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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정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기고] 과학 메시아가 유포하는 판타지 갈망하는 정치

지난 1990년대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박정희 정부의 지시로 한국인 과학자가 미국에서 핵무기 개발 비밀 정보를 빼내다가 미 정보당국에 암살되었다는 이야기로 국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인 이휘소 박사가 당대 국제적으로 저명한 입자물리학자였고 국내 기초과학지원을 위해 노력했던 점을 볼 때, 이 소설은 고인의 업적을 아무 상관없는 한낱 핵무기 스파이 짓으로 왜곡한 셈이다. 분노한 유족들은 한 때 명예훼손 소송까지 진행했었다.

이 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끈 이유는 오랜 기간 식민지배, 전쟁, 쿠데타에 억눌려왔던 한국인들의 심정을 핵무기라는 소재를 통해 민족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청소년기 이 소설을 읽고 자란 세대의 상당수는 이 소설을 마치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가 몇몇 선정적인 과학프로젝트들에 탐닉하며, 어렵고 재미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기초과학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외신은 '신천지'와 같은 유사종교들이 한국에서 범람하는 원인이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지친 한국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갈망에 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그동안 가려졌던 우리사회가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병적인 심리상태를 폭로해준 셈이다.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을 표방했던 원조 유사종교들이 수십 년 전 엉터리 사기극으로 끝났지만, 신천지와 같은 아류 유사종교가 '조건부 종말론'이라는 새로운 논리로 다시 창궐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사회는 한 번 속았다가 가짜로 판명된 메시아가 살짝 문장만 바꿔가며 주술을 외치면 과거를 잊고 또다시 반응하는 못 말리는 수용체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사종교 문제는 어느 나라나 존재하지만, 이 유사종교와 같은 집단심리가 과학기술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심각한 문제다. 사실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기극이 벌어졌을 때, 우리사회는 마치 유사종교에 열광하는 신도들처럼 '과학 메시아'에 열광했다. 엄격한 과학적 검증보다는 '우리도 서양처럼 할 수 있다'는 정부, 언론, 대학의 집단콤플렉스가 가짜과학에 포획된 것이다. 국내 과학기술 정책은 그 때 이후 교훈을 얻은 것일까?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황우석의 줄기세포와 함께 지원했던 핵융합로, 사용후핵연료 건식재처리, 고속증식로, 핵추진 잠수함 사업을 객관적 검증 없이 이어받고 있다. 핵융합은 이미 1960년대부터 미국의 소수 과학집단이 "20년 후면 상용화 된다"는 거짓공약을 반복하다 1990년대 사실상 폐기한 바 있다. 그 후 각국에서 더 이상 지원받을 명분을 잃은 핵융합 관계자들은 '시한부 핵융합 상용화' 대신, 일단 핵융합을 통한 전력생산은 나중 문제이고 2045년까지 핵융합만 성공시키겠다는 '조건부' 논리를 내세워 국제핵융합 연구사업을 만들었다.

국내 핵융합 사업자들이 지난 15년간 약 2조 원의 정부 예산을 타낸 것을 지켜본 원자력계는 이에 질세라 건식재처리와 고속증식로 개발사업으로 비슷한 기간 약 1조 원에 육박하는 정부예산을 타내왔다. 건식재처리는 사용후핵연를 재처리해 최종처분부지의 부피를 줄이고, 여기서 발생한 플루토늄 등을 고속로의 연료로 사용해 발전까지 하겠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건식재처리는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과정에 무수한 2차 방사성폐기물을 양산해 그렇지 않아도 해결이 요원한 국내 방사성폐기물 문제에 여러 개의 혹만 붙이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고속증식로의 선례인 일본의 몬쥬는 건설 관리비로만 12조 원이 소요되었고, 지난 20여 년 동안 사고와 정지를 반복하며 불과 8개월만 가동된 후 폐쇄된 것도 모자라 해체‧철거비로 최소 4조 원이 소요될 전망이다.

이미 수십 년 전 폐기된 해외의 유사과학 프로그램들이 아무렇지 않게 국내에서 연간 수천억 원대의 사업으로 재현된 것은 국내 정치권의 '과학 메시아'에 대한 갈망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에는 이미 '창조과학회'라는, 진화론을 부정하는 개신교 이공계 대학교수들의 모임도 활성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이들 중 한 인사가 문재인 정부의 경제부처 장관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그의 '창조과학회' 행각이 폭로되며 낙마했다.

그러나 그가 장관 후보까지 올라간 것은 여당 유력 인사들의 추천과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 '창조과학회'의 주요 인사는 현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관련 각종 자문위원으로 건식재처리-고속로 사업의 후원자 역할까지 하고 있다.

한술 더 떠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국내 초대 핵융합연구소장을 비례대표 당선권에 포진시켰고, 미래한국당 역시 건식재처리 사업을 주도했던 전 원자력연구원장을 비례대표 당선권에 포진시켰다. 우리사회는 황우석 사건이나 신천지 사태를 겪고서도 '과학 메시아'라는 판타지와 종교화된 유사과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내 과학기술계가 무한정한 자원을 갖고 있다면, 이 같은 유사과학 탐닉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예산과 인력이 제한된 현실에서 이러한 탐닉이 지속될수록 인기 없는 기초과학분야의 연구자들에게 돌아갈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쪼록 총선후 새로워진 국회에서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식 세계관에서 벗어난 과학기술 정책이 추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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