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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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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민들레 교육 칼럼] 교실에서 정치가 꽃피게 하라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 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 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 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 그 맞은편에는 학교 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적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정치를 가르치되 정치와는 거리를 두라?

나는 사회 교사다. 이 말은 학생들에게 정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비록 '국영수'만큼 대접받지는 못해도 주요 교과로 분류되는 사회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정치이며, 사회과 전체의 교육 목표도 민주시민성 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사회교사 노릇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라는 말이 마치 부정 타거나 살이 끼는 것처럼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순결한 영역에 정치가 끼어들면 에볼라 바이러스라도 침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온 나라가 정치 쟁점으로 들끓어도 교실만큼은 마치 딴 나라처럼 고요하기를 바란다. 정치적인 교사는 나쁜 교사로 취급받는다. 이럴 거면 아예 교육과정에서 정치를 빼든가 할 일이지, 정치를 가르치되 정치와는 거리를 두라고 하니 당최 뭘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사회 교사들은 '실제 정치'가 아니라 '교과서용 정치'를 가르친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다른 나라 정치 혹은 추상적인 정치를 다룬다. 시민혁명은 저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고, 민주주의는 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이며, 여론정치, 시민참여정치는 추상적인 정치모델 순서도의 한 칸일 뿐이다. 우리나라 정치 교과서는 주로 정부의 조직과 기능을 중심으로 마치 전자제품 매뉴얼처럼 나와 있다. 이미 30년이 더 지나 역사로 자리 잡은 5.18이나 6.10 같은 민주화운동조차 수업시간에 다루기가 꺼려지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 교육의 현실이다.

엉터리 정치 교육을 거부하며

그래서 나는 엉터리 정치교육을 거부하며, 사회과 교육목표에 따라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을 추구해왔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쟁점을 수업시간에 다루었다. 사실 특정한 당파나 정치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특정한 내용을 다루는 것뿐 아니라, 다루지 않는 것 역시 교육의 정치 중립을 위배하는 행위이다. 어떤 쟁점, 어떤 사건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묻히기를 바라는 정치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 없다. 수업시간에 무엇을 다룰지, 혹은 다루지 않을지 결정하는 주체는 교사이며, 그때 교사가 사용하는 기준은 교육학적 근거다. 좋다. 나는 교육 전문성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회 교사, 심지어 그 전문성으로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처하는 사회 교사다. 그래서 정치적 쟁점을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수업시간에 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게 정치 교육이다.

그런데 여기서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수업시간에 다루는 '내용'이 정치 교육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다. 정치 교육이란 이익이나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합의와 조정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지, 특정 당파의 입장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정치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정치를 시켜야 한다. 그 어떤 정치도 멍하니 남의 강의를 듣고 요점을 정리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치를 이루는 기본적인 행위는 논쟁과 합의, 그리고 의사결정이다. 따라서 나의 정치 수업은 거의 대부분 논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논쟁은 상대방을 논파하여 이기려는 논쟁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논쟁하는 과정 속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는 경험을 해보기 위한 논쟁이다.

정치, 재미있게 가르치는 법

사실, 말은 쉬운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 논쟁합시다"라고 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느닷없이 논쟁을 하고 조정을 하지는 않는다. 한 반을 열여섯 명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논쟁을 시키면 어떻게든 논쟁이 진행되기는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각 그룹 당 많아야 서너 명이 논쟁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모두 응원부대이거나 무관심한 관객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논쟁 수업은 유머감각 있는 교사가 펼치는 일방적인 강의보다 더 재미없고 지루한 수업이다. 이쯤 되면 교사는 불안해진다. 피 같은 수업시간을 논쟁에 할애했는데 얻은 것이 서너 명의 말재주 경연과 스무 명의 수면 보충이라면 너무 허무하다. 그러나 논쟁 수업은 대개 이렇게 되기 쉽다.

이런 모양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논쟁할 쟁점부터 제대로 골라야 한다. 학생들이 활발하게 논쟁하면서 정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학생이 흥미를 가지고 참여할 만한 쟁점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교내에 국한된 쟁점을 선택하면 의외로 논쟁이 썰렁해진다. 예컨대 '교복과 사복', '체벌은 필요한가?', '치마 길이 단속해야 하나?'와 같은 쟁점이 그렇다. 너무 가까이에 있는 쟁점들은 논쟁을 흥미롭게 만들지 못한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언론에서도 계속 문제가 되며 여러 집단이나 세력의 가치 혹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그야말로 정치적인 논쟁을 통한 해결이 필요한 쟁점, 학생들이 자신의 시야를 넓혔다고 느낄 수 있는 쟁점이 논쟁을 더 활발하게 만든다. 실제로 나는 해마다 천성산 관통 터널 공사, 새만금 물막이 공사, 한미FTA, 4대강 개발사업, 공군 비행구역 롯데 초고층 빌딩 건설, 컴퓨터 게임 셧다운 제도, 진주의료원 폐쇄 같은 쟁점들, 정치권에서 가장 핫한 이슈를 선택해서 수업 시간에 다루었다. 만약 지금 정치 수업을 하라고 하면 학생인권조례 재개정 문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 밀양 송전탑 문제, 수서 KTX 별도 공사 설립 문제와 같은 쟁점을 다룰 것이다. 이런 쟁점들은 신문이나 뉴스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쟁을 하려면 조사하고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찬성과 반대 양측이 나름의 논리가 있어 논쟁을 통해 조정할 필요가 있는 쟁점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의 논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십중팔구 학생들은 논쟁이 아니라 서로 말꼬리를 잡고 말다툼을 한다. 따라서 논쟁의 방향을 잘 잡기 위해서는 사회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이게 교사의 역할이다. 이 역할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적극 개입해 학생들의 논쟁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오히려 쉽지, 논쟁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은 가장 어려운 교사의 역할이다. 특히 교사 생각과 반대되는 쪽에서 학생들의 합의점이 형성되어간다고 느끼면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초조해진다. 예를 들어 밀양 송전탑 문제로 논쟁을 할 때, 교사는 지중케이블을 설치하거나 송전탑 공사를 백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밀양 주민들이 한전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송전탑 공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치달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교사들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 결론이 나도록 유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정치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이런 유혹과 맞서 싸울 용기, 자신의 신념을 기꺼이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그만 자신의 당파성을 학생에게 주입해버리는 성급함을 드러낸다면, 이는 정치 교육이 아니라 정치 선동이며, 특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는 교사라면 더더욱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는 게 된다. 나 역시 학생들의 논의가 엉뚱한 방향에서 결론을 내리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그때마다 속은 쓰리지만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결론 그 자체보다는 논쟁과 조정을 통해 결론에 도달해보는 경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답답한 상황은 토론이 겉도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과 사실관계를 전혀 짚지 못하고 엉뚱한 변죽만 늘어놓거나, 서로 당위적인 주장만 하면서 평행선을 그리는 경우다. 이는 학생들이 논쟁에 필요한 충분한 자료와 정보를 갖추지 못했거나, 이 쟁점을 충분히 체득하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료와 정보가 필요한 이 문제는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자료를 수집하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 해결할 수 있다. 쟁점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쌍방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근거를 찾아두면, 논쟁이 겉돌지 않고 팽팽하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또 하나 정치 수업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학생들이 쟁점을 자기 문제처럼 느끼지 못하는 경우다. 자기 문제처럼 느끼고 이해하지 못하는 쟁점은 흥미가 떨어질 뿐 아니라 진지한 논의 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학생들이 통계자료나 논리적인 글, 언론 보도 자료만 가지고 어떤 문제를 생생하게 느끼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두뇌 자체가 원래 수치화된 자료보다 이야기를 통해 현상을 이해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의 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우슈비츠의 사망자를 상세하게 밝힌 도표보다 <소피의 선택>이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를 보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쟁점을 체득하고 느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연극 활동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논쟁을 할 때는 멍하니 있던 학생들이 연극을 만들 때는 활발해지면서 뜻밖의 끼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건 좋다. 하지만 반대로 논쟁을 할 때는 논리 정연하던 학생들이 연극에는 쭈뼛거리거나 수줍어한다. 끼 있는 학생과 스마트한 학생이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연극과 논쟁을 결합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DIE-논쟁학습이 바로 그런 수업이다.

이 수업은 학생들을 현재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쟁점을 가지고 논쟁의 양 당사자 집단으로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눈 두 집단을 다시 논쟁 준비조와 연극 준비조로 나눈다. 스마트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담당한 측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쟁점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논리를 설정하며, 논쟁을 준비한다. 끼 있는 학생들은 관련 사례들을 이야기로 꾸미고, 배역을 맡고 연극을 준비한다. 논쟁의 양측은 서로 준비한 연극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견해가 옳음을 보여주고, 공연이 끝나면 논쟁조가 전면에 나서서 토론을 진행한다. 이때 논쟁조 역시 쟁점의 당사자 역할을 맡은 상태에서 토론해야 한다. 이렇게 쟁점의 당사자에 이입된 상태에서 벌이는 논쟁은 해당 쟁점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 살아 있는 논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논쟁의 결과가 바로, 살아 있는 정치 경험이 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 법

나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들을 주로 선택하여 정치 교육을 능동적으로 해왔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해당 쟁점에서 내가 어떤 쪽을 지지하는지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사가 그것을 미리 밝히거나 드러내는 순간, 이미 불공정한 논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는 특정한 정치적 당파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교사는 자신의 정치적 당파성에 입각하여 학생들을 이끌고자 하는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은 교사의 활발한 정치활동 경험에서 비롯된다. 정치 활동을 많이 할수록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를 조정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활동의 경험이 부족한 교사는, 서로 다른 신념이 부딪칠 때 이를 조정해본 경험이 부족해서 자신의 정치적 당파성에 치우친 수업을 할 가능성이 크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인 교사의 정치 활동이 필요한 까닭이다.

* 위의 글은 <민들레> 91호 "정치가 꽃피는 교육"에 실린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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