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오는 6월19일 환갑을 맞는다. 하지만 아웅 산 수지 여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미얀마 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된 상태여서 그의 환갑을 맞는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은 스산하기만 하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 단체와 이들과 연대하는 국제 인권 단체들은 아웅 산 수지의 환갑을 맞아 미얀마 군사 독재의 부당함과 그들의 인권 탄압 현실을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지 활동가들은 수십 년간 군사 독재를 경험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대를 누구보다도 원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와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얀마 현실에 대해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
우리나라에 망명해 있는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에 대한 천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닐뿐더러, 특히 최근에는 대우 인터내셔널이 미얀마 인근 해역에서 대량의 천연가스를 시추한 것을 계기로,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 과정에서 현지 인권 유린을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점에 지난 6월초 하버드 법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송지우(26)씨가 태국-미얀마 국경 근처로 미얀마 민주화 연대 활동을 위해 떠났다. 하버드 법대는 수년째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고, 이번 활동 역시 이 프로젝트의 연장에서 기획됐다. 송씨는 아웅 산 수지의 환갑을 맞아 <프레시안>에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글과 현지 활동가와의 생생한 인터뷰를 보내왔다.
'5·18 광주 항쟁' 25주기, 1987년 6월 항쟁 18주기를 맞은 이 시점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국제 사회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그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취지에 송씨의 글을 싣는다. 그는 이 글에서 군부 독재가 개명한 '미얀마' 대신 민주화의 열망을 담아 민주화 세력이 널리 쓰는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편집자.
***아웅 산 수지의 생일에 바라보는 버마**
"노벨 수상자를 구속 수감하는 유일한 나라,"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 산 수지가 수년째 자택 감금 중인 버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는 6월 19일 아웅 산 수지의 환갑을 앞두고 인권 단체와 버마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국제사회에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웅 산 수지는 1962년부터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 지내고 있는 버마 민중의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웅 산 수지는 누구인가? 1947년 암살당한 독립 운동가 아웅 산 장군의 딸이며, 인도와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88년 노모의 간병 차 들린 고국에서 일고 있던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2세 민족 영웅'. 1990년 군부가 국내외 압력에 따라 마침내 민주적 선거를 열기로 했을 때 민족민주동맹(NLD)의 압승을 이끌어 낸 주역. 그러나 군부가 선거법을 소급 개정함으로써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그를 정치범으로 규정함에 따라 1989년부터 현재까지 총 9년이 넘는 자택감금 조치를 받은 '양심수'.
세계 여러 신문의 국제 면이나 국제 시민·사회단체 홈페이지에 주로 나오는 내용이다. 필자가 한국 기업의 버마 자원 개발 상황을 연구하게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오기 전까지 아웅 산 수지에 대해 이해한 바도 이 정도였다. 군부를 피해 버마-태국 국경을 넘어와 있는 버마의 민주화 운동가, 지식인, 학생,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면서야 필자는 아웅 산 수지가 상징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버마 문제의 또 다른 핵심 : 소수 민족 문제"**
이곳에 와 필자가 만난 버마인들은 통성명을 할 때 이름을 말한 후 반드시 자신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를 이야기한다. 버마에는 주로 중앙의 평지에 거주하는 버마족 외에 외곽의 산지나 해변 가에 거주하는 샨 족, 카렌 족, 아라칸 족, 몬 족, 카친 족, 카레니 족 등 여러 소수민족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 생활방식을 지켜오며 살아오고 있다. 그 중에는 샨 족이나 몬 족, 아라칸 족처럼 과거 버마 족에 버금가는 왕조를 이뤘던 민족도 있고, 카렌 족처럼 전통적으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차별과 하등민족 취급을 받아 온 민족도 있다.
"처음 버마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는 소수 민족 문제는 어서 극복하고 치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태국에 도착한 첫 날 밤 만난 호주 인권 운동가가 해 준 말이다. 며칠 뒤 만난 한 샨 족 망명 정치가는 "소수 민족 문제는 버마 문제의 핵심이다"라고까지 말한다.
문제는 소수 민족 문제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수 민족 단체 중에는 버마 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곳도 있고, 미국과 같은 형태의 연방제를 원하는 단체도 있다. 군부에 대한 투쟁 방식도 카렌 민족(Karen National Union)이나 카레니 독립 기구(Kachin Independence Organization)처럼 무장 투쟁을 선택한 단체가 있는가 하면 국제무대에서 정치 세력화에 주력하는 단체, 주로 소수 민족을 상대로 자행되는 인권 탄압을 폭로하기 위해 정보 수집과 배포에 주력하는 단체도 있다. 버마 운동권은 '단체'가 많기로, 그만큼 운동의 목적과 방법론이 다양하기로 악명 높다.
아웅 산 수지가 상징하는 바는 그래서 중요하다. 버마 내외의 많은 논객은, 1990년 선거에서 민족민주동맹이 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로 아웅 산 수지가 제시한, 그리고 상징한 화합의 가능성을 든다. 아웅 산 수지의 아버지 아웅 산은 1947년 암살 당하기 전에 소수 민족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연방권을 주고 그 권리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헌법 선포에 힘쓰고 있었다. 소수 민족에게는 미흡하나마 희망적인 타협이었던 이 헌법은 그러나 아웅 산의 암살 이후 지켜지지 못했고, 1962년 네 윈 장군의 군사 쿠데타 때 무효화되었다. (1947년의 헌법이 폐기처분되어온 과정을 소수 민족 활동가들은 '60년 된 배신'이라고도 한다.)
버마 사람들에게 아웅 산 수지는 아버지 이후 거의 유일하게 소수 민족의 권리와 연방제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한 정치인이다. 그가 특권 민족인 버마족 중에서도 특권층에 속한다는 점, 조국의 민주화 투쟁에 비교적 늦게 동참한 점, 그리고 (1990년 선거운동 당시 버마 군부가 널리 홍보했듯이) 과거 식민 강탈국이었던 영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지냈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수 민족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웅 산 수지 환갑 맞아, '버마 민주화' 목소리 높여**
아웅 산 수지의 60회 생일을 버마 관련 단체들은 버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시키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미국 버마 캠페인(US Campaign for Burma : 버마 민주화 단체)과 영국 버마 캠페인(Burma Campaign UK : 주로 버마에 진출하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은 '국제적인 풀뿌리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70회 생일을 맞았을 때의 행사들을 모형으로 삼은 이 운동은, 6월 17일과 19일, 전 세계 사람들이 각자의 거주지에서 집회를 열거나 일일 구속 체험을 벌이는 행사, 지역의 버마 대사관을 항의 방문하는 행사 등을 벌이고 있다. 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아웅 산 수지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카드를 모아 6월 19일 미국 버마 대사관에 전달할 계획이다.
이곳 태국에서도 방콕, 치앙마이 등 주요 도시와 버마-태국 국경에서 생일 행사가 열린다. 주로 버마 활동가들이 추진하는 현지의 운동은 좀 더 버마 문화 색을 띤 '옐로 캠페인' (Yellow Campaign)이다. 버마인들은 '햇살처럼 밝은' 노란색을 불교적 색깔이자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색깔로 이해하며,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은 따라서 노란색을 운동의 상징적 색깔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태국 현지 운동가들은 6월 19일 노란색 옷을 입거나 장식을 다는 행사를 열 예정이다. 그리고 버마 내의 버마인들에게는 6월 19일 외출을 하지 않되 반드시 해야 한다면 노란색 옷을 입고 나가는 '침묵 옐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국 드라마 대인기, 한국 기업 '인권 침해' 어두운 면"**
서울에서도 6월 19일 한국 민족민주동맹 지부의 주도 아래 아웅 산 수지 생일축하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필자가 태국에 와서 만난 버마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에 대한 정보나 관심이 많았다.
최근 한국 기업의 버마 진출이 활발해지고 버마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음에 따라 버마 사람들에게 한국은 '국제 인권과 민주화에 관심 있는 여러 나라 중 하나'를 넘어 '버마에서의 삶의 일부'가 된 듯하다. 이 곳에 만난 버마 사람들에게 이름을 '지우'라고 소개하면 곧잘 "'대우'랑 비슷해서 기억하기 쉽겠다"고 답한다. 향후 몇 년간 버마 군부의 최대 수익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우 인터내셔널의 버마 천연가스 개발 사업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통성명을 하고 나면, 특히 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한국 드라마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지기 일쑤다. 드라마 제목이 버마어로 번역되기 때문에, 그들이 열광하는 드라마가 어떤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줄거리를 한참 듣는다. (덕분에 '준서'가 <가을동화>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국에 불법 거주자 신분으로 넘어와 국제 관계 공부를 하고 있는 한 젊은 버마 여성은, 버마 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느냐고 묻자 남자 주인공들이 좋다고 말하면서 좀 더 어두운 말을 덧붙인다. "버마 텔레비전은 내용이 두 가지에요. 에스피디시(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국가평화발전협의회 : 현 버마 군부의 명칭)가 한 훌륭한 일들하고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 정부하고 한국 기업 관계가 좋으니까 한국 드라마가 많이 들어오나 봐요."
버마 사람들이 필자의 이름을 '대우'와 연관지어 기억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도 내 이름이 대기업과 연결되는 게 어색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국가평화발전협의회가 해외 기업에게 천연자원 개발을 허용한 이후 가스 개발을 하러 들어간 대개의 초국적 기업 사업은, 강제 노동과 고문, 강간 등 대대적인 인권 침해와 생태계 교란 등의 환경 파괴를 낳았고, 지금도 이 기업들을 상대로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인권 침해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버마 민주화 외면하는 초국적 기업의 버마 진출에 한국 동참"**
그 중 버마 남서쪽 해안에서부터 카렌 주를 지나 태국에 이르는 가스관 건설을 주도했던 미국 기업 유노칼은, 미국에서의 법정 소송이 불리해짐에 따라 카렌 족 출신인 원고인들에게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합의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미 버마 현지인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유노칼'이라는 기업 이름은 '인권 침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초국적 기업의 버마 천연자원 개발 사업은 개발에 도움을 주기보다 군부의 수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버마 내외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 아웅 산 수지 또한 초국적 기업들에게 "버마에 들어가지 마라"고 여러 차례 호소해 왔었다.
한국 여러 경제 일간지의 자축성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우 인터내셔널이 현재 시추탐사 중인 버마의 A-1 광구는 과거 유노칼의 가스 개발 사업보다 규모가 몇 배 크다. 대우 인터내셔널은 한국가스공사와 두 개의 인도 기업과 컨소시엄을 이뤄 이 광구에서의 사업을 2000년도부터 진행해 왔고, 컨소시엄 지분의 60%를 보유하고 있는 주도기업이다. (한국가스공사는 1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A-1 광구는 버마 서쪽 아라칸 주의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이에 따라 아라칸 민주화 운동단체들은 이미 강도 높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가스 송달 방식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만약 아라칸 주를 지나는 가스관이 건설될 경우 과거 유노칼 사업 때처럼 인권 침해가 일어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라칸 단체들과 국제 환경 단체들은 또 가스 송달과는 별개로, 어업을 주로 하는 아라칸 주의 해상에서 대규모 가스개발 사업을 벌였을 때 그곳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비판하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우의 가스개발 사업이 군부에 막대한 수익을 올려줌으로써 군부 통치를 더 견고하게 할 것이라는 게 버마 운동가들의 우려다. 아라칸 주와는 정반대 북동부에 위치한 샨 족 활동가를 만났을 때 그가 "대우는 버마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버마 여성은 필자에게 "한국 사람들은 버마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 지내면서 버마 소식을 접한 적이 거의 없는 듯했다.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에는 버마의 역사나 정치적 상황, 문화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커녕 신문 기사도 많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업과 문화가 버마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고,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웅 산 수지의 60회 생일을 맞은 국제 인권, 민주화 단체들의 활동은, 적어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게는 단지 '해외토픽'이 아닌 듯하다.
***인터뷰 : '버마여성동맹'의 두 활동가를 만나다**
태국에 도착한지 닷새째인 6월 10일, 버마의 여러 소수 민족 여성단체들의 연대 모임인 버마여성동맹(Women’s League of Burma) 사무실을 방문했다. 비록 며칠밖에 태국에 머물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버마 민족과 소수 민족, 그리고 소수 민족 간의 갈등을 느꼈었기 때문에 여러 소수 민족 단체를 하나로 묶고 있다는 이 모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단체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활동가 낭 옌(40)과 르웨 에 낭(27)을 인터뷰하기로 했다.
두 활동가는 민족 배경 뿐 아니라 '정치적 세대'도 다르다. 샨 족 어머니와 카투 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버마 북부 카친 주에서 자란 낭 옌은 1988년 양곤의 학생운동과 1990년 민족민주동맹 선거 운동에 동참했던 이른바 '88세대'이다.
양곤에서 자란 버마 족과 달리 '시골'에서 힘겹게 양곤의 대학에 유학했던 낭 옌은, 부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학생운동의 초기에는 "민주화 연설을 찾아다니기는 했지만 뒷 편에서 혼자 숨어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된 군부의 탄압과 동급생들의 구속, 고문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고, 군부의 휴교 조치에 따라 고향에 내려와 있던 1988년의 여름부터 고향에서 연설과 집회, 군부의 만행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료 퍼뜨리기 등을 조직하며 '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 선거를 앞두고 국경 밀림 지역에서 민족민주동맹과 연대활동을 벌이던 중, 1992년 군부가 학생 활동가들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수배생활을 거듭하다 카친 독립군의 점령 지역이던 국경 밀림 지역에 들어가 함께 피신해 와 있던 여성 운동가들의 모임 버마여성연합(Burma Women’s Union)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1995년부터 태국으로 넘어와 활동 중이다.
낭 옌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동안 르웨 에 낭은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르웨 에 낭은 샨 주에 거주하는 팔라웅 족 출신이고, 그가 자란 지역은 1차 산업에 의존하는 농촌이다. "88 운동이 일어나던 때 5학년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고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남부에서 차밭으로 아르바이트 온 버마 족 청년들이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1988년에 일어난 일이나 아웅 산 수지가 누구인지 처음 알게 됐다. 지방까지 정보 전달이 부족했던 것이다. 특히 독립군과 버마 군대 간 분쟁지역은 더 그렇다."
르웨 에 낭이 대신 겪은 것은 일상화된 군사 분쟁과 버마 군인들의 인권탄압이었다. "어렸을 때 싸움이 하도 많아서 나는 총소리를 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집이 좀 컸는데, 빈 방에는 늘 양곤에서 온 버마 군인들이 지냈다. 아버지, 어머니가 군인들을 두려워해서 나가라고 하지 못했다. 그런데 군인들이 남자 아이들은 열두 살만 넘으면 데리고 가서 군수 물자 나르기 같은 강제노동을 시켰다. (민간인을 군사 짐꾼으로 사용하는 '포터링(portering)'은 버마 국경 지역에 만연한 강제노동의 대표적 형태이다.) 그렇게 다녀오면 몸이 상하고, 종종 말라리아도 걸려서 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들들을 모두 도시 학교로 보낸다. 결국 마을 중학교가 문을 닫았다, 학생이 없어서."
서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만났지만, 버마여성동맹은 유엔에의 인권 보고서 제출, 각 소수 민족 단체 젊은 활동가 교육, 여성 성폭행 방지 활동 등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여성 운동가들이 이처럼 여러 민족과 배경, 세대를 아우르는 연대 모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르웨 에 낭은 일면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여성 모임이 규모마저 작거나 여러 군데 흩어져 있으면 아무데도 끼지 못한다. 버마 민주화 운동 단체들도 무시하고, 국제 회의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버마여성동맹은 그러나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을 딛기 위한 도구적 선택만은 아니었다. 낭 옌은 이 모임을 버마 민주화 운동의 성숙의 증거로 이해한다. "내가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학생운동가들도 '민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고, 소수 민족 단체들은 각자의 독립 문제 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 안에서 생긴 여성단체들은 민주화나 버마 군부의 인권문제보다는 각각의 소수 민족이 좀 더 나은 사회경제적 삶을 누리는 데에 주력했다. 버마여성동맹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단체들이 지향하는 여러 가지 목적이 더 근본적으로는 정당하지 못한 버마 군부에 대항하는 '정치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낭 옌은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사회가 발전한 나라라면, 여성운동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고 가정도 꾸릴 수 있다. 그렇지만 버마 여성운동가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운동과 나머지 인생 중에서. 태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태국에서 돈도 벌 수 없고, 불법 거주 신분이니 유엔 회의에 가려다 태국 공항에서 구속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르웨 에 낭은 버마의 상황을 "슬프다"고 표현한다. "버마 군부는 자신들의 나라가 이미 재앙(disaster)이 되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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