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농업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 이미 <프레시안>은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그 바람직한 개선책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었다. 이번 기획은 그 연장선상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서 더 나아가 21세기 농업의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새로운 대안 사회의 상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
서기 2000년 세계적으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50%가 넘었다. 2030년이면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 산다는 예측이 현재 무리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구 수십만이 사는 메트로폴리스를 구상하는 것은 이미 지난 세기에 끝난 얘기고 인구 수천만이 사는 메갈로폴리스 계획을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과연 21세기를 가리켜 '도시화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이런 시대에 농촌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시화 시대', 농촌의 의미는?**
그 의미에 대한 논의는 위의 예측에서 두 가지 허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어떤 사회 현상이든 시간과 정비례해 정도가 심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나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진행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하면 오히려 퇴행하기 시작하는 종형 곡선을 그린다. 도시화도 어느 수준에 달하면 오히려 분산돼 시골로 퍼지는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요즘 우리나라 농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U턴, 즉 농촌 출신으로 도시 생활을 하다가 다시 농촌으로 복귀하는 모습이나, I턴 즉 도시 출신으로 농촌에 내려가서 사는 모습은 그런 진행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지속 가능성 논의에서 강조하는 분산화, 지방화 역시 이런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위 예측은 논의를 한 부분에 국한시킨 것이어서 장기적으로 볼 때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소위 도시 문제 전문가들은 대부분 도시화 증가의 경향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집을 얼마 더 지어야 하고 도로를 어떻게 더 만들며 물 공급을 어떻게 할 건지를 계획한다. 일견 치밀해 보이는 이 계획에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지어진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어떻게 충당되느냐는 것이다. 급증하는 물, 에너지, 식량에 대한 요구를 무슨 수로, 언제까지 충족시킬 수 있느냐는 것은 계산에 들어 있지 않다. 요컨대 요즘의 도시에 대한 논의에는 도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자를 조달하는 배후지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런 계산의 오류가 반복되어 왔다. 수메르의 첫 도시국가에서부터 대문명권의 큰 도시들을 거쳐 수많은 나라들의 크고 작은 도회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활발해져 잉여로 먹고 사는 인구가 생길만 하면 대개는 어디에서나 도시가 일어났다. 도시가 한참 커갈 때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도시를 확장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 중의 어느 도시도 확장 일로를 걸어온 것은 없다. 부침을 거듭하면서 아직까지도 대도시로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한동안 번성했다가 몰락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든 곳이 더 많다.
왜 이렇게, 어떤 사회는 일어났다가 곧 망하며 또 어떤 사회는 오래도록 존속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층이나 빙하 속에 남은 과거 동식물의 잔재를 분석하는 기법이 발달하고 이 방면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그들이 살았던 식량생산 기반과 환경 조건도 밝혀지기 시작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요인이 드러나고 있다. 즉 배후지가 든든해서 식량 생산, 에너지 공급, 생태적 오염 허용 등의 기능을 원활했던 곳에서는 도시가 오래 지속되지만 이런 기반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조건이 좋아서 흥기했거나, 배후지를 함부로 파괴해 온 도시는 배후지의 붕괴와 함께 몰락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과 현재의 농촌과 도시**
최초의 도시국가를 이룩했던 수메르 문명에서는 인구 증가와 도시화 진전에 따른 식량 수요의 급증으로 토양을 과잉 경작했기 때문에 토지에 염분 농도가 증가하는 염화 현상이 심해졌고 그로 인해 식량생산 기반이 붕괴되자 도시국가 문명 전체가 몰락하고 말았다. 에트루리아, 미케네, 하라파 등 전설적인 번영을 자랑하다가 갑자기 몰락해버린 문명들에서 한결같이 인구과잉으로 인한 과잉 경작, 그에 따른 환경 파괴와 농촌 붕괴가 그 원인이었다는 점이 지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 문명이 몰락하는 것은 이런 자연적인 원인 외에도 정복 전쟁의 요인도 크며 이 부분은 이제까지 역사학이 주로 조명해 온 대목이다. 그러나 정복 전쟁이 원인이 될 때도 더 들여다보면 배후지의 환경 파괴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배후지가 튼튼해 도시부에 건강한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주는 사회는 번성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정복되기 어렵다. 설사 정복된 땅일지라도 환경과 식량생산 기반 등 배후지가 파괴되지 않으면 단지 도시부의 주인만 바뀔 뿐이지만, 배후지가 파괴되면 철저히 몰락해 역사 속에서 큰 자리를 잃고 만다.
예를 들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북아프리카 곡창 지대 최대의 도시국가를 이뤘던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오랜 대결 끝에 패전했다. 정복자 로마는 기름진 카르타고의 땅에 엄청난 양의 소금을 뿌려 두고두고 식량이 생산될 수 없게 망쳐놓았고, 그 결과 카르타고는 지금까지도 빈곤한 제3세계 땅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현재 아프리카의 튀니지).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엄청난 식량을 조달해줄 수 있었던 곡창 지대를 제 손으로 망가뜨린 로마 역시 이로 인해 몰락을 스스로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 카르타고보다 더 먼 북아프리카 농촌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던 로마는 이런 배후지가 과잉 경작으로 피폐해지면서 몰락하고 말았으니까.
그 뒤의 세계에서도 역시 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의 파도가 여러 차례 반복되던 중세의 유럽은 근대에 들어 식민지 정복을 통해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도시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고 자국 내 농촌은 자급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여가를 위한 곳으로 바뀌어갔다. 오늘날 선진국은 전 세계의 농촌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세계의 석유 산지로부터 에너지를 조달받고 후진국의 공해 산업으로부터 공산품을 조달받으며 자국의 환경은 보존하면서 도시 지역의 기능을 더욱 키우면서 유지해가고 있다.
그러니까 현대의 도시 문명은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태·사회 공간을 지구적 범위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다를 뿐, 식량이나 기타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주는 배후지가 있어야 존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서고금의 도시들과 같은 조건에 있는 것이다.
***우리 농촌의 모습은, 그리고 가야 할 길은?**
이런 예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상황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된다. 아직까지도 우리 국토에 농촌 지역이 공간적으로 상당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진다. 한편 농촌이야 죽든 말든 눈앞의 단기적인 금전 소득을 올리는 데 지금까지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그렇게 할 태세인 정부의 정책 방향이 신경 쓰인다. 과연 농촌이 파괴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게 더 효율적으로 경제를 살리는 길인가?
과연 그런지 아닌지 우리 사회가 이뤘던 경제 약진 과정을 다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주역이 경제 개발에 힘쓴 박정희 정권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럼 요즘 정부는 경제 부흥하기 싫어서 혹은 제대로 된 개발 계획을 못 세워서 경제를 지지부진하게 만들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정희 이후의 정부들도 한결같이 경제를 살리려고 노력했고 이를 위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왔다.
잘 살게 되거나 못 살게 되는 차이는 무엇보다 전체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에서 온다. 1960, 70년대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와 명민한 두뇌는 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을 나은 일꾼들로서 성실하게 뛰어 왔다. 이때는 우리 정부가 외국의 일자리를 유치하려고 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한국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많았지만, 요즘은 외국기업을 유치하거나 한국의 인력을 수출하려고 백방으로 애써도 세계적으로 점점 한국 사람들의 일손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의 차이는 건강한 배후지의 생태적 기반에서 온다. 1960, 70년대는 못 먹고 못 살았다 해도 사람들이 대부분 총명하고 정신력이 강하며 건강하고 성실했었다. 이런 두뇌와 능력, 건강은 오염되지 않아 건강한 국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개발이 되지 않아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물질문명이 훨씬 뒤쳐져 로마가 '촌놈'들이라고 경멸했던, 너무나 못 살아 로마인 대신 전투에 나가 싸워주던 게르만의 용병들이 거대한 로마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가졌듯이.
지금 우리 사회처럼 독성이 강한 유전자조작식품(GM Food)을 선두로 한 수입식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가고 환경오염이 심해진 곳에서는 사람들의 작업 능률도 떨어지고 성격도 불성실하거나 폭력 수준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마치 그렇게 막강했던 로마가 수입 식량에 의존하고 본토가 산업으로 오염되면서 사회적으로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의 체력과 정신력, 번식력이 떨어져 결국 일개 게르만 용병 대장에게 패망했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산 중의 하나를 마구 낭비하고 심지어 고의로 파괴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건강한 배후지인 농촌의 존재와 거기서 나오는 건강한 생산성이라는 지원 말이다. 이 건강한 생산성은 안전하며 영양이 풍부한 먹을거리를 조달해주고, 풍부한 녹지의 모습으로 도시부의 오염된 공기를 정화해주기도 하고, 도시생활에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주는 따뜻한 공동체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농약과 화학비료가 온 농촌의 땅을 덮고, 비닐 태워서 발생하는 다이옥신이 온 농촌의 하늘을 덮고, 수입 식품이 농촌의 구멍가게를 채우기 이전의 농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얼마나 큰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농촌을 되살려야 한다. 건강한 생명의 땅으로, 평화로운 공동체 질서의 땅으로, 묵묵히 일만 하는 것 같지만, 광고의 이미지 속에, 그럴 듯해 보이는 정책 속에 숨은 세계적 자본의 흉계에 만만히 말려들지 않는 땅지기들의 땅으로. 도시의 중요성이 커져가는 21세기인 만큼 건강한 농촌의 존재가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필자 소개**
이진아 씨는 환경과 건강 문제 관련 저술가로 <딱 1년만 자연주의로 살아보기>(시공사, 2001), <아토피를 잡아라>(공저, 시공사, 2004) 등의 저서와 <녹색세계사>(클라이브 폰팅, 심지, 1996) 등의 역서가 있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사무국장 및 연구실장, 동아시아 대기행동 네트워크 사무국장, 여성환경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등을 맡아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현재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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