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버린 정부, 국민들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무기한 단식농성이 시작된지 이틀째.
오늘은 성난 민심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난데없이 황사가 몰려오고 바람도 제법 매섭게 불어대고 있구나. 연일 촛불을 밝히며 못난 어른들을 거리로 다시 이끌어내는 교복차림의 앳된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늙은 학생이 되어버린 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단다.
엄마와 아빠는 70년대 광폭한 시대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살아갈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결혼을 하며 서로 약속을 했지. 아이를 갖지 않기로 말이다. 험한 세상에서 피해만 안겨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막상 아빠가 예비군 훈련에 가서 정관수술을 받고 왔다고 이야기하던 날에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 이상하게도 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란 아마도 아이조차도 내 마음대로 낳을 수 없는 이 사회의 야만성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지. 마침 YH사건이 막 전개되고 농성에 들어가 있던 때였는데 소화도 잘 안 되고 너무나 피곤했단다. 위장병 치료도 받고 혹시나 싶어 회충약까지 먹으려 하는데 묘한 예감을 느꼈는지 아빠가 약 먹기를 말리더구나. 그랬단다. 엄마 뱃속에는 이미 네가 있었던 거야. 그렇게 얻은 너였으니 엄마, 아빠에게 너란 존재가 얼마나 귀했을지 헤아리고도 남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네가 자라면서 엄마는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지. 그건 바로 이 사회의 교육이라는 거였어. 엄마는 소신대로 최대한 자유롭게 네 스스로의 의지를 존중하며 키웠지.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겨우겨우 이름 석자, 집주소, 부모이름만 가르쳐 들여보낸 기억도 난단다.
학원도 안 보내니 또래보다 동생들을 돌보며 자랐지. 덕분에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는 인기 최고였지. 그렇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할 수밖에. 중학교 때 50등 중에 25등 했다고 담임선생님이 엄마를 호출했을 때 너무나 미안해하는 너에게 엄마는 '얘, 걱정하지마.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그리 걱정하면 네 뒤의 25명은 무엇이 되니? 공부가 다는 아니다.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영어, 국어는 뛰어나도 수학을 그렇게도 못하던 네가 결국 돈을 벌어야 한다며 이과를 선택했지. 그렇지만 적성과 관계없이 진로를 선택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받아야만 했던 너는 두 번이나 대학을 새롭게 선택해야만 했어. 남몰래 생각하기도 했단다. '남들처럼 교육체제에 순응하면서 내가 나서서 과외며 학원이며 챙겨보냈더라면 너의 이런 질곡은 없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엄마는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것만은 잘 배웠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엄마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말이다, 이 나라의 그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체계에 희생양이 네가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대학 서열화, 입시위주의 교육 속에서 아이들은 좋은 기회를 다 놓쳐간다. 좋아하는 음악 하나 배울 틈 없이 21세기에 자라나면서도 다양한 재능을 발휘해보지 못하고 있어. 다양한 재능을 발굴하고 그것을 키워주는, 여러 사회적 가치를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교육이 아닌 오로지 줄 세우는 교육을 하면서 그 재능을 다 죽여버리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니. 이것이야 말로 손해보는 교육이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말이다. 엄마는 늘 희망을 찾아내는데 선수가 아니니.
지금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 학생들을 보렴.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라 평가되는 요즘 아이들이 이곳 청계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와서 자기문제로 여기고 이 속에서 토론하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있어.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거리에서 배우고 있지 않니?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를 배우는 것이고 삶의 실제를 배워가는 것 아니겠니. 또, 국민을 무시하는 정부에 당당하게 항의하는 아이들은 이미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경험하고 있는 거야.
이 많은 군중 속에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다 나쁘지만 바로 그 아이들이 생생한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점 하나는 건질만 한 일이라 본단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아이들이 스스로 하면서 스스로 산 교육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야.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교육은 바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우병 정국을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다보니 장애인교육지원법을 통과시킬 때가 많이 생각난다. 장애인 부모들은 아이들보다 하루를 더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싸웠어. 229명 의원. 헌정사상 최다 서명이었어. 이게 정치운동이야.
민주노동당 의원은 법안통과를 주장하며 농성을 하고 부모들은 여야 양당에 법안을 가지고 장사하지 말라며 항의했지. 부모들의 절실한 마음이 법을 만들어내고 민주노동당 의원은 바로 그 아프고 절실한 부분을 대변한 거야. 지금 광우병 역시 나야 10년 뒤에 발병한다 해도 거의 70세야. 그런데 내 아들, 손주를 생각해 봐. 나도 그런 생각하면 자다가도 분노로 잠도 안 온단다. 거리로 나오는 아이들은 그토록 절실한 거야. 민주노동당이 그 절실한 마음을 대변해야 하는 때가 다시 온 거고.
대학등록금상한선제만 봐도 그렇지. 전문의대 등록금 2000만 원이다. 교육에서 돈이 없으면 선택의 자유가 없어.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교육자율화는 바로 돈이 있는 만큼의 자유를 준다는 뜻이야. 광우병 문제도 마찬가지다. 돈 없으면 안전한 먹거리 먹을 자유가 없단다. 교육과 건강만은 '돈의 자율'을 적용해서는 안 되지 않겠니? 돈 있는 만큼의 학벌, 돈 있는 만큼의 건강. 이 사회의 교육문제와 건강문제는 결국 이렇게 하나로 통하게 되어있어.
엄마와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17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이라크파병을 저지하기 위해 의원개인사무실을 정리도 하기 전에, 공사도 안 끝난 의정지원단 사무실에서 돗자리를 깔고 농성을 시작해야 했지.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날에도 광우병쇠고기수입을 저지하기 위한 단식투쟁으로 장식을 하게 되었어. 누구나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먹어야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도 돈이 없어 못하는 불행은 이제 끝내야지. 국민들이 이제 이것을 스스로의 문제로 생각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구나.
민주노동당이 하는 것은 그것을 도와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지. 바로 정치를 개인권력으로 생각 않고 소외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역할이야.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은 의원이건 아니건 계속 행동해야 해. 그것이 엄마가 17대 국회의원 임기 마지막 날에 또다시 거리에 나온 이유다. 그 사회가 오기까지는,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엄마, 아빠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처럼 살고싶다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YH사건 당시 조사받으면서 임신 중이던 나에게 경찰이 그랬지. '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 너의 아기는 투쟁! 투쟁! 하며 태어나겠다' 엄마는 '우리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만큼은 그렇지 않기 위해 내가 투쟁 한다'고 반박했지. 그런데 네가 대학을 가도 아직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구나. 이제는 교육이 바로 서고, 인간을 존중하는, 그래서 먹거리까지 차별받지 않는 손주의 세상을 위해 엄마는 다시 바람거센 농성장에 앉는다. 돈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만들 때까지 엄마는 또 다시 투쟁, 투쟁이다.
2008년 5월 30일
청계광장 단식농성장에서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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