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학계의 대표인사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분법적 평가가 대치하고 있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를 시도해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식회사 한국'의 CEO 박정희의 공 인정해주자"**
백 교수는 다음 주 나올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기고한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글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공과에 대한 엄밀한 평가를 시도했다. 이 글은 2004년 11월 호주 월롱공 대학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기조 연설문을 첨삭한 것으로,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릴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세 편의 글 중 하나이다.
백 교수는 우선 박정희 찬반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경제 업적'과 관련, "민주화 세력이 당시나 그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하기까지 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기도 했던 '주식회사 한국'의 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식 고도성장 모델'의 창안자로 박정희의 '지적 재산권'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수출 전략에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획일화를 포함한 다른 전략들을 '한국식'으로 배합해간 주역은 박정희였다"고 말했다. 그는 "독재만 하고 경제성장을 못 이룬 독재자가 많다는 점에서 또 한국에서와 같은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어쨌든 박정희는 유공자는 유공자"라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한번 탈락하면 항구적 약자로 전락하기 일쑤고 약자는 강자로부터 사람 대접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존 세계체제의 현실에서 우리가 애써 쟁취한 그나마의 민주적 가치를 보존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시대에 이룩된 경제 성장에 대해 일정한 평가를 해줌과 동시에 그의 경제 전략 중 어떤 것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고 그런 것들이 박정희가 침해한 민족주의-민족화해 등의 목표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절실해진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박정희 시대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해 "대체로 민주화 운동은 노동자의 권리와 공해 억제를 주장하고 부정부패, 정경유착 등 각종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규탄하는 데 앞장서기는 했지만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안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대안 부재'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대부분의 반정부 인사들이 주로 인권 탄압을 이유로, 거기에 더해 문인들은 농촌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함부로 파괴하는 데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산업화 추진 방식에 반대했지만 그것이 우리가 자본주의적 근대 또 박정희식 근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충분한 답은 못 됐다"며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는 급진적 분파들이 대규모 외자도입에 의존하는 (박정희식) 수출주도형 성장 모델을 배격하고 좀더 '내포적인' 발전 노선을 제창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개방형 모델이 좀더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
백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를 '유공자'로 평가하면서도, 그 '유공자'는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일 뿐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백 교수는 박정희가 유공자임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고속성장뿐 아니라 역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최선의 것이었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재평가' 작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수 진영의 일방적인 '박정희 찬양'과 선을 그었다.
그는 "박정희식 개발은 이중의 의미로 지속불가능했다"며 "첫째 군사주의 문화와 대대적인 환경 파괴에 근거한 박정희식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avelopment)'과 상치되는 것만큼은 분명했고, 둘째 박정희식 개발은 훨씬 좁은 의미로 이런 개발 정책 자체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의미로 '지속불가능'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서 냉전'이라는 세계정세가 뒷받침하는 동안은 반공과 경제성장의 결합이 박정희 정권을 지탱하는 데 효력을 발휘했다"면서도 "하지만 '잘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에 기반을 둔 박정희식 경제 성장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다른 종류의 욕구가 대두된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하지 못했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것도 국민의 통일 열망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또 동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어 가는 세계정세 속에서는 지속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식 경제성장, 민주화 세력의 공 역시 재평가돼야"**
백 교수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의 '공' 역시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재평가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다소나마 지속가능하게 된 데는 정치적 비판자들의 경제적인 공헌 또한 인정해야 옳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0년대만 해도 산업공해를 들먹이는 것은 곧 '용공'의 혐의를 뒤집어쓰는 일이었으며, 최소한의 노동자 권리나 정경유착의 폐해를 언급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위험했다"며 "이런 사태가 아무런 도전 없이 지속되었더라면 민주주의가 성취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경제발전 자체가 실제보다도 훨씬 덜 지속가능한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개혁 없는 경제발전의 추구는 여러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처럼 결국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쇠퇴를 낳거나,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서처럼 원리주의적인 신정(神政) 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즉 박정희가 경제 성장에 기여한 나름의 공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박정희만의 것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의 기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박정희 향수'야말로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
백 교수는 결론적으로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건 간에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며 최근의 '박정희 향수'와 그에 기대보려는 일부 정치인의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오늘의 세계는 박정희 시대와는 너무나 달라졌고 동시에 우리를 옥죄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박정희 향수'에는 기본적인 제반 권리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무감각,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잘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 이상의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가 내장돼 있다"며 "바로 '박정희 향수'야말로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일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런 유산들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박정희 또한 그의 정당한 몫을 인정받기까지 그 병적인 작용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을 담보하면서도 환경친화적이고 민주주의ㆍ민족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경제모델과 같은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을 창안해야 하는 오늘날의 과업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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