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의 일상화**
'9ㆍ11' 발생 직후 미국의 TV 방송들은 환성을 올리는 팔레스티나 민중의 영상을 내보냈다. 나도 그 무렵에는 매일 TV에 붙어있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혹은 비탄에 젖은 혹은 상실의 고통을 견디는 미국인들의 영상과 지극히 명료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영상은 평균적인 유럽과 미국인들이 지닌 '팔레스티나인은 테러리스트'라는 단순한 편견을 한층 견고하게 해, 적개심을 부추기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문제의 영상은 정보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설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팔레스티나의 민중이 '9ㆍ11'의 보도에 환성을 올리고 싶어지는 감정을 품게 된 원인일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런 자성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대테러 전쟁'을 선언하고 '테러의 위협'을 구실로 타국의 영역을 선제공격하는 국제법 위반의 전쟁을 정당화했다. 미국 국민의 애국열은 급상승해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갖가지 의심과 우려는 '테러와의 싸움'이라는 대의명분에 불식되고 세계는 '전쟁'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출구 없는 대립구조로 치닫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샤론 정권은 이 정세를 호기로 삼아 점령지에 대한 군사공격을 또 강행했다. 압도적인 무력에 의한 군사 공격과 자폭 공격에 의한 저항의 응전과 보복이 일상화되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망의 끝에서 극단적인 저항 수단을 택하고, 그에 대한 가차 없는 진압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아무리 곤란해 보여도 그 길의 앞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어떻게 자폭 같은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자폭 행위조차도 날로 일상화해 대단한 뉴스거리도 못 되고,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파괴와 살육이 식사와 배설처럼 일상화된 세계. 극한적으로 보이는 저항조차 금세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세계. 세계 그 자체가 자폭하고 있다.
일본을 출발하기 전에 "영국에 가는데 묵는 호텔은 미국 대사관 부근"이라고 했더니 "자폭 공격의 표적이 되니까 테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불운을 한탄하지 않을 자신은 없고, 공격한 자를 증오하지 않을 자신도 없지만, 그 운명을 끔찍하게 부조리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는 충분히 그와 같은 죽음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자폭 공격이라는 행위가 존재하는 한, 내가 거기에 말려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것이다.
하나는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살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기득권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재일 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책을 읽고 사고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종사하면서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개척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함 때문에.
***11층의 창**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의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하는 채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하게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내 방은 호텔의 11층에 있었다. 오래되고 전통 있는 호텔인 만큼 가구와 설비는 중후하지만 난방이 잘 안 들어 방안에 있어도 약간 추울 정도였으며 조명도 어두웠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틀이 낡아 잘 안 열린다. 힘을 가하니 귀를 거스르는 마찰음과 함께 창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깥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일본이라면 아마도 자살 방지를 위해 고층 빌딩의 창문은 맘대로 열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유럽에는 그런 건 없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당사자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 같다. 창밖을 보니, 어두운 중정을 사이에 두고 같은 호텔의 별관이 보인다.
투숙객이 없는지 아니면 폐쇄중인지 창문은 거의가 어두운 채이다. 하이드파크의 윗편에 희미한 달이 걸려있다. 지금 이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면…, 그런 생각이 깜빡거리며 점멸한다.
'누군가가 뒷 머리칼를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 머리칼을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이 너무 약한 것이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가족이라고 해야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부양해야 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형제나 친구들은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까. 그렇다고 해도 죽음은 늦고 이른 차이는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지금이면 안 되는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대학도 나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특별한 영향은 없을 것이다. 그 선생 한동안 안 보인다 했는데 잊어버릴 때쯤 해서 학내 소식란에 작은 부고가 실린다. 그렇게 동료의 죽음을 아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대학 업무는 계속된다. 내가 죽어도 그럴 것이다.
태어나 자란 교토로부터 도쿄로 옮긴지도 그럭저럭 12~3년이 된다. 지금 살고 있는 다마 지구의 소도시로 이사 온 것은 4년 전이다. 아파트인 탓도 있겠지만 지역 사회와의 교류는 일체 없다. 상당히 무리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지역 사회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지니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재일 조선인에게는 지방 참정권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나라에서 지역 사회에서도 나를 멤버로 간주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몇몇 사회운동 및 문화운동에 관계하고 있지만, 거기서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 운동과의 관계는 내 쪽에서 만든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나는 '작가=글쟁이'이다. 많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읽어주는 독자도 있다. 젊었을 때는 작가가 되는 것, 저서를 내는 것이 삶의 목표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와서 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앞으로도 납득이 가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있는데 그것도 창작욕과 사명감이라고 할 정도로 강한 감정은 아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동경심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했다고 하는 사실은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연결 끈이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연결 끈들이 나를 꽉 잡아 멈추게 해 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자기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외국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 와 있기에 평소부터 막연히 느끼고 있는 그런 생각들이 한층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감정의 모습을 나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것은 잘 생각해보면 결국은 아플 것이라 데 귀결된다. 만약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걸 안다면 뛰어내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우리들 망명자**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밸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라는 것이 금세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 것 같은 위험과 표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망명자는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버렸다. 거기서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라고 쾌활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한나 아렌트가 쓴 '우리 망명자들'의 한 구절이다.(<パーリアとしてのユダヤ人>, 寺島俊穂ㆍ藤原隆裕宣 옮김, 未来社) 글 속의 '우리 망명자들'이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미국에 머물렀던 유대인 망명자들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벼락 부자'를 지향하는 '동화 유대인'의 경향을 비판하고, 하이네, 라헬 파룬하겐, 베르나르드 라자르, 프란츠 카프카 등 오히려 의식적으로 '파리어(피차별자)'의 위치에 선 선인들의 삶을 상기하기를 제창했다.
나는 아렌트의 논지에 깊이 공감한다. 나 자신 '의식적인 피차별자'로 살아가는 것을 자신에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별도로, 아렌트가 비판하는 경향을 내 주위에서, 까딱하면 내 자신 속에서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일 조선인의 자살률은 틀림없이 일본인들보다 높을 것이다. 통계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나는 거의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활력에 넘치고 생명력도 왕성한 재일 조선인 이미지의 스테레오 타입이 일본 사회에 퍼져있는 듯하지만 내 인상은 반대이다.
자살한 아는 재일 조선인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 봐도, 화를 내야 할 때 서글프게 웃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스위치를 뚝 끄듯이 사라져버렸다는 인상이 강렬하다. 그런 죽음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아 역시나'라는 심정에 가깝다.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심정을 알 것 같다.
재일 조선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부조리한 경험을 자학적인 농담으로 표현하는 것에 능란한 지인이 있다. 그것을 두고 나는 농담으로 '재일의 유대 조크'라고 부른다. 농담의 주제는, 많은 경우, 재일 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일본인 다수자의 무지와 몰이해다. 그러나 다수자를 비웃기보다 사소한 것에도 상처받고 마는 자기 자신의 허약함을 웃는 익살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웃음으로 위태위태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적재적소의 재치 있는 농담을 연발하며 서비스 정신의 화신과 같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웃게 하는 그 친구를 보고 있으면, 같이 웃으면서 점차 불안이 솟아오른다. 이 친구는 오늘밤 자기 방에 돌아가 갑자기 목을 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불행히도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슬픔이나 분노에 앞서 '아 역시나'라는 납득에 가까운 심정이 들 것임에 틀림없다.
***일본인의 마음**
수년 전 증권회사에 부정한 이익 공여를 요구했다는 의혹 추궁을 받고 아라이 쇼케이(新井将敬)라는 국회의원이 자살했다. 그는 19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이다. 원래 이름은 박경재(朴景在)로 고교를 졸업할 무렵 귀화 수속을 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대장성 관료에서 와타나베 미치오 대장성(재무부) 장관의 비서관을 거쳐 중의원 의원에 대립 입후보했는데 선거를 목전에 둔 1982년 11월 '검은 씰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선거구로부터 입후보를 예정하고 있던 이시하라 신타로 의원의 비서가 그의 정치 홍보 포스터 3000장에 '북조선으로부터 귀화'라는 씰을 붙인 사건이었다.
'검은 씰 사건'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때 아라이는 낙선했다. 그러나 1986년에 재도전해 당선했으며 이후 자민당 소장 개혁파의 논객으로 매스컴의 총아가 된 적도 있다. 그런 그가 지검의 사정 청취를 받은 후 도쿄 도내의 호텔에서 허무하게 자살한 것이다.
아라이는 당초 의학부를 지망했지만 수험에 실패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한 후 도쿄대 이과에 입학 나중에 경제학부로 옮겼다. 졸업 후 일단 신일본철강(新日鉄)에 입사했으나, 회사에 적을 둔 채로 국가 공무원 상급 시험에 합격해 대장성에 들어갔다.
처음에 의사를 지망하나 대기업을 거쳐 대장성에 들어간 경로는, 일본 국적이 없어도 의사는 될 수 있지만 국가 공무원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르면 '화려한 변신'이라는 잘못된 칭송의 대상이 되기 쉽다. 아라이의 인생은 상승 지향을 충실하게 실천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자민당을 대표라는 모 거물 의원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 국수주의 입장에서 일본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정립시킨 일본 국학(國學)의 대표적 학자 : 역주)의 와카(和歌)를 인용한 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 와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본인의 마음(야마토고코로)이란 무엇인가라고 사람들이 묻거든 일순 피었다 미련 없이 순간에 지는 아침 해에 향기로운 산 벚꽃이라고 대답하리라"
고인이야말로 '일본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다운 깨끗한 죽음을 택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라이가 '일본인이 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에 의문을 느끼지 않는 다수자라면 '일본인이 되자'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일본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의식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상승 지향으로 일관했을까. 그가 지니고 있었던 것은 '일본인의 마음'이 아니라 '소수자(마이너리티)의 마음'이다. 그 죽음마저도 철저히 이용하는 것이 다수자(마조리티)인 것이다. (박일, '살아서 사랑하고 그리고 죽었다. 아라이 쇼케이의 유언장', <ほるもん文化8>, 新幹社 참조)
나는 여기서 아라이의 삶을 긍정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다. 만약 그가 살아있을 때 서로 알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도저히 친구는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자살에 '아, 역시나'라는 납득에 가까운 기묘한 감개를 느끼는 것이다.
투옥 사건에서 아라이 이상의 의혹 추궁을 받은 의원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자살하는 것은 언제나 비서이지 본인이 자살한 예는 별로 들은 적이 없다. 의혹 의원들은 아무리 중앙 정계에서 비난을 받더라도 연고지에 돌아가 삭발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설법이나 사죄 행각나 하면서 권토중래를 벼른다. 그런 모습이 또한 지역구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서울에서 상처받고 돌아온 무라(마을)의 아들을 받아들여, 위로하고, 격려해, 재기하게 하는 것이다. 유죄든 실형이든 쉽사리 기죽어서는 안 된다. 그에 비하면 아라이의 자살은 너무나도 나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에게는 이 [무라(마을)]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됐어, 그만 끝을 낼까라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 몸을 내밀려고 할 때 확 뒷 머리칼을 잡아채어 이편으로 잡아 끌어당기는 힘의 하나는, 의심할 바 없이 '국민'이라는 관념이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고향과 풍토,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 조상이 남겨준 유형무형의 재산,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혈통, 과거에서 장래로 계속되는 '국민'의 전통, 고유의 역사와 문화-하나하나 자세하게 검토하자면 근거가 희박한 이 관념들이 단단히 모여 있는 것, 그것이 '국민'이다.
여기서 죽으면 가까운 이들에게 죄송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엾다, 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가족', '향토', '모교', '우리 회사', '우리 마을' 등을 거쳐, '국가'나 '국민'에 결합된다. 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 '국민'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회수되고 마는가. 그 연속성은 논리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당사자들은 꿈쩍도 안한다. 비논리적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론이 아닌 것'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며, 그걸 모르는 자는 '국민'이 아닌 것이다. 무적의 논법이 아닌가.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다'고 부정에 대한 사죄를 한 정치가는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사직도 자살도 하지 않고 현직과 현세에 달라붙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그들의 뒷 머리칼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틀로부터 추방된 디아스포라의 경우는 그렇게는 안 된다. 아주 최근에 '국민'의 틀에 들어온 신참자의 경우도 사정은 흡사할 것이다. 아라이 쇼케이가 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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