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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시대의 기억, 음산한 폭력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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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시대의 기억, 음산한 폭력의 기억"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7> 망월동과 광주교도소

***망월동**

내가 처음으로 광주를 찾은 것은 1990년 봄이었다.

오랜 옥중 생활을 보낸 두 형 중에서 서준식은 1988년에 출옥했고, 남아 있던 서승도 1990년 3월 1일, 19년간의 옥중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형의 출소를 맞아 사회 복귀에 따르는 제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나는 그때 상당 기간 동안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얼굴과 상반신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남아 있다. 그는 체포 직후의 취조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고통에 못 이겨 허위의 자백을 하면 친구와 지인들에게 막대한 폐를 끼치게 되고 나아가서는 민주화 운동 자체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고 생각한 형은 그 사실이 두려워 분신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다. (서승, 『옥중 19년』, 김경자 옮김, 역사비평사)

내가 내심 안고 있던 우려는 그 상처가 정신적인 부담이 되어 출옥 후의 형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형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예상과는 전혀 반대였다. 동창생, 친구, 매스컴, 사회운동가, 종교가 그밖의 각 분야의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고 연락을 해 오는데 형은 그 모든 요구에 응해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도 바쁘게 나돌아 다니는 것이다. 그 모습은 오랫동안 사막을 방랑한 사람이 오아시스에서 성급하게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과도 같았다.

기뻐할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나 자신은 날이 갈수록 당혹스런 심정이 더해갔다. 19년간 서로 떨어져 있었던 우리 형제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나 장래의 방침에 대해서나 이야기할 것이 산더미같이 있었건만 몇 날이 지나도 천천히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항시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형의 곁에 있는 것이다. 형은 그 상황을 기뻐했다. 너무나도 침착성이 없었다. 그때 형은 일종의 흥분 상태였을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못하고 가까운 장래의 전망에 대해서의 의논조차 하지 못한 채 날만 헛되게 흘러갔다.

초조함이 상당 수위에 달했다고 느낀 어느 날 아직 어둑한 이른 아침에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광주. 한국에 와서 어딘가 지방에 가야 한다면, 그 어디보다 광주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포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탔다. 광주까지는 1시간 조금 못 미치는 거리였다.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대지는 전체가 붉은 색조를 띠고 있었다. 검고 습기 있는 일본의 대지와는 전혀 달리 각박하고 가혹한 느낌이었다.

광주공항에서 택시를 탄 나는 '제대로 통할까', 하는 일말의 불안을 느끼면서 나이 드신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망월동'-그것은 광주와 관련해 내가 알고 있는 많지 않은 고유명사의 하나였다. 거기에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가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는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18년간 계속된 군사 독재정권이 여기서 끝난 듯했다. 그러나 육군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해 1980년 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의 탄압에 나섰다. 5월 17일 심야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광주에서는 학생 및 시민이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전두환은 특수부대를 투입했다. 군은 처절한 학살을 행한 후 5월 27일 광주를 진압했다.

매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망월동 묘지에서 땅을 치며 울부짖는 흰옷을 입은 유족들의 모습이 보도를 통해 전해진다. 당시 일본어 역으로 읽고 그대로 상처자국과 같이 마음에 새겨지고 만 시구가 있다. 일본에 있는 나에게 있어 상상의 도시 '광주'는 이 시가 읊은, 바로 그 장소였던 것이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만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
(김준태,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앞부분)

***누나**

1980년대 중반 경 나는 미국의 작은 지방 도시를 찾았다. 형들의 구원 활동을 하고 있던 그 도시의 인권운동 단체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작은 모임을 기획했던 것이다. 10여 명 정도의 참가자 중에 40세쯤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의 아시아계 여성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녀는 한국으로부터의 이민 온 재미 코리언 디아스포라였다.

집회가 끝난 후 그녀는 날더러 꼭 자기 집에 들르라고 권했다. 그녀의 집은 반지하의 창고와도 같은 살풍경한 곳으로 소개받은 백인 남편은 첫눈에 그녀보다 상당히 나이가 어려 보였다. 정성껏 만든 식사를 대접받으면서 천천히 얘기를 들으니 그녀의 출신지는 광주로 남동생이 정치범으로 광주의 감옥에 있는데, 몸이 약해 살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북미의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의 코리언 디아스포라가 만나고보니 둘 다 정치범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고국에 있는 가족은 너무 가난해 머나먼 미국에서 그녀가 미용사를 해서 번 얼마 안 되는 벌이를 절약해 책이나 약 옷가지 등의 차입품을 남동생에게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피 같은 물건들이 본인한테까지 가기도 전에 행방불명이 되거나 형무소 당국의 허가가 내리지 않거나 한다고 한탄했다. 그것은 그대로 내가 겪은 경험이기도 했다.

수염을 기르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고교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서 왔다는 걸 알자 자기도 일본에 한번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병사로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제대를 앞둔 휴가를 이용해 며칠간 도쿄와 가마쿠라 주변을 관광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는 훌륭하다, 나는 선(禪)에 흥미가 있다"고 했다.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천진한 질문을 받는 아이러니컬한 입장이 된 것이다. 상대에게 악의가 없는 만큼 더 곤란하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하면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의 개념 정의에서부터 국민국가론에 이르는 거창한 논의를 전개해야만 한다. 상대방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날씨를 화제 삼는 인사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그른 인식을 주게 되는 것 같아 자신이 불성실하게 느껴지는 일종의 도착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때는 다행히 그녀의 남편이 비교적 빨리 내가 그런 화제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했고 곧 따분하다는 듯이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곁눈으로 보면서 그녀는 한탄을 했다. "고국에 사는 가족의 형편상 옥중에 있는 남동생의 생명까지가 내 어깨를 누르고 있다. 남편이 나와 결혼할 마음이 든 건 '일 잘하고 순종하는 아시아계 여자'라는 편견 때문이다. 그런 남편과라도 결혼하지 않으면 이 미국에서 살아 올 수 없었다. 남편은 아직 어린애이며 의지가 안 된다. 남동생은 살아남을까? 이 한탄스런 날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말없이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의 남동생은 옥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알 길이 없다.

***풀 덮인 무덤**

시가를 우회해 산길을 달려 망월동에 도착해 보니 산중턱의 쓸쓸한 비탈에 흙 봉분이 늘어서 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매장을 하는 관습으로 일반적으로 화장은 기피되어 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1966년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남도의 산골에 갔는데 수많은 만두와 같은 흙 봉분이 산자락 일대를 뒤덮고 있는 광경에 마치 마을 전체가 묘지처럼 보여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 정권 하에서 화장이 장려되어 고도 경제성장을 거쳐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매장이 감소하고 흙 만두 모양의 봉분도 덜 눈에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광주의 망월동은 전통적인 봉분 묘이다. 흙 봉분 하나하나에 작은 묘표가 세워져 있다. 고인의 사진을 붙인 묘표가 많다. 사망 연월일을 보니 대부분이 1980년 5월18일에서 28일 사이의 기간에 몰려 있다. 광주 민주화항쟁의 해방 공간이 생겨나 계엄군에게 압살되기까지 한 순간의 빛줄기와 같은 날들이다.

그 중 한 묘표에 들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 있다. 박관현(朴貫賢).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그는 1983년 광주감옥에서 40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옥사했다. 나는 당시 그의 운명을 나의 형들의 그것과 겹치고 있었다. 실제로 형들은 옥중에서 몇 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가장 길었던 건 51일간에 이른다. 나는 박관현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형들의 죽음을 거의 각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형들은 살아서 출옥했고 나는 망월동의 묘지에 와 박관현의 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 장소를 상상해볼 뿐이었다. 내 자신이 실제로 이 장소를 찾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 오기순(呉己順)이 교토의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은 광주에서 참극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때, 1980년 5월 20일이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감옥에 차입을 하러 면회를 다니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석방에 대한 일말의 희망의 조짐조차 보지 못하시고, 완전한 절망 속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침을 보지 못하고(朝を見ることなく』), 社会思想社 現代教養文庫)

광주 민주화항쟁과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7년 후인 1987년 '6월 민중항쟁'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투쟁이 한국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전두환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표명하고 그의 후계자인 노태우는 국민에게 '민주화'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군사독재 시대의 종식이 온 것이다. 이어 형들은 잇달아 출옥하게 된다. '그러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기쁜 일들을 어머니는 보시지 못했다. 절망의 나날들의 정경을 뇌리에 새긴 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그 절망의 기억만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산 자에게 있어 기억이란 날마다 갱신되는 것이지만 죽은 자의 기억을 갱신하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 생각이 나를 압도한다.

둘러보면 주위에 사람 그림자는 없다. 망월동의 산은 정적에 잠겨 있다. 비가 오려는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산비탈을 불고 지나간다. 무덤을 덮고 있는 풀이 나부낀다.

* * *

광주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대는 지났지만 그 때(1990년)는 아직 그 후계자인 노태우 정권이 집권하던 때였다. 아직 민간인 출신의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기 전이었다. 광주의 기억은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회자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능하면 광주교도소 옆을 지나가 주시겠습니까? 그냥 차 안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군사정권 시대의 한국에서는 시민생활의 여기저기에 '방첩'을 내세운 감시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하철의 전동차 안에는 신고처의 전화번호가 크게 쓰여진 '간첩신고'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택시기사는 거동이 수상한 승객을 태웠을 때는 즉각 신고하게 되어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성가신 일이 생기면 기사 본인이 위험한 것 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케이스인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신고 체제는 남아있었다.

한 남자가 혼자서 공항에서 망월동까지 승차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감옥이 보고 싶다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비지니스나 관광이 목적인 것 같지는 않다. 재일동포일까. 말도 유창하지 않고 발음도 서툴지만, '교도소'와 같은 한국의 특수한 용어를 알고 있는 것도 수상하다.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모범답안과도 같이 수상한 승객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신고당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어색한 긴장이 섞인 공기를 싣고 택시는 달렸다. 그리고 택시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에 무기질의 콘크리트 건조물이 보였다. 형인 서준식이 고문을 받던 곳, 미국에서 만난 여성의 남동생이 수감되어 있던 곳, 어쩌면 아직도 갇혀있는 곳이다. 그리고 박관현이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곳이다.

거기서는 1973년부터 74년에 걸쳐 수십 명의 비전향 정치범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기 위해 집중적인 고문이 행해졌다. 가족과의 면회, 차입도 일절 금지. 독서도 옥외 운동도 일절금지. 비전향수 한 명을 흉악범 수명과 한 감방에 가두어 흉악범으로부터 장기에 걸쳐 일상적인 폭행을 받게 하기. 주전자에 가득 넣은 물을 억지로 들이부어 마시게 한 후 부풀어 오른 위를 짓밟아 토하게 하기. 한겨울 영하 10도 이하까지 내려가는 바깥에 묶어서 방치하기. 온갖 폭행이 수개월에 걸쳐 계속되었다. 형은 깨진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그 모든 일들이 저 두껍고 높은 벽 너머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비정한 시대의 기억, 가장 음산한 폭력의 기억이 빼곡히 채워진 건조물이 택시의 창에서 보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광주여 영원히!**

처음으로 찾은 날부터 꼭 10년 후인 2000년 5월 18일, 나는 다시 광주를 향했다.

서울에서 탄 비행기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일행들이 같이 타고 있었다. 조금 후에 안 것이지만 그들은 서울의 한 교향악단의 멤버들, 광주 민주화항쟁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연주하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게다가 연주곡목에는 윤이상 작곡의 '광주여 영원히!'가 포함되어 있었다. (계속)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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