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가 고 이경해씨의 자살소식을 접한 전세계 농민들은 한결같이 "카길이 이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미국의 곡물 메이저인 카길과 이경해씨 자살 사이에는 무슨 연관고리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금이라도 국제식량시장의 사정을 아는 이들은 "카길이 이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카길은 국내 수입곡물시장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말 그대로 국내농민의 최대 천적이기 때문이다.
쌀을 제외한 식량의 자급률이 12%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농민들에게 카길은 말 그대로 저승사자인 셈이다.
***카길, 한국 수입곡물시장의 60% 장악**
미국은 농민 숫자가 전체 미국인구의 2%인 2백만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 곡물 및 사료시장의 8할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농업국이다. "미국이 독하게 마음먹고 향후 20년간 식량수출을 금지하면 미국 이외의 국가는 모조리 처참하게 멸망할 것"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식량파워'는 실로 엄청나다.
이같은 미국 식량파워를 대표하는 맏형이 다름아닌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카길이다.
우리는 흔히 카길을 비롯해 벙기, 루이 드레프스, 앙드레, 인터콘티넬탈 등 미국의 5대기업을 일컬어 '세계 5대 곡물메이저'라 부른다. 이들이 세계 곡물거래량의 80%, 미국내 곡물거래량의 85%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865년 창업한 카길은 엄연히 5대 곡물메이저의 맏형 노릇을 해왔다.
그러던 것이 1998년 11월 카길은 5대 메이저중 하나인 인터콘티넨탈의 곡물사업 부문까지 인수함으로써 5대 메이저를 4대 메이저로 줄이는 동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파워로 자리를 굳혔다. 카길은 이 기세를 몰아 지난해인 2002년에 5백8억달러(우리돈 60조원) 매출에 8억2천3백만달러의 순익을 올렸다.
세계 주요국에 1백여개의 자회사와 1천여개 공장, 9만7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카길은 밀, 쌀, 옥수수, 콩, 식용유, 오렌지 농축액,커피, 육류, 맥도널드 햄버거용 통닭,통조림 등 거의 모든 종류의 농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1998년 인터콘티넨탈 인수를 계기로 국내 수입곡물시장의 6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한국의 명줄'인 먹거리를 쥐고 있는 저승사자인 셈이다.
이처럼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카길의 기업지배구조는 봉건적이기로 악명높다. 이 회사를 창업한 카길가(家)와 맥밀런가는 자손 75명에게 주식을 분산함에 따라 현재 미국내 기업중에서 개인소유 비중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 유명하다. 워낙 '독점적 이윤'이 큰만큼 기업 공개보다는 '세습'을 선호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 전세계에서 가장 전근대적 '곡물 재벌'인 셈이다.
***'박동선 스캔들'의 배후**
카길은 단순한 곡물수출기업이 아니다. 카길이 전체수입중 농산품 가공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카길의 자회사로 미국내 외형 3위의 통조림회사인 엑셀사는 농산품 가공품외에 철강, 비료, 소금 등 다종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카길은 동시에 생산비를 크게 절감시켜 줄 유전자공학에 천문학적 거액을 투자해, 유전자 농산물 생산에 박차를 가해 이를 세계 전역에 수출하고 있다.
카길은 또한 1기당 설치비용이 1억달러를 넘은 항만 전용 엘리베이터 40기 이상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카길의 최대강점은 각국 정부보다 먼저 각국의 농업작황을 파악할 정도로 기민한 정보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인공위성과 자회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기초로 흉작이 들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미국을 비롯한 전셰의 해당곡물을 매점매석한 뒤 가격을 폭등시키는 수법으로 막대한 차익을 챙기고 있다. 곡물작황을 놓고 머니게임을 벌이고 있는 시카코 선물시장 등에 개입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카길은 인공위성을 통해 러시아 등 세계 주요 곡창지대의 작황을 매일 세 차례씩 체크하고 있을 정도로 정보력이 대단해, 미국의 CIA(중앙정보국)조차 카길에서 정보를 알아볼 정도다.
카길은 또한 전직 관료 등 로비스트를 고용해 미국정부를 매수하거나 외국독재정권과 결탁해 검은 정치자금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면서 부당한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1976년 한국의 박정희정권 및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박동선 커넥션'의 막후 곡물상도 카길로 알려지고 있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물결의 배후에도 카길이 존재하고 있다. 1993년 전세계 농민의 분노를 산 미국측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안의 경우 미국 농무차관 출신의 카길 고위임원 앰스태시가 작성한 초안이 그대로 미국정부안으로 겉장만 바뀌어 제출돼, 거의 원안대로 통과됐다. 지난 10일 고 이경해씨를 죽음으로 내몬 멕시코 칸쿤에서의 WTO 농업협상에도 카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정부는 '카길의 세일즈맨'**
미국 정부는 한마디로 '카길의 세일즈맨'에 불과하다.
지난 8월26일 미국의 앤 베너먼 농무장관은 두 퀸린 중국 농업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콩수입 제한에는 근거가 없다"며 "중국이 이를 거부하면 WTO에 제소할 수도 있다"고 노골적 압력을 가했다. 이는 올 들어 7월까지 콩 수입량이 1천2백30만톤에 달해 전년동기대비 1백47% 급증한 중국이 미국산 콩에 대한 수입 제한조치를 발동하면서, 카길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9월초 중국을 방문한 존 스노우 미 재무장관도 중국정부에 마찬가지 압력을 가했다.
카길은 북한 시장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카길은 "만성 식량부족국인 북한은 미래의 중요한 거래처"라며 그동안 구상무역 등의 형태로 북한시장에 타고들기 위해 여러 차례 물밑접촉을 벌여왔다.
***세계의 저승사자, 카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카길의 범지구적 영향력은 한층 거대해질 전망이다. 환경파괴-산업화 등에 의한 식량부족의 결과, 곡물가 폭등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곡물시장은 1996년부터 폭등단계에 접어들었다.
한 예로 정확한 정보수집력과 분석력으로 명성높은 워싱턴 월드워치 연구소의 레스트 브라운 소장은 21세기의 식량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망하고 있다.
"1950년부터 1984년까지 34년 사이에 세계의 곡물수확량은 매년 3%씩 늘어 1인당 40%가량 공급량이 늘었다. 그러나 1984년이후 수확 신장률이 1%로 줄어들어 인구증가율 2%에 못미치고 있다. 그 결과 1994년도의 1인당 공급량은 1984년보다 도리어 10% 줄어들었다.
생산량 정체의 원인은 경작지 감소, 수자원 고갈, 한계에 봉착한 화학비료 효율 등이다. 이는 미국, 중국, 인도 등 3대 생산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제약이다.
세계 경작지 면적은 1950년부터 1981년사이에 24% 늘어났으나, 그후에는 공장용지와 도시시설로 전용되면서 줄어들고 있다. 또 지하수의 과잉개발로 미국 남서부와 중국 북부, 인도 펀잡의 대곡창지대는 물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아울러 토양 침식, 오존층 파괴, 온난화 같은 환경파괴도 식량 생산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현재 세계 경작지에서는 연간 2백40억톤의 표토가 침식되고 있다.
무엇보다 큰 변수는 급속한 공업화와 소득향상을 실현중인 중국의 12억 인구가 세계의 식량수급에 미칠 영향이다. 소득이 늘수록 곡물에서 육류로 소비패턴이 바뀐다. 그러면 엄청난 곡물이 사료로 소비된다. 중국은 국내에서 증산한다 할지라도 농지면적, 수자원, 비료효과라는 3대 장벽에 부딪쳐 결국은 거대한 식량수입국이 될 것이다. 쌀, 밀, 기타 곡물류 순서로 세계의 식량가격을 중국이 크게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브라운 소장의 예언은 지금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경해씨의 죽음은 이같은 거대 골리앗 카길과의 '외로운 싸움' 끝에 발생한 '타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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