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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진보정치 '영원한 정책실장' 이재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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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 진보정치 '영원한 정책실장' 이재영을 만나다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이재영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그대의 한평생은 한국 진보정당운동 역사 그 자체였다."
2012년 겨울 노회찬은 한 사람의 45년 삶을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한다.
이재영, 그의 이름이다.

▲ (왼쪽)이재영의 생전 모습 (오른쪽)12월 15일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추도사를 하는 노회찬

2012년 12월 12일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향년 45세의 한 남자가 세상과 작별했을 때, 언론들은 그의 부음을 전한다.
- 「진보정치의 꽃, 이재영을 보내며」 (<오마이뉴스>)
- 「진보정치 최고의 두뇌를 떠나보내며」 (<프레시안>)
- 「'진보정당 설계자' 이재영, 큰 짐 지워 미안합니다」 (<프레시안>)
- 「"故 이재영 꿈, 이제는 대선공약" 진보진영 일제히 추모」 (경향신문)
- 「진보정치의 영원한 '정책실장', 이재영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별세」 (<미디어스>)
- 「[부고]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별세」 (<미디어오늘>)
- 「야당 한 마음으로 이재영 전 의장 추모」 (<레디앙>)
- 「'진보정치 외길' 이재영 진보신당 정 정책위의장 별세」 (<오늘의 유머>)

'진보운동가 고 이재영 동지 장례위원회'는 「이재영 동지의 길을 이어가겠습니다.」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의 추모광고를 낸다.


이재영 동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보정당운동에 평생을 바쳤던 이재영 동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그는 한국 진보정치의 대표적 정책활동가였습니다.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정책을 만들었고, 무엇보다 진보정당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뿐입니다.
그는 오랜 시간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진보정당운동이 성장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재영 동지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오직 시간뿐이었습니다.
힘들지만 늘 쾌활하게 가던 그 길, 이제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 당시 신문광고

노회찬과 이재영의 만남, 하나 : 인민노련,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보정치연합

이재영의 어린 시절 삶의 기록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조문보(弔問報)를 보면 1967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재영은 1986년~1989년 서울, 성남, 안산 등지에서 공장 노동자 조직 활동을 하고 1989년~1990년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외협력 활동을 한다.
1967년생인 이재영은 흔히 말하는 386세대다. 그러나 양지의 386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대학 1학년이던 1986년, 남들 다 쌓는 학생운동 경력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울과 경기도 성남, 안산 등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조직활동을 하던 그는 1991년 노회찬·주대환·황광우 등 인민노련 선배들이 주도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약칭 한사노 창준위)에 들어가 포항지부 교육선전 담당으로 정당운동을 시작한다. 1992년 민중당 경기도당 정책국장 및 백기완 선본 경기남부 집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1995~96년), 국민승리21(1997~99년), 민주노동당(2000~2006년)을 거치며 줄곧 정책 담당자로 일한다.
인민노련은 '한사노 창준위'를 거쳐 한국노동당 창준위, 민중당 합류, 통합민중당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인민노련은 전위정당론을 폐기한다. 노회찬이 "변혁주의 노선과의 결별이자 전면적인 합법정당 노선"이라고 말한 이른바 '신노선'(문건 이름은 「회사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1991.9.29.)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신노선의 운동사적 의미에 대해 노회찬은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1980년대를 지배해온 것은 혁명만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창출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이 보장된 이상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여기에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론도 설득력과 함께 하기 힘든 것처럼 현실의 근거를 상실하였다. 활동노선과 전략의 근본적 재검토가 시급했다. 신노선은 불가피했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02쪽).

1992년 1월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 본관 3층 대서양홀. 발기인과 참관인 등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노동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위원장 주대환)가 공식 발족한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노회찬은 옥중 축하인사를 보낸다.

ⓒ노회찬재단
여러 갈래의 시냇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이제 노동자정당 건설운동은 저 거친 광야에서 하나의 강물로 만나 도도히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노동당'의 앞길엔 우리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곤란과 어려움만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태산을 만나면 휘감아 돌아가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되어 떨어지면서 거센 장강의 물결로 기어이 민중의 바다에 도달하게 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한국노동당' 만세!

1992년 1월 13일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 올림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를 만기출소한 노회찬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그해 4월 민중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를 떠났다(노회찬, 「후기」,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 283쪽).

▲ (왼쪽)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직후인 3월 27일 민중당의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오른쪽)민중당 해체 한겨레 광고(1992.4.15.)
민중당이 해산된 뒤에 진보정당운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서 사실은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부 좀 상층명망가들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더 이상 힘들다고 하면서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이우재 이런 분들은 이제 다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남은 사람들 상대적으로 좀 연령도 좀 아래인 지역에 이렇게 있는 이런 분들은 진보정당운동을 계속 하자라고 해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내에서는 민중당 해산 이후에 즉각적인 진보정당 재건론과 그다음에 좀 이렇게 시간을 갖고서 준비를 더 하자라는 그런 견해로 나뉘어졌고 당시 저는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순 없다, 민중의당부터 민중당까지 실패한 그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해내고 실패에 이르게 됐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시 당을 건설하는데 급급해 한다면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진보정당에 더 나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서 시간을 충분히 갖고서 이 진보정당 건설에 장애물을 좀 제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자, 이런 입장을 택했습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① 진보정당의 태동과 수난」, 2009년 5월 4일)

당시의 상황과 이재영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상한다.
이재영 동지! 그대의 한 평생은 한국 진보정당운동 역사 그 자체였네. 1987년과 92년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를 거치고,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진보정치연합을 거치는 동안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꿈은 점점 멀어져가는 듯 보였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는 노랫말처럼 한 때 서른 명이 넘었던 상근자는 단 한명으로 줄었고 그게 바로 자네였지. 1995년 그 추운 겨울날 우리 두 사람이 민중당 시절부터의 낡은 짐을 내발산동 좁은 사무실로 옮기면서도 꿈이 있기에 기죽지도 힘들지도 않았지. (2012년 12월 13일 노회찬 페이스북)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였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민중의당, 민중당의 실패를 거치며 진보정당운동의 첫 겨울로 접어들던 때였다. 겨울은 예상보다 길었고 추위는 혹독했다. 진보정당 창당 전망이 멀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생활로 돌아가거나 다른 현장으로 옮아갔다. 50명에 이르던 중앙 상근자는 두 명으로까지 줄기도 했다. 실로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계절이었다.
이재영은 그 길었던 겨울을 변함없는 낙관과 열정으로 견뎌낸 늘 푸른 상록수였다. 그리고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봄을 만들어냈다. 1997년은 나와 이재영의 인생에 최고의 해였다. 1년여에 걸친 창당 기획과 추진은 국민승리21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었고 민주노동당의 창당을 잉태하였다. (노회찬, 「발간사: 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 이재영 지음.이재영추모사업회 엮음,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진보 정책의 아이콘 이재영 유고집 2>,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 1992년 6월 27일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 제1차 정기대의원대회
▲ (왼쪽)1992년 6월 27일 진정추 제1차 정기대의원대회를 마친 뒤 거리 행진 (오른쪽)진정추 제1차 중앙위원회 회의 장면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그 시절, 노회찬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진보정치연합> 1996년 1기 대의원 명단에 중앙본부와 양천지부의 당연직 대의원으로 두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한편 한때 함께 하다가 떠난 이들에 대한 소회를 이재영은 이렇게 밝힌다(이재영, 「좌절과 이탈의 역사: "변절자는 없다…제자리 찾아갔거나 우리가 쫓아냈다"」, <진보정치>, 84호 2002년 4월 22일).
"문제는 이탈자들 중에 '그곳'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도도한 현실에 굴복했을 때, 그러고 그런 굴복의 양산을 차단해야 할 때 우리는 변절'이라는 수사(修辭)를 애용하지만, 수사는 어떤 경우에도 미래를 개척치 못한다. 냉정히 보자면 제 발로 걸어나간 이탈 뿐 아니라, 운동권 문화라는 비합리에 밀려난 축출도 적지 않았고, 그런 문제점을 개선치 않는다면 이탈이든 축출이든 우리의 왜소화는 계속될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진보정당 운동에 입문하며 자기희생의 각오를 다지지 않은 이는 없다. 하지만, 부자집 개만도 못한 생활을 20~30년 동안 영위하게 될 때, 희생은 인간의 유예가 아니라 개인 발전의 지체와 운동의 장애로 바뀌게 되고, 이때의 이탈은 변절이 아니라 불가피한 정리로 치부되는 것이다. 인적 자원의 개발과 관리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더욱 큰 문제점은 운동권이 지난 시대의 비합리를 금과옥조처럼 숭상하는 점이다. 매순간마다 목적 자체를 목청껏 외치는 것으로, 냉정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대체하고, 토론보다 동지들을 무슨무슨 '주의(主義)'로 매도하며 몰아세우는 데 열을 올리고, 능력과 기여가 아니라 연공서열식의 전근대성을 고수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집단이 바로 운동권인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났으나 아직도 선의를 간직한 많은 이들이 '운동권 문화'에 치를 떠는 것은, 자신들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의 희생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항이라는 문화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비합리는 우리의 동력이었지만, 정치라는 수단에 눈을 뜬 지금, 우리의 유일한 생존 방책은 합리뿐이다."

1996년 4월 <한신> 21호 기고글(「진보정당 건설에 관련된 몇 가지 단상」)에서 이재영(진보정치연합 정책부장)은 '우리가 가야 하는 길'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혁명의 시대는 갔다. 그것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혁명'이라는 어휘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혁명은 80년대의 영광과 아픔을 되씹는 회고담 문학의 소재로,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은 문화 상품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혁명'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의미 - 수단으로서의 그것과 목표로서의 그것 중 후자가 담고 있는 가치와 이상은 인류 사회가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추구될 것이며, 휴머니스트로서의 우리, 따라서 사회혁명가일 수밖에 없는 우리 역시 '혁명'을 향한 노력을 완고히 지속시킬 것이다. 문제는 모델이다." (이재영,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15쪽)
"따라서 현재 우리가 상징할 수 있는 가능태(可能態)는 서구 복지사회 모델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하는 곳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진보정치 세력이 자신의 고유하고 완결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남의 프로그램을 차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조건에서 비롯된다. 현재 우리는 사회를 이끌 이념·정책·선전 역량을 가지고 있거나, 조만간 그것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전략 목표의 입안과 획득을 유예, 지연시키고 실현 가능한 또는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는 과도 목표를 지향하는 잠정적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16-17쪽)

노회찬과 이재영의 만남, 둘 : 국민승리21


1997년 9월 7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
'국민후보 추대와 국민승리21(가칭) 준비위원회'가 출범한다. 이 자리에서 권영길은 15대 대통령선거의 국민후보로 공식 추대된다. 이어 10월 26일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 결성대회가 개최된다. 15대 대선 결과 권영길 후보는 30만6026표를 얻어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등 대중조직의 공식 결정을 배경으로 한 사실상 대중적 진보정당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진보정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태어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 (왼쪽)1997년 9월 7일 ‘국민후보 추대와 국민승리21(가칭) 준비위원회’ 발족식 장면 (오른쪽)1997년 10월 26일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 결성대회 장면. 왼쪽으로부터 김진균, 이창복, 권영길, 오세철 대표
권영길과 단병호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이광호, 「진보정당, 같은 꿈을 꾸는 집을 지으며」,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020-021).
"1996~97년 노동자 총파업 이후 내가 대선 후보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후보로 나서야 된다는 얘기가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내게 그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총파업이 끝난 후 어느 날 노회찬이 만나자고 했다. 두 시간 이상 나를 설득했다. 그전에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건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만약 노회찬이 없었다면 나는 1997년 대선에 후보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권영길)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인 진보정당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노회찬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 그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 노선을 끝까지 지켜 왔다. 많은 명망가들이 이런 노선을 주장하다가 떠나갔다."(단병호)

앞서 말한 것처럼 1997년 대통령 선거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마포에 있던 선거대책본부 사무실은 폐허처럼 고요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선대본 사무실과 규모가 비슷했고 일하는 사람도 200명이 훨씬 넘던 사무실이었다.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노회찬과 후보 권영길을 포함해 남은 이들은 (이재영을 포함해) 열 명 남짓. 이들은 함께 봇짐을 싸고 삼선교 부근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새삼스런 것도 아니었다. 그와 '봇짐 동지'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노회찬의 말이다(이광호, 「진보정당, 같은 꿈을 꾸는 집을 지으며」,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025-026).
진보정당 운동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결국 원내 진출로까지 이어졌다. 진보정당의 오랜 단절 끝에 대중적 진보정당 시대가 열리는 계기를 마련한 조직이었다. 국민승리21은 애초에 그런 용도로 '설계'되었다.

"대중운동 이외의 재야운동은 이제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마쳤다"고 맺고 있는 「'국민후보'를 통해 정치세력화로 나서자」('진보정치연합 주간보고', 1997년 2월 14일)는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노회찬은 국민승리21이 대통령 선거라는 국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진보진영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창당 작업에 들어가는 것을 구상한다.

1997년 대선 직후부터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원탁회의'를 제안해서 만들었고,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를 토대로 1998년 하반기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만든다. 몇 차례 회의를 거쳐 1999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다.

▲ (왼쪽) 1998년 국민승리21 삼선교 시절.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황정아, 김창현, 이재영, 송태경, 이상현, 최철호, 김해근, 박용진, 오현아, 김두수, 이근원 (ⓒ송태경 제공) ▲ (오른쪽) 1999년 8월 29일 민주노동당 창당발기인대회

노회찬과 이재영의 만남, 셋 : 민주노동당①

2000년 1월 30일 오후 2시 올림픽공원 제3경기장인 역도경기장.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 창당의 가교 역할을 완수하고 문을 닫는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창당의 광경을 보면서 "내 인생 목표의 절반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평생소원의 절반이 이뤄지는 감격"을 이재영과 함께 나눈다. 1월 30일 이 날은 이재영이 세상에 나온 날이기도 하다.

▲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모습
2000년 2월 7일-15일자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호외」를 보면, 이재영(준비위 정책국장)과 노회찬(당 부대표)의 이름이 같은 지면에 등장한다. 이재영은 강령 해설자(「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 체제로」)로, 노회찬은 당헌 해설자(「당원의 주인선언-당내민주주의 강화」로.

2000년 3월 2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기관지위원장에 김금수 당 고문을, 편집위원장에 이광호(전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편집국장)를 선출하고 7명의 기관지 위원과 17명의 기관지 편집위원을 인준한다. 이재영은 당 정책국장이자 편집위원으로서 빼어난 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2000년 4월 3일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는 1차 회의를 개최, 그 구성과 운영, 하반기 사업계획에 대한 개괄적인 틀을 마련한다. 정책위의 역할로는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이념정당으로서 갖춰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연구하고 입안할 것, 기성 정당과 차별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민주· 평등·해방의 '진보' 이념을 재구성할 것, 정책의 내실화를 통해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것으로 정한다. 운영에 있어서 실사구시와 전문화를 표방하고, 당면 현안에 신속하게 대응할 방침이다. 정책위는 장상환 정책위원장, 조현연 정책부위원장과 9명의 상임정책위원 그리고 중앙당 이재영 정책국장, 정택상 정책부장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와 21개의 분과위원회 체계로 운영될 예정이다. 분과위원회가 월 l회 회의와 주요 현안이 있을 때, 토론을 통해 정책 초안을 발표하면 정책위원 전체회의에서 채택하게 된다(<진보정치> 12호, 2000년 6월 23일).

2000년 4월 28일 <진보정치> 5호 정경섭 기자의 「일상활동 없는 진보정당 없다」는 기사에서 이재영(중앙당 정책국장)은 "선거란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꾸준한 활동으로 불을 지펴야만 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지면에서 노회찬(당 부대표)은 "선거의 결과는 일상적인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제까지의 진보정당들은 선거기간에 임박해서 만들어졌기에 일상활동이 없었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에 실망해 당이 해산되는 등 악순환이었다"고 하면서, "보수정당들은 의회내 엘리트적 정치활동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진보정당은 대중들과 함께 하는 운동, 일상어l서 밀접하게 대중들과 접촉하면서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0년 5월 15일 저녁 흥사단 3층 강당. 서울권역 전국집행위원 선출대회가 열린다. 서울은 권역별로 선출하는 전국집행위원 선거에서 유일하게 경선이 치러지는 곳. 경선에 출마한 세 명의 후보는 박용진(강북성북지부 임시대표), 이재영(중앙당 정책팀장), 정윤광(노원을지구당 위원장). 이재영 후보의 지지연사로 나온 이호곤(강동송파지부 대의원)은 "전국집행위원회는 최고의 정치참모부대라 할 수 있다"며 오랜 기간 진보정당운동을 해온 이재영 후보에 대한 지지를 부탁한다. 이재영은 "당적인 질서와 기풍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결의를 밝힌다. 78명이 참가한 1차 투표 결과는 박용진 31표, 이재영 27표, 정윤광 19표, 무효 1표. 2차 투표 결과는 박용진 39표, 이재영 29표, 무효 2표. 낙선한 이재영 후보는 "대의원들이 박용진 동지에게 많은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말해 대의원들의 박수를 받는다(<진보정치> 7호, 2000년 5월 19일).

2001년 2월 28일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는 <김대중 정부: 3년 평가와 대안>(이후)을 발간한다. 정책위가 이 책을 기획하고 발간한 것은 무엇보다도 '위기 심화, 희망 부재'라는 현실에서 벗어나 '위기극복, 희망 창출'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또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이 기성 정당들과는 달리 정책정당, 이념정당을 지향하는 바, 이러한 당의 기본 노선에 부합하는 실천 활동의 일환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새 세상을 향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또 그렇다고 단순히 궁극적인 전망만을 내세우거나 되뇌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실사구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정책위는 역사적 비전과 전망의 새로운 부활을 통해, 지금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정치적 냉소주의의 강고한 벽을 허물어뜨리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정부가 자신들의 집권 3년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평하고 있는데 반해, 민주노동당 정책위는 책을 통해 '총체적 실패'라는 혹독한 평가들 내리고 있다(이재영, 「DJ 3년 평가와 대안-절반도 성공 못한 총체적 실패」, <진보정치>, 34호, 2001년 3월 2일).

2001년 3월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가 창간 1주년을 맞는다. 이재영은 「기관지를 만드는 사람들: "술과 꽃 사이에서"」를, 노회찬은 「나에게 무기를 달라」는 글을 싣는다.
이재영은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중늙은이와의 술자리에서 까뮈니 신중현이니 향기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이광호 기관지 편집위원장에게 술친구끼리의 시 한 편을 드린다"며 글 말미에 이렇게 올린다. "그대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나를 부르소서 / 내 집에 꽃 피거든 나 또한 청하오리 / 그리하여 우리의 백 년 세월을 / 술과 꽃 사이에서" (<진보정치> 36호, 2001년 3월 23일)

노회찬은 「나에게 무기를 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정치〉는 우리 당원들에게 창이요, 총알이며, 그물이다. 조직, 선전, 홍보를 위한 무기이다. 이 무기가 얼마나 쓸모 있는 지는 현실의 바다, 대중의 바다로 뛰어들면 금방 알 수 있다. … 정책이론지, 당원용 당보, <진보정치〉 등 3종의 기관지가 발행되는 새로운 조건에서 〈진보정치〉는 대중용 정치 신문으로, 당원들의 조직, 선전, 홍보활동의 무기로 성격을 명확히 할 것을 기대한다. 폐쇄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소수 집단의 담론에 갇혀 있는 신문이 아니라, 대중의 피와 땀이 맺혀 있는 현장에서 담론을 만들고 주도하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당원이 기다리는 신문에서 당원이 뿌리고 다니는 신문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노회찬과 이재영 모두 선거제도 변화,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위해 발로 뛰었다. 진보정당의 발전을 위해서,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효종)는 노회찬 등이 낸 현행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의 선거방법·비례대표의석 배분방식·기탁금 관련 조항들에 대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1인1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 지역구에서 획득한 득표비율에 따라 전국구의석을 배분토록 한 것은 위헌'이라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다(2000헌마91·112·134). 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는 두 사람의 땀과 눈물, 정책위원회와 그 산하 법률지원팀의 지원이 배여 있다.

2001년 7월 27일 <진보정치> 53호 2면의 위와 아래에 노회찬과 이재영 두 사람의 글이 올라온다.
노회찬은 「헌재 위헌 결정의 정치적 의미: 이제 시작일 뿐이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김효종 재판관이 주심을 맡은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의 위헌결정은 2백27명의 의원을 뽑는 다수대표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례대표제로 뽑는 단지 46명 전국구 의원 선출 방식에 대한 것일 뿐이다. … 헌재의 이번 결정은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도입을 강제하면서도 그것의 적용범위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정치에 내맡긴 셈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의 핵심은 비례대표제의 적용범위와 적용방식이다. … 10석 미만의 만년 소수정당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면, 전면적인 비례대표제의 실시는 필수적이다. 물론 비례대표제의 실시가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비례대표제의 전면적인 실시는 계급투표 성향이 일반화될 때에만 성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당의 계급적 성격을 강화해 가는 것과 환경, 여성, 장애인 등 다양한 조류를 당으로 통합해내는 양면의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만리장성의 벽에 손가락 크기의 구멍 하나가 뚫린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 작은 구멍 하나가 결국 50년 보수정치 독점의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재영은 「민주노동당의 정당명부제안: 득표율 의석수 일치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에서, 민주노동당의 방안은 독일식 정당명부제로, 지역대표 50%와 비례대표 50%로 국회를 구성하며, 정당명부는 전국 단일로 작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웨덴 사회복지 연수를 다녀온 이재영은 2002년 1월 "민주노동당은 소비에트식이나 스웨덴식 같은 사회모델 중 어떤 것을 지향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이재영, 「"우리는 백 년 걸렸습니다"」, <진보정치> 73호, 2002년 1월 25일).
"우리 길은 우리가 찾습니다."("Our way, discover by myself.")

※ 2004년 4월 26일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관계자들이 민주노동당을 방문한다.
'민주노동당이 소비에트형의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게 아니냐'는 모건스탠리 측 질문에 대해 이재영은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 중 민주적 사회주의에 가깝고 구체적으로는 스웨덴 사민당이나 브라질의 PT와 이념적 지향이 비슷하다"(매일경제, 2004년 4월 27일), "소련, 북한 같은 실패한 '국가 사회주의'와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답변하고, "현존하는 국가 모델로는 '노동계급이 만든 최선의 자본주의 나라'인 스웨덴"(조선일보, 2004년 4월 27일)을 꼽는다.

2002년 3월 16일 민주노동당 2002년도 정기 당대회가 개최된다. 2기 대표단 선거 결과 권영길 후보가 2백94표를 얻어 정윤광 후보를 1백63표차로 제치고 당 대표로 재선된다. 부대표에는 최순영(4백3표), 김태일·김혜경(3백79표), 천영세(3백60표) 후보가 당선된다. 사무총장에는 단독출마한 노회찬이 찬성 296표를 얻어 당선된다. 노회찬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당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한다.

1인 2표제가 처음 도입된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광역의원 전체 정수의 10%를 비례대표로 선출)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에 선거운동을 집중한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전략적으로 발전해나가는데 이게 사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저희들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의 선거 전략을 다른 것보다도 정당투표에서 저희들이 5%이상 얻음으로써 국고보조금을 얻는 이른바 정당으로서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말한다(「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②」, <폴리뉴스>, 2009년 5월 13일). 민주노동당은 창당 2년만에 모두 218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기초단체장 2명, 광역의원 11명, 기초의원 32명 등 총45명이 당선(당선율은 20.6%)되는 성과를 거둔다.

<민주노동당 출마자 및 당선자 현황>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비례)

기초의원

출마자수

7명

12명

91명(25명)

108명

218명

당선자수

0명

2명

11명(9명)

32명

45명


당락과 관계없이 출마지역에서 광역단체장 12.80%, 기초단체장 15.35%, 광역의원 19.92%, 기초의원 30.68% 등 10% 이상의 의미 있는 득표율을 얻기도 했다. 특히 사상 처음 실시된 정당명부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득표율 8.13%, 1,340,376표를 득표한다.


<출마지역 선거별 평균 득표율>

구분

정당득표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지역구 광역의원

기초의원

합계

8.13

12.80

15.35

19.92

30.68


6월 14일 오전 11시30분경 여의도에 있는 민주노동당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박권호 중앙당 사무국장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입니다. 2/4분기 정당국고보조금을 보내주려는데, 통장 계좌번호를 알려주십시오."
8.13% 득표율로 6월 15일 오전 민주노동당 통장에는 중앙선관위에서 보낸 정당 국고보조금 1억3392만9550원이 입금된다. 비록 같은 날 한나라당이 받은 29억7600만원과 민주당이 받은 28억2200만원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이지만,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받은 국고보조금은 6․13 지방선거 이후 달라진 당의 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8.13% 득표율의 또 하나 의미는 12월 16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대통령후보 선거방송토론회 참여 자격을 부여받게 돼 '진보정당'이 TV토론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의 이문옥 후보와 울산의 송철호 후보의 경우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이미지를 높이는 핵심적인 두 축으로, 이 '비장'의 카드가 없었다면 아마도 전국적 차원의 정당 득표에서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상대적으로 미약했을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한 예로 서울과 울산의 정당 득표를 보면, 서울에서 민주노동당은 비록 후보지지율은 2.53%에 그쳤으나 정당 득표는 6.06%를 기록한다. 그것은 초박빙이라는 여론몰이 속에서 유권자들의 사표 심리가 작동하여 후보에 대한 선호투표를 주저하게 만든 반면, 일종의 부채감과 미래적 투자 차원에서 당 투표는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울산에서도 인지도는 물론 초기 10%를 넘지 못하던 정당 지지율이 송철호 후보의 출마로 30% 가까이 상승한다.
▲ (왼쪽) 이문옥 2002년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와 함께. 왼쪽부터 이재영, 노회찬, 이문옥, 황이민 (오른쪽)재래시장을 찾아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

2002년 16대 대선과 TV토론
우리나라 대선에 법정 TV토론 방식이 도입된 건 1997년 15대 대선부터다. 97년 이전엔 선거운동 방식이 대규모 군중집회 중심이었다. 당시 TV토론엔 여론조사 평균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이 모두 10%를 넘어야 참석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의 3파전으로 토론회가 치러졌다.
2002년 12월 16대 대선에서 TV토론 참여범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진다. 민주노동당의 후보들은 토론위원회가 정한 5% 이상의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TV토론에 거의 초대받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8.13%의 지지를 얻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의 토론 참여 허용 여부가 최대의 쟁점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8.13%의 정당지지율을 얻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토론에 참여시킬 것인가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선거방송토론위원회(위원장 정대철 방송학회장)는 권영길 후보를 포함하는 합동토론회 개최를 결정한다. 1997년과는 달리 새로운 조항을 신설하는데, 후보 등록 이전 15일간 여론조사 결과 평균 지지율 5% 이상을 기록한 후보나 제15대 대선 이후 전국 선거에서 5% 이상 지지를 얻은 정당의 후보도 TV합동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02년 9월 24일 오후 1시 50분. 잠실 롯데월드 지하 l층 SBS 테마 스튜디오. 몇 명의 '위장보수주의자'들이 구수회의를 하고 있다. "모질게 몰아부쳐야 합니다. 아주 매몰차게 말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재영 중앙당 정책국장. "우리는 오늘 보수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말소리도 들려왔다. 대학교수, 언론사 기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4명은 오늘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를 '매우 쳐야' 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다. (…) 정확히 5시. 130분 토론회가 끝났다. 곧이어 후보와 패널 그리고 참석 당원들이 함께 한 즉석 평가회의가 열렸다. 이상현 대변인의 진행.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고언들. 대안제시의 구체성 결여, "저 권영길이가..." 라는 표현의 남발 등등... 지적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후보의 얼굴빛이 밝지가 않다. 그러나 어쩌랴. 맷집 키우는 것도 중요하니까. 100분토론 일정이 잡힌 이후 추석 연휴도 밤잠도 잊고 준비해온 사무총국의 '동지'들이 고맙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정책맨들, 비서진들, 대변인실 입들 모두 머리를 짜내고 손발을 움직이며 준비해왔다. 그들은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잠실에서 여의도로 향했다. 이날 리허설에서 나온 문제점을 '적발'해서 '시정'시키기 위해 그들은 또 밤을 꼬박 셀 것이다. 자료를 찾고 논리를 찾고 때로는 감성까지 찾아가면서(이광호, 「권영길 후보 TV토론 리허설 현장: "우리 모질게 몰아부칩시다"」, <진보정치> 105호, 2002년 9월 30일).

MBC 100분토론 참가를 앞두고 권영길 후보는 3번의 리허설과 정책 숙지를 위한 '과외공부'를 학자, 변호사, 시민단체·언론사 관계자 등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했다. 첫 리허설에서 패널들의 돌출질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권 후보는 리허설을 거듭할수록 자연스러운 토론이 가능해졌다. 리허설에 참가한 패널들은 "후보가 당황하도록 몰아 붙여야 한다"며 '작전회의' 를 했고 리허설 과정에선 실제 토론회보다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예상 질의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던 중앙당 정책국 상근자들은 추석연휴도 반납했고 토론을 앞둔 이틀 동안은 아예 철야를 하면서 토론회를 준비했다. 실제 TV 토론에서 패널들의 질의 중 준비된 답변에서 벗어난 질문은 거의 없었다. 이재영 정책국장은 "답변서를 준비하며 정책을 가다듬는 효과도 있었다"고 자평했다. 토론을 함께 준비한 비서실과 대변인실 상근자자들도 토론회 준비기간 내내 '안색이 누렇게 떠서' 말 붙이기도 미안한 표정이었다. 또 후보의 의상, 표정 등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전문 코디네이터와 프로듀서가 함께 토론회를 준비했다. 이번 후보의 TV 토론준비를 주도한 이재영 정책국장은 "후보가 정책을 충분히 숙지할 시간이 모자랐던 것이 아쉬웠다"면서도 "준비한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고 말했다(정용상, 「토론회 준비: 추석까지 반납 철야 준비…효과는 '확실'」, <진보정치> 당원판, 2002년 9월 30일).

제16대 대선후보 합동 방송토론회는 이렇게 진행된다.
<1차 토론> 2002년 12월 3일(화) 오후 8시-10시, KBS,MBC,SBS 동시 방송
<2차 토론> 2002년 12월 10일(화) 오후 8시-10시, KBS,MBC,SBS 동시 방송
<3차 토론> 2002년 12월 16일(월) 오후 8시-10시, KBS,MBC,SBS 동시 방송
1차 토론을 지켜본 네티즌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날 토론으로 가장 많은 점수를 딴 후보는 권영길 후보다. 많은 네티즌이 "통일·안보·정치에 대해 두려울 것 없이 할 말을 제대로 했다" "권 후보와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알리는 좋은 기회로 활용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막판 양비론"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현장/해설] 대선 후보 3인 제1차 TV합동토론」,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3일).

권영길 후보는 TV토론을 통해 몇 가지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국민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말은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 민주당은 부패 신장개업당"이라고 신랄하게 보수 정치권의 동질성과 부도덕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TV토론의 가장 큰 수혜자가 민주노동당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민주노동당의 TV토론 참가는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비록 의석은 없지만, 한국정당사에서 대중노선을 취하는 진보정당이 공중파를 통해 당의 어떤 정체성이나 정책노선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정치 불신이 대단히 높은 속에서 우리 국민들이 무얼 바라는지 또 국민들의 어떤 육성, 가공된 인식 발언이 아니라 국민들의 육성을 그대로 좀 전달하기에는 저희들의 활동이 아무래도 일반 서민대중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저희들이 기본적인 강점을 안고 있지 않았는가 판단을 했습니다. 특히 TV토론이 국민여론과 선거에 표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저희들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002년 대통령선거 때 TV토론 나가면서부터 실제로 권영길 후보가 국민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국민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여론을 바꾸어내고 또 인지도를 높여내는가를 저희들이 실감을 했기 때문에 비록 저희들에게 많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은 TV토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②」, <폴리뉴스>, 2009년 5월 13일).
▲ (왼쪽)노무현, 권영길, 이회창 후보가 토론에 앞서 손을 잡고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 (왼쪽)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후보 초청 첫 TV합동토론회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고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와 기호 4번을 의미하는 손가락 4개를 높이 들고 있는 당 지도부(노회찬, 권영길, 천영세) (오른쪽)12월 18일 오후 11시. 공식 선거시간 마감을 앞두고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기호 4번 권영길을 외치는 지지자들
2003년 3월 24일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125호는 진보정치 창간 3주년을 맞아 「<진보정치> 3년사」 이모저모 기사를 내보낸다.
2000년 3월 24일 창간된 <진보정치〉 창간 3년 동안 발행한 호는 총 1백24호. 여기에 실린 기사 꼭지수는 무려 5천5백96개에 달한다. 한 호에 평균 45꼭지가 들어가는 셈이다. 1백24호까지 2천1백60면이 제작된 〈진보정치〉를 한 장씩 늘어놓으면 30평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남는다. 창간호부터 세로로 늘어놓으면 1백24호까지 46.7미터에 달하며 이를 면별로 늘어놓으면 8백3미터까지 이어진다. 〈진보정치〉에는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7백여명의 외부 필자가 기고를 해왔으며 고정 필자를 제외하면 이재영(정책국장)과 함께 임동현(경제민주화운동본부 정책부장), 이선근(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등이 가장 많이 글을 쓴 필자로 꼽히기도 한다.

노회찬과 이재영의 만남, 셋 : 민주노동당②

2004년은 고단했던 이재영의 45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
2003년 12월 4일 민주노동당 2004 총선기획단이 구성되고 단장에는 사무총장 노회찬이 임명되었다. 2004년 1월 5일 민주노동당 중앙선대위 발족식에서 선대본부장으로 노회찬이 임명되고, 그에 앞서 1월 1일 부로 중앙선대위 정책실장으로 이재영이 임명된다.
<진보정치> 171호(2004년 3월 22일) 기사 「중앙선거대책본부 24시: 꺼지지 않는 여의도…"늘어가는 당원이 나의 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바짝 다가온 가운데, 민주노동당이 입주해 있는 여의도 한양빌딩의 불빛은 24시간 동안 꺼질 새 없이 불을 밝히고 있다. 지난 해 여름 '두레빌딩 시대'를 접고 2004년 총선을 한양빌딩에서 맞이하게 된 중앙당은 요즘 2백 평에 가까운 사무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분주하고,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중앙선거대책본부(선대본)는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열리는 선대본 기조회의로 시작된다. 이날(18일) 회의에는 노회찬 선대본부장, 오재영 조직실장, 박권호 총무실장, 이재영 정책실장, 문명학 기획조정실장, 김종철 대변인이 참석했다. 연일 계속되는 과로 탓인지 모두의 얼굴이 초췌해 보이지만 회의가 시작되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친노 대 반노로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제3의 입장인 우리가 주목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난점입니다. 당원과 지지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만 취하되면 실직자, 비정규직, 이라크 파병이 해결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각 시기마다 적절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노회찬 선대본부장)
'하루에 커피를 스무 잔 마신다'는 오(재영) 실장은 이 시간에도 커피를 들이키며 잠을 쫓고 있었다. 전농과 민주노총 상근자 파견 문제, 공약개발단의 공약 발표 계획 등 하루 일정을 점검하는 것으로 1시간여의 기조회의가 끝나자 중앙당사에는 60여명의 상근자로 이미 북적대고 있었다."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의원 10명을 배출하며 제3당으로 부상한다. 2014년 4월 15일 민주노동당사 개표 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 발표에 환호하는 목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지는 순간, 이재영을 비롯한 정책위원회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결과 분석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늦은 밤 이재영은 정책위원 및 선본 간부들과 함께 가슴 졸이며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새벽 2시를 넘어 노회찬의 최종 당선 소식을 들으며 마음을 내려놓는다.

4월 15일 저녁과 새벽 상황에 대해 이재영은 <진보정치> 171호에 「가상 시나리오: 대한민국 국회, 민주노동당이 간다-"'축하주'는 없다 전면전만 남았다"」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진보정치>. 2004년 3월 22일).
"4월 15일 저녁 9시, 열 명 넘는 민주노동당 후보의 국회 입성이 확정 보도되자, 한양빌딩 4층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선대위원장과 선대본부장은 몰려드는 인터뷰와 축하 전화 받기에 정신이 없어 허둥대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 한 구석에서 남몰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꿈꾼 지 20년, 창당 4년의 비원에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상근 간부들이다. 외롭고 어려울 때 그들은 언제나 자리를 지켰고, 영광의 자리에서 그늘 뒤로 숨어들기만 하던 그들이다.
맥주 박스가 하나 둘 비어 가는 새벽 1시, 개표 상황실에 남아 당선 축하 장미를 쓰다듬고 쓰다듬던 선본 간부들에게 선대본부장의 특별지시가 떨어진다. ⓵16일 18시까지 금주 ⓶01시 30분 선본 비상회의 소집. 축하주 한 잔 못하게 하느냐는 푸념들이 쏟아졌지만, 아무도 지시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즐거울 뿐. 비상회의가 소집된 것은, 몇몇 지역구 당선자들이 16일 아침 기자회견에 참석치 못하겠다고 통고해왔기 때문이다. 고생한 지역 선본 간부들과 지지해준 지역구민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어쩌면 당연한 핑계이기도 하다. 대변인실과 정책실이 기자회견문을 다듬는 동안, 조직실과 기획조정실은 전화통을 붙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당선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약속을 어기느냐, 당 방침을 뭘로 아는 거냐?" 무위(無爲)는 없다. 단지, 예서 저리로, 저기서 여기로 옮겨갈 뿐."
▲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있는 2004년 4.15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출마자들
▲ 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 31일. 국회 본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 (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17대 총선을 통해 43년만에 원내로 진입하게 된 민주노동당은 거대 보수정당의 정책연구원 규모와 맞먹는 50명의 인력으로 당 싱크탱크를 꾸리고 다양한 정책과 공약을 개발했다. 당시 정책국장을 맡은 이재영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한국의 진보정당 가운데 어느 곳도 2004년 민주노동당이 지녔던 정책 역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은 이후 분당과 패배, 재분열의 과정을 거친다(이세영, 「기적이야말로 이재영의 목표다」, <한겨레21> 제941호, 2012년 12월 20일).
이재영은 영세상인과 재래시장을 지키기 위한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등 현 시대의 화두가 된 민생 복지 정책을 만들고 다듬었으며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내세우는 민생 정책들 중 대다수가 이재영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진보정당 안팎의 평가다(<미디어스> 2012년 12월 13일).
이재영이 단순히 정책 전문가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낸 변호사 김정진의 회고다. "그는 진보정당의 전략과 노선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이 아닌 개별 사업장 혹은 대기업 노동자의 이해만 추구하는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맞섰고, 가난한 사람의 복리보다 반미와 통일에만 천착하는 민족주의자들과도 맞섰다. 정당 없는 혁명 노선이나 총파업 노선도 신랄하게 비판했다."(이세영, 「기적이야말로 이재영의 목표다」, <한겨레21> 제941호, 2012년 12월 20일)

이재영이 열정을 갖고 그토록 헌신했던 민주노동당을 떠난 것은, 아니 쫓겨난 것은 2006년의 일이다. 정책위에서 함께 활동한 송태경은 이렇게 회고한다.
"진보정당의 정책적 기초를 다졌고,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 면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던 그이에게 진보정당 운동이 되돌려주었던 첫 번째 큰 선물은 '사실상의 해고조치'였다. 2006년 자주파, 그중에서도 경기동부의 이용대 씨가 정책위 의장이 되면서 그이는 정책위뿐만 아니라 중앙당 상근까지 포기해야 했다. 정파적 이해관계가 그이의 경험과 노하우 및 출중한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보다 우선했다." (송태경, 「진보정치 최고의 두뇌를 떠나보내며-[기고] "이제 누가 있어 장량소잔의 방책을 실행할 건가", <프레시안> 2012년 12월 21일)

2006년 4월 '열정과 진보 그리고 유혹의 미디어'를 모토로 인터넷 언론 <레디앙>이 창간된다. <진보정치> 편집장 사표를 낸 이광호가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이재영은 기획위원으로 활동한다.
"어찌보면 기관지는 내부언론이지만 당의 입장, 방침만을 알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로서의 장치이거든요. 이러한 취지가 훼손된다면 언제라도 거부하거나 미련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면서 1995년 <미디어오늘>, 1997년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 <진보정치>를 창간해낸, "'처음'이라는 적을 향해 겁도 없이 돌잔하는 사람" 이광호가 <진보정치> 창간 직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미디어오늘>, 2000년 6월 29일).

노회찬과 이재영의 만남, 넷 : 진보신당

2007년 대선 결과에 책임지고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체제는 일괄사퇴하고, 심상정 비대위체제가 등장한다.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처리해야 할 중대한 현안 가운데 하나로 '일심회 사건'이 있었다. 심상정 비대위는 2008년 2월 3일 열린 당대회에 최기영, 이정훈 등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 등을 담은 당 혁신안을 상정한다. 그러나 자주파 대의원들이 이 안건을 삭제하는 수정동의안을 발의해 출석 대의원 862명 중 553명의 찬성으로 가결시켜 제명안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혁신안 가결과 재신임 문제를 연계시켰던 심상정은 사퇴하였고, 결국 노회찬과 심상정은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 참조) '일심회 사건'
2006년 10월 24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일심회>라는 단체를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적발한 사건이다. 피혐의자들과 국가보안법 폐지론자 등은 일심회라는 단체는 없고,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며 일심회를 부정한 것은 물론,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법원은 일심회가 단체성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이적단체 결성죄는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관련 당사자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2007년 12월 13일 대법원은 일심회 사건의 주동자인 장민호(개인사업가, 마이클 장)에게 징역 7년에 추징금 1900만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으며 함께 기소된 이정훈(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과 손정목(학원 원장)에게 각각 징역 3년과 4년을, 이진강(회사 직원)에게 징역 3년을, 최기영(당시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재판부는 "북조선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에 해당한다고 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을 위헌으로 볼 수 없다"며 "이를 전제로 피고인들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한다.

2006년 어느날 이재영은 「간첩의 고향, 무지와 광신」이라는 글을 작성한다.
"그들이 간첩인지는 모르겠다. 재판이 끝나도 진실은 각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게 되겠지. 이 글은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회합통신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들에 대한 고발장이 아니다. 변론서도 아니다. 나는 진짜 간첩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 나는, 우리 생활과 우리 당에 대한 틈입자, 간첩에 반대한다. 당은 자신의 사상과 소신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 사상과 맞지 않는 남의 당에 들어와 일하는 것은 간첩이다. 법 이전에 상식과 예의의 문제다. 국가보안법이 간첩을 조작한다고? 절반만이 진실이다. 끔찍한 북한 국가체제에 대한 무지와 광신 역시 국가보안법과 함께 간첩의 고향이다. 그 무지와 광신, 맹동이 스스로에게 '자원 활동 간첩'의 직위를 부여하거나, 기회만 닿으면 '공화국 공식 지정 전사'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재영'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279-281쪽)

이런 문제의식은 2007년 12월 28일 <레디앙> 기고글 「이제 민주노동당을 넘자」로 이어진다. 이재영은 이렇게 말한다.
"많이 알려진 바대로 민주노동당을 넘는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첫 이유는 '주체사상파' 때문이다.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노동운동이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압도적 다수의 근로대중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을 깨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 당이 더 이상 도전하거나 혁명하지 않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끝난 당내 경선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노회찬이나 심상정이 아닌 권영길을 선택했다. 물론 권영길을 지지한 개개 당원에게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총화되어 득표력 뒤질 것이 뻔한 후보를 내세우는 반정치적 당이 민주노동당이다. 대선을 통한 성장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한 당이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이 권영길을 선택한 것은 주체사상파가 자신들의 경쟁자인 노회찬이나 심상정을 억제하려 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원과 당간부들이 민주노동당이라는 틀거리 안에서는 보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규범화돼있기 때문이다."

2008년 1월 「새 진보정당에 대한 생각 초(草)」에서 이재영은 이렇게 갈파한다(이재영'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365-369쪽에 수록).
"자주파는 북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하고, 평등파는 불안정노동자에게 평등하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유럽 사민당만 못하고, 사민주의자들은 신민당보다 보수적이다. 그들은 모두 '운동'의 틀 안에서만 '자주적이고, 평등하고, 혁명적'이다. 그들의 현실 정치는 모두 도전하지 않고 민주노동당에 안주하는 보수로 모아진다. … 새 진보정당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혹하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자기혁명 정당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내의 양대 '정파' 축을 구성하던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의 갈등은 2004년 총선 이후 계속 심화되다가 그 정점에서 폭발한 것이 2007년 대선 후 민주노동당 탈당-진보신당 창당이다. 당시 '평등파' 내에도 '쇄신파'와 '선도탈당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는데, 이재영은 선도탈당파였고 노회찬은 쇄신파였다.
2008년 1월 21일 조승수(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소장)가 사임을 표명하고, 같은 날 조현연(전 민주노동당 정책위 부위원장, 성공회대 교수), 김석연(전 정책위 부위원장, 변호사), 이재영(전 정책위 정책실장) 등 민주노동당 전직 정책 간부(와 인권위 변호사-필자 추가) 등 11명이 민주노동당을 탈당, 진보신당 합류를 선언한다. 이들은 "최근 민주노동당의 현황과 진로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 당이 재기를 모색하지 못할 정도로 파탄 상태에 이르렀으며, 심상정 의원의 비대위 활동은 잠시의 봉합에 그칠 가능성이 크고, 그 의도와 달리 새로운 흐름을 봉쇄하는 부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진단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을 공개 탈당하여 국민의 심판에 겸허히 답하고, 당 내외의 머뭇거림에 작으나마 경종을 울리고자" 하며 "앞으로 각자 처한 곳, 각자 하는 일 속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성장시키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레디앙>, 2008년 1월 21일).

이들은 "민주노동당은 최소한의 진보 정책마저 상실했다. 당에 남아서 말라죽기보다, 얼어죽더라도 밖으로 나가자…반드시 살아남아서 엄동설한에 새 싹을 자라게 하겠다"고 표방하면서 1월 26일에 출범한 <새진보>(새로운 진보정당운동)와 함께 한다. <새진보>는 김석준(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위원장)과 조승수(민주노동당 전 국회의원), 박승옥('시민발전' 대표)을 공동대표로,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과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를 지도위원으로 선출하고, 김형탁(민주노동당 전 대변인)을 대변인으로 추인함으로써 공식 활동에 들어간다.

당시 상황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종북주의보다는 저는 패권주의가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되고 두 번째는 패권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왜 그리 분당했느냐, 쌓이고 쌓여가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제가 분당하자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말렸다. 선거를 앞두고 분당하면 되느냐, 선거를 치르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저는 일단 분당불가론이었고 그 다음에는 그 분당이 불가피하다면은 선거라도 치르고 하자. 그런데 분당을 주장하는 상당수의 동지들은 지금 분당 안하면 선거 치른 후에는 아예 남아있지도 않는다고 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②」, <폴리뉴스>, 2009년 5월 13일)

처음에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분당을 반대했다. 당시 제기된 문제들은 당 안에서 해결해야 하고, 기본적으로 NL과 PD가 당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북한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당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그러나 현실은 분당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일심회사건 관련자들 문제가 핵심이었다. 조직의 주요 당직자가 조직원들의 인적 사항을 포함한 주요 기밀을 조직 외부(북한)로 유출시켰는데 이를 내부에서 징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분당했다기보다 그냥 밖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한다. … 사실 분당사태의 본질은 리더십의 문제, 정치력의 문제였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42-143쪽)


▲ 민주노동당 분당의 분수령인 2008년 2월 3일 임시당대회

2008년 3월 2일 지역 167명, 각 부문 169명 등 336명의 창당 발기인들이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회(공동대표단: 김석준 부산대 교수, 노회찬 의원, 박김영희 전 장애여성공감 대표, 이덕우 변호사, 심상정 의원)를 결성하고, 3월 16일 12명의 비례 후보와 27명의 총선 지역 후보를 인준하며 공식 출범한다. 진보신당은 "이명박 정부의 폭주와 신자유주의 야당에 맞서 진보진영의 폭넓은 연대전선으로 18대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평등, 생태, 평화, 연대를 가치로 더 넓고, 더 크고, 더 강한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당원이 진정으로 당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해 소통하고 성찰하고 혁신하겠다"는 내용의 창당선언문을 채택한다.
▲ (왼쪽)2009년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 (오른쪽)왼쪽부터 이덕우, 노회찬, 심상정, 박김영희, 김석준 진보신당 공동대표
이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체제는 2010년 10월 15일 6.2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를 하게 된다. 3대 당대표로 조승수 의원이 선출되고 조승수 대표체제에서 이재영은 정책위 의장을 맡게 된다.

2010년 12월 14일 「2011년, 미리 가 본 대한민국: 우리의 행복지수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가 개최된다. <불안증폭사회>의 저자 김태형과 노회찬, 오건호, 우석훈이 패널로 참석하고 이재영이 대담 진행을 맡는다. "과연 지금의 한국 사회는 행복한가? 라는 질문과 더불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라는 이재영의 물음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국민의 행복추구권은 헌법 개정 당시 안착된 개념이다. 타고난 운수나 행운이 많이 따른다는 의미로 쓰는 행복을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추구하고, 집단의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권리를 명시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단적으로 고용문제와 교육문제의 부담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사회는 행복하지 못한 사회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 학습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업무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도 자살률 높은 사회라는 모순 속에 있다.
공동체 차원에서 행복의 필수 조건, 필요조건적 차원에서 기회의 균등을 말하고 싶다. 결과의 평등은 나로서는 아직도 포기하고 있지 않은 이상이지만, 현실 속에서 금방 이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기회 균등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그건 도덕 윤리로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자연상태에서는 어떠한 곳에서도 기회 균등이 보장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삶의 방식을 사회제도로 고착하지 않으면 행복의 길은 어려워진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과 우리가 함께 이뤄내야 할 행복의 상은 어떤 것인가"라는 이재영의 이어진 질문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경험을 미루어 봤을 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고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일에는 몇 년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 나는 이 길에 들어서겠다고 결정한 게 스물다섯 살 때였는데, 그 이후에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웃음) 행복은 구원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나 역시 나눔을 위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해도 조금 더 행복해질 뿐, 계속 부족함을 느낄 거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복이 필요 없다는 건,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는 얘기와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가장 우선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무상급식과 남북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예정된 두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됐고 노회찬은 마무리 발언을 이렇게 한다.
두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결코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가족이 불행할 때 나 혼자만 행복할 수 없다. 이웃이 불행한데 우리 집의 행복이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다른 방의 난방을 다 끄고, 한 방만 불을 땔 때는, 모든 방에 불을 때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한국 사회 속에서는 서민뿐 아니라 가진 자들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세상은 사람이 바꾸는 것이고 우리는 많이 바꿔왔다. 절망과 체념이 행복의 가장 큰 적이다.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행복해지기 위한 용기와 확신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올 수 있는 행복도 더디올 거다. 어둡지만 밝은 새벽이 온다는 확신을 가졌음 좋겠다.

헤어짐: 이재영과 노회찬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2012년 19대 총선(4월 11일)을 앞두고 진보대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2011년 1월부터 시작된 대통합 논의과정에서 사회당 이탈(4월 29일), 국민참여당 참여(6월 1일), 진보신당 대의원대회 부결(9월 4일), 진보신당 탈당파(노회찬, 심상정)의 새진보통합연대 결성(9월 23일), 진보신당 당대표 조승수의 탈당과 새진보통합연대 합류(10월 6일) 등 우여곡절을 거쳐 2011년 12월 6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 등 3개 정파가 통합해 <통합진보당>이 창당된다.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이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를, 강기갑이 원내대표를 맡는다(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조준호는 2012년 2월 23일 공동대표로 합류한다).

2012년 19대 총선(4월 11일)에서 통합진보당은 13석의 의석을 확보한다. 총선을 앞두고 3월 14일에서 3월 18일 사이에 치러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 경선과정에서 '통합진보당 경선부정 의혹 사건'이 발생한다. 5월 2일 조준호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이 "총체적 부실, 부정선거였다"고 밝힌다.
진상조사 결과에 대해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당권파가 반발하면서 4·11 총선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건 수습책을 놓고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정면충돌한다.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정 공동대표가 강령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순간, 당권파 측 참관인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몸싸움을 벌이면서 조준호 및 유시민 공동대표가 구타를 당하는 등 폭력사태가 벌어진다. 7월 15일 통합진보당 2기 지도부 당대표로 강기갑 의원이, 원내대표로 심상정 의원이 선출된다. 7월 26일 통합진보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비례대표 부정선거 파문의 당사자인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안을 상정했으나 부결된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은 "선거 부정은 반칙 행위를 해서라도 자파 쪽 권력을 더 얻겠다는 욕심의 발현이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잘 해결하면 넘어갈 수 있는데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당보다는 자파 이익을 앞세웠다. 자파가 좀 망가지더라도 당은 지키겠다가 아니라 당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파의 손실을 최대한 막겠다는 것이다. … 설사 따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것은 지키겠다는 정파 이기주의가 존재했다. 그것은 함께 하는 당의 가치가 해당 정파의 가치보다 높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50-151쪽)고 말한다.
2012년 9월 10일 강기갑의 당대표직 사퇴를 시작으로 9월 13일부터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천호선, 이정미, 강동원 등 신당권파 주요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지게 되고, 10월 21일 <진보정의당>(공동대표 노회찬, 조준호)이 창당된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법무부의 청구를 받아들여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결정을 내린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헌재 결정으로 정당이 해산된 첫 사례로, 이 결정은 헌법재판관 8명이 인용, 찬성하였으며, 1명이 기각, 반대하였다.

한편 '자의반 타의반'으로 민주노동당을 떠난 이재영은 이후 2006년~2010년 <레디앙> 기획위원을 거쳐 2010년~2011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으로 당 활동에 복귀한다.
2011년 3월 19일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새로운 진보정당 연구모임(준)>이 주최한 '새로운 진보정당, 길을 열다' 토론회가 개최된다. 이날 토론회는 홍세화('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가 사회를 보고, 허영구(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이재영(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금민(사회당 상임고문), 김상봉(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이 토론자로 나왔다. 이재영은 "나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중심의 합당 논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양당 중심의 합당에 비판인 이유는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식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통합으로 진보정치의 퇴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긴 안목을 가지고 봐야 하는데 통합은 좋을 것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재영의 이런 전망은 "민주연립정부 구상이 진보정치를 궤멸시킬 것"이라는 분석에 기초한다.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으로 열심히 활동을 하던 중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이재영은 결국 의장직을 사임하고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투병 중이던 2012년 3월 초 온라인 진보매체 <레디앙>에 이재영은 인민노련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 「노회찬과 주대환을 떠나보내며」라는 글을 올린다. 그가 글을 쓰기 얼마 전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으로, 주대환은 민주통합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이재영은 글에서 두 사람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적는다.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군부독재가 잉태한 학생운동 리더들, 그들의 노동현장 이전, 그들의 신노선, 그들의 민주노동당이 문을 닫았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투항했다. 내게 주대환과 노회찬은 과학이었다. 나는 그이들의 권능을 믿고 추종했다. 그 '과학'이 더 이상 과학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나는 내 시대의 과학으로부터 벗어났다. 다시금 20대 때와 같은 시적(詩的) 혼돈의 시대로 회귀했다."
당시 암과 사투를 벌이던 이재영의 태도는 담담했다. "의사들은 내게 25%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의사들 입장에서야 낙관적이기 어렵겠지만, 살아오면서 그처럼 커다란 확률을 잡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로또 맞은 것처럼 기쁘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잡아본 4분의 1의 '고확률'은 끝내 현실화되지 못하고, 2012년 12월 12일 "암흑 속으로 돌진"하듯 삶을 마감한다.

▲ 노회찬(진보정의당 공동대표) 2012년 12월 13일 트위터
이재영의 부음이 알려지자 다음날인 12월 13일 그가 몸담은 진보신당뿐 아니라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민주통합당까지 애도의 뜻을 밝힌다. 민주노동당 대변인으로 찬란했던 2004년을 이재영과 함께했던 박용진(민주통합당 대변인)은 "그의 걸음은 멈췄지만 평등,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걸음은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허락해주신다면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이 고인이 만들어놓은 정책들을 바탕으로 새 정치,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겠다"고 논평한다.

12월 12일부터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이재영의 빈소를 노회찬은 오래도록 지켰다. 이재영이 "기왕에 욕먹으며 어려운 발걸음 뗐으니 국회의원 자리든, 남루하지 않은 삶이든 소망했던 바 성취했으면 좋겠다"고 한 노회찬은 다음날 환자복 차림의 이재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짧은 애도사를 남겼다. "잘 가게, 이재영. 그대 옮기다 만 산 우리에게 넘기고, 무거웠던 삽 다 내려놓고, 이제 좀 쉬게나." 함께 올라온 사진 속에는 빡빡머리 이재영과 노회찬이 같이 웃고 있었다.

12월 13일 '그대의 벗' 노회찬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12월 14일자 경향신문이 「[추모사]진보정당의 산 역사 이재영 동지를 보내며」라는 제목으로 받아서 올린다.
이재영 동지! 일주일 전 만났을 때, 내 신발 사이즈 물으며 좋은 등산화 한 켤레 사주겠다고 큰 소리 쳐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며칠 만에 다시 만나니 사람도 구분 못하고, 내가 왔다고 큰 소리 치자 알아먹지 못할 말만 겨우 내뱉더니 몇 시간 만에 이게 무슨 일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더 살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사람이, 늦장가 들어 얻은 두 아이와 천사 같은 제수씨 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
이재영 동지! 자네가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네. 자네가 옮기다만 산을 우리가 마저 옮기겠네. 이 땅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다시 세우는 날까지 우리 모두 이재영이 되겠네. 그러니 이제 무거운 삽 넘겨주고 편히 쉬시게. 남은 가족 걱정까지도 우리에게 넘기고 편안히 쉬시게. 이재영의 꿈은 반드시 이뤄질 걸세. 부디 영면하시게.
2012년 12월 13일 그대의 벗 노회찬

'진보운동가 고 이재영 동지 장례위원회'가 구성된다. 장례위원은 참여의사를 밝힌 자발적인 개인으로 구성되었고, 1,000여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한다. 상임장례위원장으로는 김종철 진보신당 대표 권한대행,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장상환 전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맡는다.
고문에는 백기완 선생, 공동 장례위원장에는 홍세화, 안효상 전 진보신당 공동대표와 심재옥, 강상구, 김선아 부대표단, 심상정, 강동원, 김제남, 박원석, 서기호, 정진후 등 진보정의당 국회의원 전원, 권영길, 최순영, 단병호, 조승수, 강기갑 전 의원, 김세균, 손호철, 조돈문 교수 등이 참여한다. 이외에도 김혜경, 이덕우, 김석준, 박김영희, 금민, 김영규, 임수태, 안현수, 김상봉, 이장규, 장석준, 김정진, 천영세, 이영순, 현애자, 임영일, 조현연, 노중기, 주대환, 황광우, 이광호, 이갑용, 허영구, 양경구, 임성규, 이태호, 하승창, 오관영, 하승수, 전희식, 이선근, 조준호, 김성진, 이홍우, 윤난실, 이연재, 김기수, 김형탁, 윤영상, 이은주, 최봉근, 윤철호, 권우철, 우석훈 등이 참여한다.

12월 15일 오전 8시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 이재영의 영결식이 시작된다. 상임 장례위원장들이 목울음을 삼키며 추도사를 읽고 추모객들이 흐느끼는 동안에도 담담했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한참 끊어졌다간 다시 이어진다. 고인의 삶의 궤적을 되짚었고,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상영했다. 세 명의 상임장례위원장들이 추도사를 바친다. 노회찬은 지난 운동사를 되새기면서, 고인이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그대의 한평생이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였네. 진보정당추진위, 진보정치연합에서 서른 명이 넘는 상근자가 단 한 명이 되었을 때, 그게 바로 자네였네. 2004년 10명의 의원이 당선되었을 때, 10여년 고생 끝에 평생소원의 절반이 이뤄진 듯 했네. 하지만 그 이후 분당, 창당, 재분열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진보정당은 쇠락했네. 지난 25년의 동반자로서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네.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겠네. 그대가 옮기다 멈추었던 산을 마저 옮기겠네. 그때까지 우리 모두가 이재영이 되겠네.
ⓒ노회찬재단

희망의 노래 '꽃다지'의 정윤경이 '당부'와 생전 이재영이 즐겨 불렀다는 '착한 사람들에게'를 부르는 가운데 추모객들이 고인의 영전에 헌화를 한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그때엔 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며 함께 했지 / 인간이 인간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향해 함께 했지 / 허나 젊음만으론 어쩔 수 없는 분노하는 것만으론 어쩔 수 없는 / 생각했던 것보단 더 단단하고 복잡한 세상 앞에서 우린 무너졌지 / 이리로 저리로 불안한 미래를 향해 떠나갔고 / 손에 잡힐 것 같던 그 모든 꿈들도 음~떠나갔지
허나 친구여 서러워 말아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많으니 / 후회도 말아라 친구여 다시 돌아간대도 우린 그 자리에서 만날 것을 / 젊음은 흘러가도 우리 점점 늙어간다 해도 / 우리 가슴 속 깊이 서려있는 노랜 잊지 말게 노랜 잊지 말게



1. 왜 우린 우리 스스로 만든 권력이 필요하다는 건 / 알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똑같은 놈 똑같은 권력이 싫고 염증이 난다 / 하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 아직 때가 아니라서라는 말은 말아요
그건 완벽한 부모가 되기 전에 / 아기는 갖지도 낳지도 말란 말과 똑같잖아요 똑같잖아요.오-오-



영결식을 마치고 나서 이재영의 마지막 거처였던 진보신당 당사를 들러 추모의식을 가진 후 벽제의 서울시립승화원(화장장)으로 향했다. 그의 최종 거처는 경기도 용미리의 수목장 1묘역에 마련된다. 이재영의 수목장 번호는 C-06-270이다.

<이재영추모사업회> 발족, <진보정책의 아이콘 이재영 유고집 1, 2> 발간

2013년 3월 20일 오후 7시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실 527-1호 <이재영추모사업회>가 발족, 이재영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과 유자녀 학자금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사업회 공동대표는 김기준(국회의원), 김혜경(진보신당 고문), 노회찬(진보정의당 대표), 이광호(레디앙 미디어 대표), 장상환(경상대 교수), 주대환(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등이 맡기로 한다.
2013년 12월 12일 이재영의 1주기 추모행사가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다. <누가 내 청춘을 짧았다 그래?>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상영된다. 사회는 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인 김정진 변호사. 추모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노회찬은 깊은 상념에 잠긴다.
2013년 12월 1주기를 맞아 추모사업회는 두 권의 책을 펴낸다. 진보정치의 알맹이를 채우고 키우며 쓴, "가슴에는 원대한 꿈을 지녔지만 두 발은 땅을 딛고 있던" 이재영의 글들이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레디앙·해피스토리 펴냄)란 제목으로 묶여 나온 것이다. 수록된 글들엔 '국민승리21(1997년) 창당→민주노동당 탄생(2000년)과 개화(2004년) 및 분당(2008년)→진보신당 창당(2008년)과 분열(2011년)→통합진보당 창당(2011년)과 진보정의당 분당(2012년)'이라는 진보정치의 전진과 퇴보를 지켜보며 웃고 울었던 이재영의 꿈과 분노,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다.
<유고집 2>의 발간사(「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에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 이 책은 이재영이 남긴 그간의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개인의 사적 기록이 아니다. 이미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진보정당의 탄생과 변천에 관한 역사적 쟁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단지 흘러간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쟁점들은 진보정당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여전히 뜨겁고 중요한 현안들이기 때문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 기록들은 추억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안을 다루고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한 현장의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지난 겨울, 우리는 이재영의 주검 앞에서 많이들 눈물을 뿌렸다. 가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그의 짧았던 청춘이 서러워서 울었고, 그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하는 진보정치의 현실이 한스러워 울었고, 이재영 없는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속수무책으로 마주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미워서 또 울었다.
이재영이 땅으로 돌아간 지 1년, 그는 두 권의 책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반갑네, 이재영!"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울고들 있나? 누가 내 청춘이 짧았다고 그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노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깊은 신념과 넓은 이해와 지칠 줄 모르는 투지가 아니고선 빚어낼 수 없는 뜨겁고 무거운 청춘의 무게를.
이 책을 만드느라 애쓰신 모든 분들께 이재영의 동무들을 대신해서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재영을 다시 만나게 해 줘서 고맙고 이재영과 계속 토론하고 얘기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다.
2013년 겨울 이재영의 동무 노회찬

손호철(서강대 교수, 전 민교협 상임공동의장)이 "이 책은 진보의 위기에 직면해 자괴감에 빠져 있을 진보운동가들의 고뇌와 상처를 아우르고 매만져 주는 느티나무"라고 말한 <유고집 1권>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를 시기와 쟁점별로 엮은 것으로, 이재영의 당 안팎의 정세 판단과 분석, 당시의 인식, 진보정치의 비전과 전략을 벼리기 위한 실천적 담론들로 채워져 있다. 주요 쟁점에 대한 생생하고 진솔한 발언은 생동감 있는 역사를 전한다. 진보정당운동 발전에 고비가 된 중요 시기에서 있었던 이재영의 발언을 통해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게 하면서, 진보정당의 태동과 부침, 분열과 쇠락의 과정을 잘 드러내 준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언론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유고집 2권>에서는 한국사회의 보수 우파는 물론, 보수 야당 세력과 시민사회, 노동조합, 그리고 좌파 진영을 가리지 않은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다. 좌우와 안팎 모두, 특정돼 있지 않은 비판의 과녁을 쏜 다음에는 진보적인 대안 정책도 뒤따른다. 책을 엮으며(「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글들」) 이광호(레디앙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칼럼집은 비판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두뇌와 손길이 만들어낸 진보적 대안은 글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금 살아 있으며, 진화하는 중이다." 이재영의 드문 매력 가운데 하나는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도 결코 빼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과 이른바 '진영 논리'에 빠져 자신의 편이기만 하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옹호하고 있고, 어쩌면 이것이 사회의 퇴행에 주요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2018년 7월 그 뜨거웠던 여름, '2013년 겨울 이재영의 동무'로 <(유고집 2권)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의 발간사 「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를 쓴 노회찬이 '누구나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길'을 홀연히, 그리고 황망하게 떠나고 만다.
"노회찬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다." jtbc <뉴스룸>의 앵커 손석희가 노회찬에게 한 이 말을, 이재영의 벗들은 이재영에게도 해 주지 않을까 싶다.

2018년 12월 16일 노회찬, 이재영, 오재영 등과 빛나던 젊은 시절을 진보정당에서 함께 한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투로 던진다. "이재영이도 노회찬과 오재영이 있는 마석 모란공원으로 옮기면 안 될까?" "그렇게 되면 외딴 곳에서 홀로 외롭지도 않고 참 좋을 텐데…."
▲ 2018년 12월 16일(일) 낮에 찾아간 경기도 파주 용미리 추모공원 이재영 수목장. (왼쪽부터 박갑주 박창규 박규님 윤영상)
문득,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들이 귓가를 훑고 지나간다.
"누가 내 청춘이 짧았다고 그래?"
"반갑네, 허허. 아직도 울고들 있나? … 이제 그만들 울고 다들 힘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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