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변하는 삶: 인상여
천자문에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지현황 우주홍황"도 잘 모르겠는데, 안물안궁? 아무튼 '기전파목'의 용병술이 가장 빼어났다는 뜻이다. 여기서 기전파목은 백기, 왕전, 염파(廉頗), 이목을 말한다. 이들은 한 시대의 형용사가 전국이었던 시대에 많고 많은 장수 중 4대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명장들이다. 사마천은 <백기왕전열전>과 <염파인상여열전>에서 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백기와 왕전이야 최종 승리자인 진나라가 천하통일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니 말할 필요가 없지만, 염파와 이목이 들어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국시대의 러시아', 조나라
우선 그들은 조나라 장수다. 조나라는 '전국시대의 러시아'다. 비록 진나라에 멸망했지만, 전국시대 중후기에 진나라와 일전 불사가 가능할 정도로 천하에 가장 정예의 기병을 소유한 나라였다. 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왕 중 한 사람이었던 무열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 흉노와 같은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뜻)와 같은 개혁 정책의 영향으로 얻은 군사력이 두드러진 나라였다. 더구나 조나라엔 염파와 조사, 그리고 이목과 같은 명장이 있었다.
문제는 조나라의 이런 명장들이 진나라의 이간책으로 인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교체됐다는 점이다. 염파는 타국 위나라에서 쓸쓸하게 죽었고, 이목은 죽임을 당했다. 만약 효성왕이 장평의 전투에서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들어 명장 염파를 병법의 이론에만 밝았던(紙上談兵) 조괄(조사의 아들)로 교체하지 않았다면? 조왕 천(趙王遷, 마지막 임금)이 진나라에 매수된 곽개의 이간술에 넘어가서 이목을 죽이지 않았다면? 부질없기는 하지만 상상을 자극한다. 요컨대 패배한 조나라에서 태어나 그렇지, 염파와 이목은 진나라를 서늘하게 만들었던 불운의 명장이었다. 승리자에게 장점만 있고, 패배자에게 단점만 있는 게 아니다.
환관의 식객 출신 인상여
헌데 조나라의 영웅전(염파, 인상여, 조사, 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염파인상여열전>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염파가 아니라 인상여(藺相如)다. 그가 등장하는 첫 대목을 보자.
"염파는 조나라의 걸출한 장수다. 조나라 혜문왕 16년에 염파는 조나라 대장이 되어 제나라를 쳐서 크게 물리치고 양진(陽晉)을 탈취했으며, 이 공으로 상경(재상에 해당)이 되었다. 그의 용맹함은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인상여는 조나라 사람으로 환관의 우두머리인 목현의 문객이었다."
한마디로 인상여는 출신이 미천한 존재라는 뜻이다. 전쟁에서 세운 커다란 공으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염파와 환관(의 우두머리)의 가신. 원래도 미천한데 염파와 같은 거물과 함께 거론하니 더욱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인상여는 "표범의 무늬가 드러나듯 멋지게 변하여" 나중에 염파와 같은 지위에 오른다. 영어 속담에 "현명한 사람은 마음을 바꿀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그는 현명하게 표변(豹變)했다.
인상여의 일생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기술할 수 있다. 첫째 화씨벽을 온전히 지킨 일(이 공으로 그는 상대부가 된다), 두 번째 민지라는 곳에서 열린 진나라와의 ‘정상회담’에서 조나라 왕의 체면을 살린 일(공으로 상경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아집에 사로잡힌 염파를 깨우쳐서 화합한 일이다.
완벽귀조(完璧歸趙)
조나라는 무열왕의 아들 효문왕 때 천하의 보물로 알려진 초나라의 화씨벽을 얻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나라 소왕은 조나라에 화씨벽을 열다섯 개의 성과 바꾸자고 제안한다. 거절하자니 진나라가 이를 빌미로 쳐들어 올 것이 두렵고, 받아들이자니 보물만 뺏길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약자의 입장은 늘 궁색한 법이다.
이 때 무현(환관의 우두머리)이 자신의 문객인 인상여를 추천한다. 인상여는 위기를 기회삼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우선 진나라의 제안을 받아야 한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들어간다. 진왕을 만난 인상여는 그가 옥만 차지하고 성을 줄 생각이 없음을 재빨리 간파하고 기지를 발휘해서 옥을 몰래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이걸 보면 인상여가 얼마나 지혜로우며 용기가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한편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보물이라도 화씨벽이 "리츠칼튼 호텔만한 다이아몬드"는 아니었을 텐데, 왜 진나라는 성 열다섯 개와 바꾸자는 제안을 했을까? 또 흠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고 되돌려 받은 옥을 잔꾀를 써서 몰래 조나라로 빼돌린 인상여를 강국 진나라에서 왜 죽이지 않았을까?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진나라와 제나라, 그리고 초나라가 강국이었는데, 진나라는 조나라와 연맹을 맺고 제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조나라는 과연 진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제나라를 칠 것인가 아닌가? 진나라는 옥을 빌려 조나라의 의도를 떠본 것이다. 또한 인상여를 죽여 조나라와의 친선관계를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민지 정상회담
몇 년 후 진나라 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고 나서 조나라 왕에게 민지라는 곳에서 '평화회담'을 하자고 요청한다.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조나라 입장에서는 뺨 때리고 어르는 격이다. 문제는 갔다가 잘못하면 죽을 위험이 있고, 가지 않으면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점. 위험하지만 가서 평화회담을 하면 조나라가 얻을 이점도 있다. 후방을 안정시켜 제나라를 공격할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여는 왕에게 갈 것을 권하면서 동행한다. 염파는 국경까지 배웅하면서 왕에게 "30일 안에 돌아오시지 않으면 태자를 옹립하겠습니다."고 말하여 허락을 득한다. 얼마나 위험한 행차인지가 잘 드러난다. 또한 왕의 신뢰와 염파의 충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말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모반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정상이 만났을 때 진나라는 조나라 왕으로 하여금 악기를 연주하도록 하여 교묘하게 신하 취급을 하려고 한다. 인상여는 조나라가 대등한 지위에 설 수 있도록 진나라 왕도 악기를 연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핍박한다. 약소국엔 외교가 없다고 하지만 인상여의 죽음을 무릅쓴 용기와 기지 덕분에 조나라 왕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문경지교
민지 정상회담에서 모욕을 당할 뻔한 효문왕을 지켜낸 공로로 인상여는 급기야 재상에 해당하는 상경의 지위에 오른다. 염파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전쟁을 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공을 세웠던 명장 염파는 은근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질투에 불타는 그의 눈에 인상여는 세치 혀로 벼락출세한 비천한 친구에 불과했다. 성질을 참지 못한 염파는 인상여에게 모욕을 안겨 주리라 공언하고 다녔고, 이를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해 다녔다. 수하의 빈객이 참다못해 묻는다. 너무 겁쟁이가 아니냐고. 인상여의 대답이 명언이다.
"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둘 다 무사할 수는 없다(둘 중 하나는 죽는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하고 사적인 원한은 뒤로 하기 때문이다."
전당강의 조수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 노지심처럼 염파도 깨닫는다. 인정투쟁을 벌인 나의 자의식이 얼마나 수준 낮은가를.... 즉시 윗도리를 벗고 회초리를 걸머지고 가서 인상여에게 사죄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한다. 사적 원한보다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인상여의 도량도 대단하지만, 잘못을 즉시 인정하는 염파도 멋지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게 잘못(過而不改 是謂過矣)"이라는 공자의 말처럼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지만 잘못을 알고도 고치기는 쉽지 않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자
<염파인상여열전>에서 사마천은 조나라의 영웅 네 사람의 삶을 기술하였지만, 논찬에서는 출신이 미천한 인상여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가 인상여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마천의 평가는 간단하다. 그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자라는 것. 지혜롭고 똑똑한 것이 영, 용기가 있는 것이 웅이다. 문제는 영하면 웅하기 어렵고, 웅하면 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인상여는 둘을 겸비한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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