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노동제를 둘러싼 논란이 특히 IT업계를 중심으로 재가열되고 있다.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주52시간제를 정면 비판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언제 망할지 모르는 상황'인 스타트업에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준수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장 위원장은 자신이 20대 때는 주 100시간씩 일했다며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타트업에 주 52시간을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권리를 뺏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당 발언에 대한 비판이 노동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IT산업 종사자 일부에서도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해당 분야에서 약 20년 간 일한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문근영 조합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문 조합원은 코스믹라이언 최고기술경영자(CTO)를 지냈고, 현재는 IT분야 프리랜서로 일한다. 1997년부터 IT업계에 종사했다. 편집자.
1. 소위 IT업계의 '전설'들이 요즘 주52시간제 하면 안 된다고 한 마디씩 하고 있다. 이게 정부의 행보에 지원사격을 해주시는 건지, 원래 그 분들 소신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느 쪽이든 좋아 보이지 않는다.
2. IT업계에서 연차보다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분들의 말에 토 달려면 경험 많은 분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내 경력을 얘기하면, 1988년에 첫 프로그래밍을 시작했고 1997년도부터 컴퓨터프로그래밍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사장이거나 무슨 협회를 하거나... 그렇다.) 물론 나도 프로그래밍만 하던 것은 아니다. 중간에 관리직도 하고, 회사도 하고. 여러 직책을 거쳤다. 지금도 코딩을 직접 하기보다는 설계나 관리 쪽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일부 시스템은 지금도 직접 유지보수를 한다.) 소위 'IT업계 전설'들에 비교하면 내 경력이 같거나 더 길면 길었지, 적지는 않을 거다.
3. 당연히 그 전설들이 현역이던 시절을 나도 경험했다. 나도 그 시절 현역으로 일을 했다. 그 시절에 대한 낭만, 추억도 많다. 그 때는 그랬다. 나 역시 일주일씩 집에 안가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싫거나 괴롭지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일이면서 동시에 재밌는 놀이였다. 주100시간? 아니 그 이상을 회사에서 보냈을 것이다.
4.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그 시간 내내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IT는 어느 분야나 프런티어였다. 그러다보니 도전 그 자체에서 오는 유대가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끼리 술도 같이 먹고, 게임도 같이 했다. 한 마디로 사무실이 업무 공간이자 PC방이었다. 시간을 엄밀하게 쪼개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일한 시간,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휴게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른 직군처럼 근로계약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IT업계 종사자들의 공감대는 여기에서 나왔다.
5.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지금 20대 개발자에게 만약 휴일근로를 명한다면 대부분 퇴사할 방법을 머릿속에서 궁리할 것이다.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상황을 만든 매니저를 속으로 욕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 그러한 모습에서 답답함을 느꼈지만, 나는 그들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일을 짜고 계획하는 게 본래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즉 당신이 스타트업을 하는데 야근과 휴일근로가 매일 반복되어야만 성공하는 사업이라면, 그런 사업은 벌이면 안 된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과정에서 창업자와 팀원들은 폐인이 되어갈 텐데. 외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외주의 경우 여전히 많은 고객이 기한을 '타이트'하게 주고 보상을 넉넉지 않게 제공하니, 필요악처럼 야근과 휴일근로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사의 외주는 안 하는 게 좋다고 본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외주업체가 그런 고객사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업계 전체를 위해서도 좋다. 그래야 외주를 주는 사람들도 개념을 탑재하게 될 테니. 프로젝트의 규모가 큰데도 '옛날' 생각에 사람은 늘리지 않고 '갈아버리는' 길을 택할 때, 분신술을 쓰지 않는 한 당연히 그 프로젝트는 결국 납기를 맞추지 못한다. 일감을 받아온 담당자 입장에서 보자면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셈이다.
6. 무리한 요구사항이 담긴 일감을 받아와 봐야, 이미 현장의 분위기는 '전설'들이 활동하던 예전과 다르다. 마치 주52시간제 때문에 회사가 망하고 IT산업이 유지가 안 될 것처럼 말하는 이들 중에 현장에 있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신지 묻고 싶다. 실제 코드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에 있는 분이 단 한 분이라도 있는가? 한국 IT산업의 결과가 노동시간에 비례해서 달라진다면 우리가 얼마나 '후진'적인지 얘기하는 것 밖에 안 되지 않는가? IT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기술력에 비례해야 한다. 기술력은 시간에 비례해서 증진되지 않는다.
7. 좋은 개발팀을 갖고 있는 회사의 공통점은 개발자들이 생각하고 공부할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실력 향상이 이루어지면 예전에는 하루 걸릴 것이 1시간에 끝나기도 한다. 이러한 격차는 IT업계에서는 기술력에 따라 비약적으로 벌어진다. 잘못 만든 코드, 잘못 설계된 프로그램은 향후 그것을 뜯어고치는데 만드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것까지 고려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만드는 게 몇 배, 몇 십 배 시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은 지금 어느 쪽일까? 대부분 당장 눈앞의 납기를 맞추기 위해 나중에 몇 십 배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일단 산출물을 내자는 쪽이다. 이런 잘못된 행태는 수십 년이 가도 바뀌지 않는다.
왜? 노동시간을 줄이면 결과가 안 나온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이들이 현재 업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부'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재벌 기업의 높으신 분들, 그 분들은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하고 계실까?
고객사와의 약속을 맞추기 위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때론 야근을 때론 휴일 노동을 하지만, 일단 나부터도 그런 생활을 더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끝으로 우리의 법정근로시간은 주40시간(하루 8시간*5일)이다. 주52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일주일에 12시간이나 야근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그런 얘기를 IT 초기 '전설'들이, 이젠 높은 자리에 올라가신 분들이 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얘기다. 하물며 IT산업의 얼굴들인데, 정말 부끄러운 얘기다. 주 52시간제는 '상징'이다.
IT업계를 더이상 '사람을 갈아 넣는 곳'으로 만들지 말자는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다.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일을 맡기는 '갑'들도 이 규칙을 새기고, '정부 높은 분들'도 이 규칙을 새기고,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 규칙을 새겨 문화를 바꾸자는 것이다.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삶'을, '노동'을 살아보자는 것이다. 어차피 이뤄야 할 목표가 있는 사람은 알아서 시간을 배분해 일을 한다.
나는 지나온 과거의 시간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갖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무식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개발 툴도, 방법론도, 노동문화도,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그것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이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다. 시대가, 현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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