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
2000년 5월에 내가 10년 만에 광주에 온 목적은 광주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였다. 광주 비엔날레는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 2년에 한 번 열리는데 2000년은 제3회. 전체의 테마는 '人+間(Man+Space)'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미술전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졌다. 당연한 것이지만 광주라는 도시에서 개최한다는 특별한 의의를 관계자 모두가 강하게 의식해 왔다. 이 미술전에는 민주화 투쟁의 기념을 끊임없이 새로운 문맥에서 상기하고 그것을 준엄하게 재평가하려는 의도가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민주화운동'의 자리매김, 한국 현대사 속의 민주화운동의 평가와 관련되는 역사관의 대립, 비엔날레 운영의 기본 개념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제1회 때는 장외에서 안티비엔날레라고 부를 수 있는 민중 예술제가 열렸다. 일본에서는 쇠퇴해버린 미술과 정치 상황을 연결하는 대립과 논쟁이 여기서는 생기와 활기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시내 중심가에서 외곽 쪽으로 좀 간 곳에 있는 메인 전시관에 가니 정문 앞에는 포장마차 같은 싼 식당이 몇 개 늘어서 있고 퉁명스러운 표정의 여주인이 손님을 맞고 있다. 택시 기사인 듯한 몇 명의 남자들이 따분한 듯 모여앉아 오뎅이며 튀김 같은 것을 먹고 있다. 청결해 보이진 않지만 제법 맛있어 보인다.
국제 미술전이라고 하면서 젠 체하는 데가 전혀 없다. 관객은 가족 동반이 많고 작품에 접하는 태도도 결코 미술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커다란 제스처로 놀라는 등 극히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전시 작품에도 그와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베닌 태생의 로무알드 아주메(Romuald Hazoume)라는 작가는 플라스틱 병, 부서진 청소기, 다리미 등의 폐품을 능숙하게 이용해 만든 가면 시리즈를 출품하고 있다. 그 어느 것이나 아프리카의 전통가면을 생각나게 하며 호감이 가는 유머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이 작가는 개막보다 일찍 한국에 와 한국 땅에서 주워 모은 폐품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개발독재 정치 하에서의 경제성장 만능 정책이 가져온 한국의 심각한 환경 파괴 문제에 대한 풍자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발걸음을 빨리해 걷고 있다가 니키 리(Niki S. Lee)라는 여성 아티스트의 사진 작품 앞에서 발이 멈췄다. 경력을 보니 1970년 한국에서 태어나 현재 뉴욕 거주라고 되어 있다. 서른 살의 젊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다.
그녀의 작품은 일견 흔해 빠진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피사체는 아메리카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예를 들면 펑크 패션의 젊은이, 히스패닉계의 대도시 빈곤층, 방벽에 남군의 깃발을 장식하고 있는 오하이오주의 가난한 백인 또는 슈트에 몸을 감싼 뉴욕의 여피…. 그러나 그 스냅 사진들에는 어디나 니키가 찍혀 있는 것이다.
능란한 분장과 연기로 니키는 어떤 때는 남부의 가난한 백인, 어떤 때는 월가의 캐리어우먼으로 변신해 있는데 그 용모는 아무리 보아도 동아시아인의 그것이었다. 이 작품은 다민족 다문화를 표방하는 미국 사회에 던져진 새로운 세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아이덴티티(자기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투쟁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도 하며 반대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된 셈이라도 자신의 태생의 각인을 지울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도 하다. '아이덴티티'라는 사고 방법 그 자체에 대한 항의라고도 이해되는 한편 아이덴티티를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 양의적인 점이 흥미 깊다.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때에 따라 '애국심'이나 '민족 의식'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오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이덴티티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일 것이다. 많은 다수자(majority)는 이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이 그러하듯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 철이 들고부터 이 물음과의 인연 줄이 끊겼던 적이 없다.
* * *
아이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죠-센(朝鮮) 돌아가"라는 욕을 들을 때마다 자신은 다른 애들과 다른 '죠-센'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는 속 시원히 알 수가 없었다.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래의 진로가 화제가 되었을 때 공무원이 된다는 친구, 변호사가 되겠다는 친구들에게 나는 그런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 편에서 설명해야 했다. 대기업 입사가 목표라는 친구 앞에서 '나는 그런 삶은 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둘도 없이 소중한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는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쪽에서 나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반전 데모에 참가하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너희들과는 입장이 다르니까, 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정치 활동에 참가하고 싶은 의욕은 남에 못지않게 갖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의 그것은 일본인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설명을 했지만 상대방은 이해해주지 않고 마지막에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니까"라고 했더니 "왜 귀화하진 않는 거지?"라고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에게 마음이 끌릴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인가' 하는 자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식민지 지배자의 자식과 피지배자의 자식이 행복하게 사귈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결혼하게 되어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전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상대의 여성이 이해하지 않는 것에 언제나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 자신도 그 복잡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한가. 아무리해도 더 자연스럽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외곬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고 느껴 그런 자신을 애처로워하며 미워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세계 각지에서 학생의 저항운동이 불타올랐던 1968년 처음으로 프란츠 파농을 읽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수험공부도 제쳐두고 열중해 읽은 책이 지금도 곁에 남아 있다. 그때 빨려들듯이 연필로 그었던 선도 그대로다.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해 인류의 그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한다. (프란츠 파농, 「식민지 전쟁과 장신장애」,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계시와 같은 말이었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프랑스 본국에서 정신의학을 배운 후 알제리 해방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의 강렬한 말이 동아시아의 디아스포라인 나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은 '식민주의'에 의한 '계통적인 부정' 때문이다. 그것은 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재일 조선인은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디아스포라로서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아직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로부터 3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18살이었던 나는 50대 중반이 되려고 하고 있다. 나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확고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왜 그것을 계속 자문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파농으로부터 받은 일격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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