일의 인권'전에 출품한 <밀폐된 창고>나 <맨홀 B>는 그 대표작이다. 1959년부터 재일 조선인의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 운동이 시작되어 조양규도 1961년 북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는 왜 귀국했는가. 그가 사회주의의 이념을 믿어, 조국의 통일을 위해 싸워온 인물이라는 것을 그 첫째 이유로 들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일본에 망명하기 전부터 해온 투쟁을 계속해 완성시킬 장소는 북조선 이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1950년대 후반 당시의 재일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상도 잊을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부정해 일률적으로 '외국인'으로 취급해 사회보장정책의 대상에서 팽개치듯 제외해 버렸다.

당시의 재일 조선인의 실업률은 60%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과 북조선 양국의 적십자 협정에 근거해 1959년 재일 조선인의 북조선으로의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임하는 일본 정부의 자세가 '인도주의'로 위장한 사실상의 추방 정책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데사 모리스 스즈키 「조선인 '귀국' 사업에서 신자료」, <朝日新聞>, 2004년9월21일자)

그러나 앞에 든 이유 외에 조양규의 북조선 귀환에는 그 자신만의 동기가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친했던 미술 평론가 하류이치로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재일 생활이 길어져 조선의 풍경도 조선인의 풍모와 거동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밖에 알 수가 없는 게 나에게는 답답한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그림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부자유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공중에 매달린 어중간한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서 싸우고 싶다."

조양규는 북조선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곳이 '부자유'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은 '공중에 매달린 상태'일 뿐인 것이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인간으로서 진정한 삶을 찾아 그는 도약했던 것이다.

북조선으로의 귀국 후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단 한번 조양규가 하류이치로에게 근황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이후는 소식불명인 채 지금에 이른다. (하류이치로 「조양규와 송영옥-사감」, 『'재일의 인권' 전 도록』,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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