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이번 파업은 법률상 위법이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 있고 돈 많은 몇 사람만을 위한 법은 법이 아니다. 저 산동네 철거민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법이 위반됐다고 집을 뜯는다. 노점상인들은 도로교통법에 걸어 목판을 차버린다. 이렇게 밥을 못 먹게 하는 법은 법이 아니다"
이는 이랜드 홈에버 사업장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을 선동하기 위한 민주노총 간부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발언이 아니다.
지난 1988년 당시 한 초선 의원이 작업복을 입고 128일간 파업 중이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앞에서 토해 낸 사자후의 한 대목이다. 그 국회의원의 이름은 바로 '노무현'.
"당연히 관심있게 보고 있다"지만…
이랜드 노사 간 협상은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8일 국무회의에서는 공권력 투입 방안이 심도 깊게 논의됐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일 서울중앙지검 신종대 2차장 검사는 "점거 농성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서울경찰청은 이날 어청수 청장 주재로 경비대책 회의를 열고 공권력 투입 시점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형 파업 사태만 터지면 착착 진행되는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런 정부의 움직임은 '노(勞)'측엔 압박으로 '사(使)' 측엔 천군만마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어떤 입장일까? 점거 농성이 20일 동안 이어지는 동안 청와대는 입장 무(無).
다만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요구에 이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사안에 대해 당연히 관심 갖고 보고 있다"면서 "일의 성격상 총리가 주관하고 노동부 등 관계부처 장관들이 협의해서 대처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물론 그 동안 청와대가 분주하긴 했다. 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고 청와대 참모들도 한나라당과 공방, 국정원 논란으로 정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의 핵심 요인 중에 하나인 '비정규법' 처리를 위해 쏟았던 청와대의 뜨거운 관심과는 너무 대조적이란 말이다.
당시 노동계와 민노당 등의 강력한 저항에 대해 청와대는 '비정규법은 진정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비정규 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는 노 대통령의 '훈계'도 한두번이 아니었잖나?
그런데 정작 노동계 우려대로 비정규법 시행 이후 비정규노동자들이 울부짖고 있는데 청와대는 너무도 조용하다.
1988년과 2007년, 닮은 점과 다른 점
'악법은 법이 아니다', '강자가 유리하고 약자가 불리하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은 1988년과 크게 다른 것 같진 않다.
대통령 선거중립을 규정해놓은 선거법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초유의 '현직 대통령 헌법소원'도 강행한 노 대통령이다.
뿐만 아니라 노 대통령은 얼마 전 대학 총장들과 토론 자리에서도 "우리 사회는 배려가 너무 작고 강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면서 "강자의 이익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정책이 일방통행 할 때 사회는 분열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모든 완장 찬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 권한을 자기 이익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수백 년 동안 아직도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갈등해왔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88년 노무현'의 면모가 2007년에도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노동자, 민중들에겐 오히려 '법대로'를 강조하고 있다.
한미FTA 반대 파업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법대로 하라"고 지시했고 이날도 청와대의 주무 비서관이 "이랜드 사안에 관해 정부에서 나온 기존 입장과 청와대 입장은 동일하다"고 밝혔으니만큼 '불법점거를 당장 중단하라'는 것이 청와대 입장일 테다.
"여러분이 이 싸움에서 돈 한 푼 못 받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 모두가 배신자가 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만 있다면, 10명을 잡아 넣으면 100명이 가고, 100명을 잡아가면 1000명이 가고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 노동자가 모두 달라질 것이다. 이 파업기간 동안 아니면 그 이후라도 여러분이 더욱 성장해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진정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그날을 위해 우리 함께 갑시다"
1988년 파업 노동자들 앞에 섰던 '노무현 의원'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다시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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